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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어어.”
낯 간지러울 정도로 유민아, 유민아 하고 부르던 사람이 일순간에 성을 붙여 부른 것만으로도 괜히 움찔하게 된다.
덕분에 말까지 더듬은 김유민은 그제야 슬쩍 제 옆에 앉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고신재의 시선은 저쪽 맞은편에 고정된 채였다.
좀 더 정확히는 그가 답지 않게 채가듯 말한 ‘안경 낀 쪽’을 그 일상적인 웃음기 하나 없이 물끄러미 눈에 담고 있었다.
눈치가 퍽 빠른 김유민은 당연히 그 순간 묘한 기시감을 짚어냈다.
하지만 그 정신없던 신입생 환영회의 술자리에서 잠시 봤던 낯선 남자를 일일이 머릿속에 담고 있기는 힘들었기에, 내심 ‘그나마 잘됐네. 솔직히 저 사람이랑은 진짜 하기 싫었는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먼저였다.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이렇게 두 사람씩 하면 되겠네요. 수강정정으로 바뀌는 부분이 있으면 그건 그때 이야기해서 확정 짓도록 하죠. 여기 종이를 둘 테니까 퇴실하실 때 짝끼리 학번이랑 이름 적고 나가주세요.”
별거 아니겠지. 김유민은 턱을 긁적였다.
“신재야. 그럼 나중에 보자.”
“그래. 전공 때 봐. 조심히 들어가고.”
대답만 들으면 세상 상냥한 동기인데, 실상은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듣기 좋은 목소리만 낼 뿐이라는 것에 새삼 기분 상하지도 않는 유민이었다.
어쨌거나 적으로 두지 않기만 하면 고신재는 대학 생활을 같이 하기에 나쁜 동기는 아니다.
굳이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로 잰 듯 일관된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는 건 피곤한 인간관계의 부담을 덜어주기까지 한다.
비록, 친구는 아닐지언정 말이다.
김유민은 턱을 긁적이며 이름도 학과도 모르는 제 교양 과제 상대를 향해 먼저 발을 옮겼다.
못해도 몇 십 명은 훌쩍 넘게 수용하는 교양동의 중형 강의실은 조금이라도 먼저 자신의 조별과제 상대와 함께 빨리 이름을 적고 나가려는 눈치 싸움으로 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리엔테이션 기간은 애초에 최대한 빨리 볼일을 보고 뛰쳐나가는 게 미덕이나 마찬가지다.
“…….”
“…….”
하지만, 여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공통점을 꼽을 수 없는 두 사람은 그 틈바구니에서 몇 걸음 떨어져 느긋하리만치 여유로이 부유하고 있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여유를 부리는 건 고신재 뿐이었고 얼결에 함께 남게 된 상대는 등에 맨 백팩의 끈을 움켜쥔 채로 석상처럼 운동화 앞코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라는 게 좀 더 정확할 거다.
싹싹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람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구김이 간 종이 위에 이름을 적게 된 건, 강의실을 꽉 채운 이들이 다 빠져 나가고 나서였다.
-무용과 XXXXA2184 고신재
먼저 펜을 쥔 건 고신재였다.
그 모습처럼 단정하고 바른 필체가 또박또박 종이의 가장 마지막 줄에 먼저 쓰였다.
신재는 세 걸음 정도 뒤에 서있는 남자를 ‘이제야’ 신경 쓴다는 양,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창백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쳐다보는 시선은 영 무뚝뚝하기만 했다.
“쓰실래요.”
건넨 볼펜을 머뭇머뭇 받아드는 마른 손의 뼈마디와 고신재의 커다란 손이 살짝 부딪쳤다.
하지만 그 흔한 눈인사조차 하지 않는 상대는 모습만큼이나 신경질적으로 기울어진 필체로 휘갈기듯 펜을 움직였다.
-사진과 XXXXA1047 백한빈
그래. 백한빈. 저런 이름이었지. 사진과라.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살짝 눈썹 하나를 휘면서 혀를 찼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건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최소한 앞으로 교양 한 과목을 온전히 함께 할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기에 방해될 정도는 결단코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나 악필로 이름 석자를 남긴 남자는 그와 생각이 다른 듯 했다.
연강을 잡아뒀다고 해도 오리엔테이션 기간이라 한 시간은 여유롭게 끝난 강의실을 박차듯 튀어 나가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고신재는 그 잽싼 발걸음을 어렵지 않게 금방 따라 잡았다. 심지어는 서로 나란히 걸어나오기라도 했다는 양 산뜻하다 못해 청량한 목소리로 말까지 걸었다.
“같은 학번이네요.”
“……네.”
“XX년생?”
“……네.”
“동갑인데. 말 놓을까요.”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덕분에 고신재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예컨대, 사진과 백한빈은 저를 꽤 불편해하는 것 같다는 게 그 대표적인 예시일 거다.
고신재 그 역시도 붙임성 있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최소한 대화의 메뉴얼을 모르지는 않는다.
왜, 이렇게까지 먼저 말하면 아무리 싫어도 떨떠름하게나마 “네, 그래요.” 라고 하는, 대학 팀플에서 곧장 뒤따르는 최소한의 상투어구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대답도 않고 입을 꾹 걸어 잠그다니. 심지어는 앞선 그 짤막한 대답마저도 한참이나 뜸을 들인 다음에야 간신히 튀어나왔었다.
……‘이런 게’ 진짜 하마일까?
고신재 그가 아는 하마는 찬바람이 쌩하니 부는 타입과는 꽤 달랐다.
하마는 대답도 없이 자고 있는 저를 두고 혼자 100여개는 넘는 톡을 자문자답으로 보내며 조금 전 했던 게임 한 판이 얼마나 짜증났는지 떠들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조금만 재미있다 싶은 걸 발견하면 무조건 제게 링크부터 쏘고 보는 녀석이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게임에서 속칭 ‘뉴비’들이 어리바리 헤매다가 욕이라도 먹으면 한 번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박꼬박 참전하는 정의감, 혹은 오지랖은 또 어떻고?
고신재는 그의 인생에서 그리 자주 겪지 않은 냉랭한 대꾸 앞에서 살풋 눈매를 휘면서 다시금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같이 과제 하게 될 텐데. 서로 번호라도 알고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 놓자는 제안에 대답이 없기에 굳이 또 존대를 써 주기까지 했건만 이번에도 사진과 백한빈은 대답이 없다.
성큼성큼 먼저 걷던 걸음을 그제야 뚝 멈춘 채로 촌스러운 검은 뿔테안경을 살짝 올리는 게 전부다.
대체 도수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저런 걸 주워다 썼을까 싶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생기라곤 없는 창백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백한빈이 드디어 비싸디 비싼 대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마치 재생속도에 오류가 난 것처럼 빠르게 말이다.
“010-961X-71XX.”
“…….”
고신재의 고운 눈썹이 작게 꿈틀했다.
이 무성의하게까지 느껴지는 대답에서 대화 의지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지만 고신재는 그 나긋나긋함과는 달리 발화점이 꽤 낮은 편이다.
심지어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성격도 배배 꼬였다.
물론 그건 고신재만의 잘못도, 문제도 아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인간 고신재의 인격 형성 과정에 대한 변명 같은 건 그 누구도 대신해줄 이가 없다.
그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심지어 이제껏 잘 참아주기까지 했으니 막 나가는 대우에는 똑같이 막 나가는 대우만을 할 뿐이다.
“한빈아.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시.”
애인을 불러도 이보다 더 다정할 수는 없는 목소리에 담긴 이름이 유독 예쁘게 들렸다.
하지만 그 듣기 좋은 음절을 감상할 틈도 없이 이어진 문장은 기묘하리만치 서늘하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백한빈은 그걸 깨달을만한 눈치는 충분한 듯 했다.
웃는 낯이기는 해도 머리 하나는 더 큰 고신재다.
기본 체격이 달라도 한참 다른 그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가까이 서서 부드럽지만 딱 떨어지는 어조로 묻자, 하얗다기보단 창백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얼굴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운이 올라왔다.
백한빈은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유독 작아보이는 입술을 열어 조금 전보다는 느린 속도로 제 휴대폰 번호를 다시 읊었다.
“…010, 961X….”
“-71XX. 그래.”
기껏 다시 말하라고 해놓고 그 숫자 조합을 다 듣지도 않고 마찬가지로 중간에 말을 자른 고신재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러 백한빈이 손에 움켜쥔 휴대폰 위로 떠오른 제 번호를 확인했다.
“……볼 일 끝났어?”
“볼펜도 돌려줘야지?”
호선으로 가늘어진 눈매가 주는 온화함과는 달리 그 안에 상냥한 진심이 깃들지 않았다는 걸 모르기는 어렵다. 어린아이를 어르듯 되묻는 목소리에 담긴 옅은 빈정거림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갔는데도 백한빈은 약간의 껄끄러움 말고는 그 예민한 이목구비 위로 그 어떤 뚜렷한 생각을 띄우지 않았다.
“……여기. 이제 됐어?”
조금 늦은 말 놓기가 성사되었다.
얼마나 세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플라스틱 표면이 뜨뜻미지근하게 느껴지는 펜을 다시 돌려받은 신재는, 봄바람보다 더욱 가벼운 눈웃음을 빙긋이 걸었다.
“다음 주에 보자. 백한빈.”
대답을 씹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고신재는 오늘은 이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상대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에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목소리 한 번 들은 적 없는 5년 된 게임 친구는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훨씬 더 가까운 존재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살며 단 한 번도 반듯하게 키를 맞춘 정원에서 삐져나온 적 없는 관목 같은 삶을 산 고신재에게 하마는 꽤 특수한 위치에서 여러 의미를 품고 있었다.
부모님의 명함을 신경 쓰는 시선도 없고, 살가운 척 아는 체하는 누군가도 없는 공간에서 만난 사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익명을 빌렸기에 언제든 도망칠 수도 있는 비상구가 함께하는 일종의 대나무 숲.
고신재에게 하마는 “오늘 하루 엿같았어.” 라는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온라인은 참 편하다.
여느 때처럼 긴장한 채로 보기 좋은 몸가짐과 표정을 꺼내지 않아도 되고, 제가 어떤 인간인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온라인에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상태였기 때문일까.
5년을 알고 지내면서 상대 역시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재밌는 애네.”
메신저에 새로 추가된 친구로 사진XX학번 백한빈이 뜬 걸 잠시 내려다보던 고신재는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 말과는 다르게 곱디 고운 미소는 수려한 얼굴에서 싹 사라진 지 오래다.
가볍고,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것처럼 ‘보였던’ 모습이 무엇 하나 빠짐없이 전부 다 거짓말이라.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 없는 온라인 속의 제가, 아니 ‘가다다라123’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의 상대가 그렇게 좋은 이유가 뭘까.
저 예민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개강파티까지 나와 술에 취해 주절거릴 정도로, 그렇게나?
고신재는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보다가 스크롤을 몇 번 휙휙 내려서 한 채팅창을 찾아냈다.
그건 고신재의 휴대폰에서 유일하게 번호가 등록되지 않은 상대다. 정확히는 ‘닉네임’만으로 만들어진 오픈 채팅방이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건 오늘 1시 11분.
오므라이스가 맛없다는 투정이 마지막이다.
[하마.]
평소에는 재깍재깍 메시지를 읽던 녀석이 어째 이번에는 한참이나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마와 알고 지낸지 5년.
오픈 채팅방을 만든 지는 3년쯤 됐을까?
컴퓨터로든, 휴대폰으로든 매일같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기는 했어도 실질적으로 녀석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다.
누구보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만 사적인 정보는 건넨 적 없어서다.
애초에, 이 채팅방 자체 역시 ‘나가기’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게 끝나는 온라인의 연장이다.
그 선을 먼저 그은 건 고신재였다.
눈치가 빠른 편인 하마는 그 선을 잘 지켜줬고, 그래서 편했다. 그래서 좋았고.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약간의 조정이 필요할 거다.
특히 저렇게 부스스한 앞머리로 얼굴을 감추고 소라게처럼 숨은 음울한 남자라면 더더욱.
[너 어디 살아?]
드디어 숫자 1이 사라졌다. 대체 뭐라고 대답할까. 고신재는 조금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궁금함만큼 괘씸하기도 했다.
“……목소리도 못 알아들으면서. 누구의 뭘 좋아한다는 건데?”
[작품후기]
안녕하세요.
오랜만의 연재라 많이 떨리네요.
처음으로 쓰는 동갑내기 커플에, 캠퍼스물입니다. 모쪼록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