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 힐, 힐> 진램
1
힐, 힐, 힐!
COPYRIGHT ? JINLAMB
프롤로그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개강 첫주의 대학가 앞.
취기에 가득 찬 술집은 바로 옆 사람이 하는 말도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인데도, 고신재의 귀에 유독 박히는 문장이 있었다. 소음에도 묻히지 않을 정도로 유독 카랑카랑한 목소리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뭐어?!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러니까 소개팅 못 해.”
신재는 의자 두세 개 정도 떨어진 옆 테이블에서 듣기 싫어도 귀에 걸리는 풋풋한 대화에 턱 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숨겼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을 그였지만 오늘은 별수 없었다.
무슨 애들 노는 자리에 교수가 끼겠다고….
“누, 누군데? 우리도 아는 사람이야? 어?”
“아니.”
“학교 사람?”
“아니.”
“그럼? 너 맨날 집에 박혀 사는 히키잖아. 백한빈, 네가 사람 만날 구석이 어딨다고?”
현대무용의 미래 운운하면서 했던 말을 무한 반복하는 교수, 신입생에게 별 같잖은 추파를 던지는 선배와 동기들.
거기에 낯선 누군가의 반쯤 혀가 풀린 술 취한 연애담까지.
정말이지 짜증 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없는 저녁이다.
8시 10분.
몇몇 통학생들은 귀가를 핑계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사는 고신재는 군복학 전에도, 또 지금도 마지막까지 교수에게 붙들려야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닐 거다.
그때, 이어지는 채근을 이기지 못한 대답이 저쪽에서 웅얼대듯 흘러나왔다.
“게임에서 만났어.”
“게임? 백한빈 얘 게임도 했냐? PC방도 안 가는 놈이.”
“야. 너 몰랐구나. 이 새끼 게임 엄청 잘해. 우리랑 하면 속 터진다고 안 가는 걸걸. 챌린저도 찍던데.”
“헐.”
배신자라느니, 너무하다느니 하는 술 취한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개중 좀 더 이성이 남은 누군가는 다른 쪽으로 향하려던 화제를 얼른 붙잡았다.
“살다 살다 너처럼 까다로운 놈이 또 없는데. 예쁘냐?”
“목소리가… 완전 좋아.”
“목소리 좋은 거 좋지. 그래서 예쁘냐고.”
“……으음.”
연애담의 당사자는 모호한 대답 이후 더 이상 말이 없다.
대신 주변에서 “야. 백한빈 이 새끼 뭔 일로 술을 이렇게 마셨냐.” 하고 혀를 차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때, 소란스러운 술집에서 혼자 부유하듯 조용히 물만 홀짝이는 고신재의 옆으로 동기 하나가 바짝 붙어 앉았다.
유독 남자가 적은 고신재의 기수에서 올해 딱 한 명 복학한 남자 동기인 김유민이었다.
“고신재, 너는 신입생 테이블 한 번도 안 갈 거야?”
귀를 사로잡는 낯선 이의 술 취한 고백에서 그제야 벗어난 고신재는 살짝 처져서 유독 온화하게 보이는 눈매를 화사하게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나 대신 네가 오늘 2차까지 맡을 거면 가고.”
“…엇….”
“아니면 개 교수한테 지금부터 술 갖다 부어. 필름 끊기는 대로 택시에 접어 보내게.”
휴학하기 전에도 서로 마주치면 적당히 인사만 하던 사이였건만, 갓 군복학 해서일까. 유민은 개강하자마자 전에 없이 기껍게 굴었다.
덕분에 여느 때처럼 적당한 자발적 아웃사이더 생활을 하려던 고신재의 이번 학기 계획은 꽤 어그러졌다.
지금도 그랬다.
“하하, 그런데 신재 너 지금 시간표 그대로 갈 거야?”
“아마도.”
“혹시 수요일 괜찮으면 나랑 교양 하나 같이 듣자. 2인 1조로 하는 게 있다던데, 오랜만에 복학이라 정신이 없네.”
“글쎄. 수요일 시간표 우선 한 번 보고.”
대충 말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옆에 앉아 눈을 굴리는 김유민의 모양새는 어째 지금 당장 시간표를 확인하라는 듯한 표정이다.
고신재는 살짝 처져서 유독 온화하게 보이는 눈매를 화사하게 접어 웃으며 벌써 오늘 밤에 몇 번을 튀어나오려고 했는지 모를 한숨을 꾹 삼켰다.
어째 오늘 저녁은 유독 힘들다.
소란스럽고 탁한 공간에 앉아있는 것도 싫은데,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몸을 낮추고 머리를 가까이해야 하는 것도 슬슬 불쾌함을 건드린다.
“--나 걔가 너무 좋은데.”
심지어는, 잠깐 조용해졌나 싶던 옆 테이블의 ‘좋아’ 시리즈도 다시 시작됐다.
고신재는 차가운 것을 급히 먹었을 때 오는 두통처럼 쨍한 목소리에 담긴 취기 어린 고백을 무심하게 흘려 들으며 휴대폰을 들었다.
사실 고신재는 그때까지만 해도 듣기 싫어도 들리는 낯선 이의 술주정을 꽤 성가시다 생각했었다.
이어질 말 같은 건 상상도 못하고.
“걔가 나한테 맨날 하마야, 하마야, 그러거든? 맨날 넌 힐 먹는 하마라고 웃는단 말야. 근데, 난 그 웃는 게… 그게, 난 너무….”
“하마?”
“걔랑 나랑 벌써 5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이정도면 진짜 긴 거 아니야? 맨날 톡도 하고, 컴퓨터만 켜면 이야기하는데. 5년이면, 진짜 긴 건데. 왜 나는 걔에 대해 아는 게 없을까. -아니. 내가 아는 건 기대도 안 해. 안 하는데.”
“뭔 소리야, 대체. -야! 대체 누가 백한빈한테 술 줬냐! 술도 못 마시는 애한테!”
이제 낯선 고백은 흥미롭게 듣던 친구들마저 취담으로 넘기는 우울한 생떼 수준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절절한 고백을 들으면서도 옆 테이블 쪽으로 곁눈질 한 번 안 하던 고신재가 드물게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건 그때였다.
그는 정신없는 술집 안에서 기어이 제가 들은 고백의 주인공을 찾아냈다.
우울한 짝사랑의 주인공은 얼굴은 술에 취해 물론이고 목까지 벌겋게 변한 남자였다.
걸치고 있는 스웨터의 품이 넉넉해 보일 정도로 비쩍 마른 체격에 부스스하게 기른 검은 머리, 얼굴의 반을 가린 촌스러운 뿔테 안경. 살짝 끝이 올라간 홑꺼풀의 눈.
솔직히 우울하고 까칠한, 솔직히 그걸 넘어 음침하기까지 한 느낌이다.
저 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이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발견하기조차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고신재의 시선은 그 볼품없는 고백의 주인공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런데 걔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안 궁금할까? 5년이잖아. 5년인데….”
술 취한 남자는 입안에서 뭉개지는 듯한 주정을 마지막으로 테이블로 쿵, 작게 머리를 박았다.
[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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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옛날에 써둔 프롤로그라 저는 익숙해져서 몰랐는데,
살짝 시점이 헷갈리신다는 코멘트를 보아서 급하게나마 조금 고쳐보았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