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 힐, 힐!-2화 (2/65)

2

1. 하마

하마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우선 고신재라는 사람이 어떤 인간이고, 또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고신재의 프로필은 몇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손꼽히는 화랑의 오너이자 강남 굵직한 건물들을 꽉 쥔 건물주인 어머니. 승승장구한 전형적인 군인인 쓰리스타 아버지. 4살 터울의 형 하나.

그는 세상 그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완벽한 집안의 일원이다.

고신재가 무용을 시작한 건 7살이었다.

처음에는 발레를 배우다가 예고 진학을 앞두고 현대무용으로 진로를 틀었다.

잘나가는 부모님을 두고 있지만 그 후광을 믿고 대충 살았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온갖 콩쿨을 휩쓸고 다녔던 건 부모의 지갑이 아니라 악에 받친 연습벌레 고신재가 얻어낸 성과였다.

그러다 들어온 한국대 무용과.

그는 입학과 동시에 학과 내에서 호불호가 격렬히 갈리는 남자가 됐다.

물론 첫인상은 최고였다. 사근사근한 말투, 유순하게 살짝 처진 꼬리, 햇살같은 눈웃음, 교수들이 먼저 아는 척하는 배경까지 관심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는 뭇 흔한 MT의 전통 앞에서 2박 3일 내내 노는 동기 몇 명에게 다가가 세상 다정한 미소와 함께 “누군 개고생하고, 누군 우아하게 앉아서 담소나 나누고. 나도 너네처럼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어?” 하고 달콤하게 물었던 순간부터 그의 평가가 갈리는 건 정해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군기가 꽉 잡힌 학과다.

덕분에 신입생과의 은근한 분위기를 즐기며 하하호호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선배 쪽은 노발대발했고, 선배 중에서도 그걸 눈꼴 사나워했던 부류들은 분위기 깨지 말고 좋게 가자며 에둘러 눈에 띄는 신입생을 변호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같은 기수들은 지칠 대로 지친 MT 마지막 날 대신 입을 털어준 그를 속 시원하게 봤다는 거였다.

그런 고신재가 게임을 시작한 건 딱 스무 살 때부터였다.

사실, 7살 때부터 슈즈를 신고 내내 춤에만 매달리다 발레에서 현대무용으로 전환해서 예고까지 쉼 없이 달린 그에게 또래 친구들이 곧장 가는 PC방은 멀어도 보통 먼 문턱이 아니었다.

고신재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문 앞에서부터 픽업 되어 곧장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가는 PC방 같은 건 엄하디 엄한 고씨 가문에서 허락되는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집에서 형제가 컴퓨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 6시부터 10시 사이, 용도는 오로지 학교 숙제용으로 제한됐을 정도니 더 말 할 것도 없다.

물론, 그 황금 시간을 주로 차지하는 4살 터울의 형 역시 최악의 조건 중 하나였다.

부모님이 없을 때 몰래 게임을 하는 형을 보며 “형, 나도 하게 해 줘.” 같은 말을 붙임성있게 건넬만한 성격이었다면 또 모른다.

하지만 신재는 그 어릴 적부터 가족에게마저 아쉬운 소리 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질머리였다. 다시말해 형에게 괜한 부탁을 하느니 ‘그거 해서 뭐해’ 하고 마는 인간이었다는 거다.

이 고집은 고신재 그가 퍽 이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외모와는 달리 컴맹으로 자란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여하튼 그렇다.

대학 새내기로 입학한 스무 살.

신재는 같은 학교의 3학년으로 앞서 다니는 형과 함께 학교 근처의 주상복합에서 따로 독립해 살게 됐다.

「…….」

그리고 그게 20년 만에 처음으로 그 엄한 부모님의 감시도 없고, 형이 늘 차지하고 있지도 않은 고신재 그만의 컴퓨터를 가지게 된 첫날이기도 했다.

고신재는 처음으로 온전히 제게 떨어진 커다란 모니터며 까만 본체 앞에서 어색하게 눈만 깜박였다.

덕분에 신재의 형, 고진영은 그런 제 동생에게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을 또 했다.

「그냥 노트북 사라니까. 꼭 말 안 듣고. 학교 다니면서 쓰기엔 그게 낫다고.」

「꺼져줄래?」

「너 장담컨대 한두달 만에 노트북도 살까 이지랄 한다.」

「형이 사 줄 거면 더 하고.」

「…….」

삐딱하게 굴고 있기는 하지만, 진영의 말은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고신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포털사이트 메인만 한참을 들여다보며 이걸로 뭐하지, 하고 거의 10분째 고민만 하고 있었다. 진영은 그런 자신의 동생을 보며 작게 푹 한숨을 내쉬었다.

흑갈색 체모, 북방계 미인인 어머니를 그대로 빼닮아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이목구비, 지나온 인생 대부분을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극도로 다듬는데 쓴 터라 허투루 자리 잡은 근육 하나 없는 몸까지.

그렇게 무엇 하나 흠잡을 것 없는 녀석이 커다란 손에는 너무 형편없이 작은 마우스를 쥔 채 공연히 딸깍거리며 눈만 깜박이는 모습이라니.

20년간 TV 시청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집에서 나고 자라 대뜸 혼자 살게 됐던 순간의 어색함과 얼떨떨함을 이미 앞서 경험한 형 고진영은, 그런 제 혈육 두고 가기가 뭐했다.

「뭐라도 해. 게임이라도 하든가.」

하지만 이제껏 20년을 살면서 그 흔한 온라인 게임 아이디 한 번 만들어 본 적 없는 고신재에게 이보다 어려운 요구가 또 없었다.

「깔 줄은 아냐, 컴맹.」

「…….」

침묵의 의미는 단출하리만큼 선명했다.

결국 진영은 기본 프로그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제 동생의 컴퓨터에 그가 친구들과 함께 종종 하는 게임을 대신 설치해줬다.

「이게 뭔데.」

「요새 이거 많이 해.」

「싸우는 거?」

「……그래. 싸우는 거.」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되묻는 표정이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이미 중학교 3학년 때 180cm를 찍고, 이듬해에는 5cm를 더 자라 대학에 입학할 땐 기어코 189cm로, 두 번째 숫자가 안 바뀌어 다행이라는 말을 하던 커다란 짐승이 실로 오랜만에 동생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총싸움?」

「총도 쓰고, 칼도 쓰고, 망치도 쓰고… 아, 야! 너는 힐러부터 해. 누구 뒷목잡고 쓰러지게 할 일 있냐.」

스무살의 고신재는 제 형이 자신에게 골라준 게임 캐릭터를 보고 그 말끔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제대로 된 게임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에게 소위 ‘컴퓨터 게임’이란 뭔가 우락부락한 군인들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장 화면을 가득 채운 건….

「이 날개 달린 여자로 뭘 해.」

「힐!」

「힐?」

「힐! 힐도 몰라? 피 채워주는 거!」

「치료를…… 하라고?」

「치료…, 후우, 어쨌든. 얘가 제일 쉬워. 연습게임부터 하고. F1 누르면 설명도 떠. 알아서 잘해라. 나간다.」

뭇 형이라는 존재가 그렇듯 고신재는 최소한의 정보만 얻은 채 험난한 야생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독수리 타법만 아니다 뿐이지, 치면서 슬쩍 키보드 컨닝을 해야 할 정도로 타자조차 느려 터졌으면서 살며 처음 시작한 온라인 게임이란, 대체로 예상 가능한 범위의 미래를 수반한다.

[딜러안주면던짐 : 씨~발]

[딜러안주면던짐 : 힐 존.나 안들어오네]

[딜러안주면던짐 : 우리힐러뭐함? 산책하냐?]

[동작구미남 : 봇임ㅇㅇ]

욕은 신비하다.

아는 단어가 다섯 개가 채 안되는 외국어라고 할지라도 욕을 먹으면 ‘어, 저 새끼 욕했다.’ 하고 깨달을 수 있다.

하물며 한평생 읽고 쓴 문장으로 쏟아지는 말이라면, 그게 아무리 낯선 문맥이라고 할지라도 누굴 향하는지 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0년 평생 단 한 번 저런 노골적인 비난의 끝에 서 본 적 없던 고신재는 천천히 타자를 눌렀다.

지금, 그거, 나, 한, 테-.

「……어.」

죽었다.

아마, 세 번쯤. 아니, 다섯 번쯤?

사실 여덟 번은 넘은 것 같다.

분명히 형 말대로 ‘연습게임’도 하고 들어왔고, F1키를 눌러서 설명도 다 읽었다.

하지만 길은 뭐가 이렇게 복잡한 거고, 눈앞에서 뭐가 이렇게 터지는지 모르겠다. 소리도 시끄러워 죽겠다.

분명히 제가 ‘치료를 한다’라고 했는데, 아군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은 모두 몸통에 치명상을 달고 있는 건 또 뭔가.

다들 도미노처럼 하나하나 단말마를 내지르며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는 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딜러안주면던짐 : 트롤신고ㅅㄱ;]

[힐노예 : 담판간다]

확실히, 욕먹고 있다는 건 알겠다. 심지어 같은 ‘힐러’에게도 욕먹고 있다. 그것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이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하는 건데? 뭐가 재밌는 거고?

고신재는 이 빌어먹을 게임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세상 다시없을 컴맹이기는 하지만 ESC키의 역할 정도는 아는 그였다.

하지만 그때였다.

[물먹는하마 : 레벨5잖아]

[물먹는하마 : 냅둬]

[딜러안주면던짐 : 뭐래 개~새야]

[물먹는하마 : 탱이 4분째 킬금딜금인데?]

[물먹는하마 : 딜러두명뭐하는데? 산책???]

[힐노예 : 아ㅋ 진실의종]

‘레벨 5’는 저를 말하는 게 분명하고, 다음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욕하던 두 명이 조용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그 녀석들에게 한 방 먹인 모양이었다.

고신재는 자신을 편들어 준 사람을 정신없는 화면 속에서 찾아 헤맸다.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우람한 캐릭터가 ‘하마’였다. 신재는 거대한 캐릭터와 이름이 퍽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덩치의 체력이 닳기가 무섭게 채우기 시작했다.

[쁘티첼 : 힐러님 저도 힐좀 주세요ㅠㅠ]

[딜러안주면던짐 : 저 개~새/끼들 듀오임 백퍼]

[힐노예 : 하...]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건 무시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하마’만 힐을 준다.

그게 스무살 고신재의 인생 첫 온라인 게임이었다.

한 판은 길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발 딛는 족족 욕만 먹던 게임이 끝났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묘하게도 기분은 괜찮았다.

팀원들은 모두 나가고 저와 ‘하마’만 남아있었다.

신재는 그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자니, 화면 위로 짤막한 문장이 올라왔다.

[물먹는하마 : 힐러님]

[물먹는하마 : 저랑같이하실?]

뭐를.

이 좆같은 게임을?

고신재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짤막하게 한 글자 썼다.

[가나다라123 : 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