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아… 몰랐어요.”
“익숙하니 불편해 말아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현생의 친부모와 지낸 날은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청난은 삼십 년을 함께 지낸 친부모도, 형제도, 사형제와 제자들마저도 잃었는데 한 달 남짓 지낸 친부모의 죽음에 침울해할 정도로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청난의 달램에도 진영은 여전히 어쩔 줄 모르는 낯을 하였다. 청난은 목을 살짝 빼어 진영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였다.
“제 진짜 생일은 가을이에요.”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올곧은 자세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매아는 겨울이죠. 고아지만 제가 그렇게 정해 주었어요.”
난이 백매를 만나고 거둔 것은 한겨울 때였다. 그 때문에 백매의 생일은 그들이 만난 그날이 되었다.
“그럼 청운 아저씨가 정해 준 생일은 언젠가요?”
청난과 청운이 만난 것 또한 겨울이었다. 그날 정신은 혼미했지만, 손끝이 아려 오던 차가운 추위와 자신을 안아 든 투박한 손은 기억 속에 새겨졌다.
“제 생일은 봄이에요. 이제 스물이나 스물하나쯤 되었네요. 편의상 스물하나로 세고 있어요.”
오랜 기간 앓던 자신이 눈을 뜬 그날, 처음 본 청운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발음이 뭉개져 알아듣지 못할 말로 자신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그날이 ‘청난’의 생일이 되었다.
“기억해 둘게요.”
“응.”
청난과 진영은 계획대로 월병을 먹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진영과 청난은 특별히 일찍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월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먹거리 나들이를 시작했다. 그 덕분에 진영은 청난이 고상한 외모와 달리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마다 제 이야기를 덧붙이는 스승께서 백매선의 입맛을 어린아이의 것과 진배없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짜로 백매선이 팥 앙금에 꿀을 올린 것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청난이 준 것이라면 화백매는 설사 독이라 하여도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마을 내 상업의 규모는 꽤나 커졌다. 교환의 장은 크고 다양할수록 좋았다. 아랑 마을에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부지가 많았는데 그런 곳들에도 상가가 지어졌다. 하지만 단 한 곳만은 주변에 결계가 쳐진 것처럼 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해류진군 신상이 있는 곳이었다.
오히려 그곳은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여러 공물로 인해 낡은 사당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기원을 올리러 온 주민들이 많았다. 청난은 그들의 시선이 모여들어도 아랑곳 않고 신상 앞에 섰다.
신상은 백매를 닮았으면서 동시에 청난을 닮아 있었다. 이전에는 그것이 재미나게도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아쉽기만 하였다.
신상의 입매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청난은 그 인자한 미소를 마냥 바라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시죠?”
청난의 시선은 그 높은 하늘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았는데, 아닌 척 그를 바라보던 이들은 마치 그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주민들은 죄를 청하러 오는 백성처럼 불편한 마음을 안고 청난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청난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으나, 청난의 주변에는 결코 다가가지 않았다. 마치 이 신상의 주변 터가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은 신앙과 닮아 있었다. 청난의 발끝은 땅에 있었고, 그의 머리 꼭대기는 심지어 몇몇 주민보다 낮기까지 하였는데도, 그의 존재감만큼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이 신상과 비교하여 결코 작지 않았다.
진영은 이 주민들이 당장 무릎을 꿇는다 하여도, 그 모습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청난은 그제야 고개를 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군가는 무심했으며,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고, 또 누군가는 못마땅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들 모두가 청난에게 죄책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그에게 모여든 것이었다.
청난은 더 이상 그들에게 단서를 주지 않았다. 그저 저 높은 곳의 미소처럼 웃을 뿐이었다.
잠깐의 적막함이 흘렀다. 마치 겨루기를 하듯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을 때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청난에게 몰려 있던 시선 중 일부가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그는 어린 청년으로 얼마 전에 열여섯이 되었다. 그는 모여든 시선에 당황하여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느리게나마 자신의 말을 꺼냈다.
“제가 겁이 너무 많아서… 형이 조금 무서웠어요. 그래서 피해 다녔어요. 형이 떠나길 바란 건 아니에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니?”
“아, 아니에요!”
청년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풀썩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주민들의 어떤 반응에도 대응하지 않고, 내려다보기만 하며 방관적 입장을 취했던 청난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천만에. 네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구나.”
“혀어엉……!”
청난에게 달려온 청년이 그를 덥석 껴안았다. 청난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아이를 달래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청난의 손길이 푸석한 머리 위를 쓰다듬으니, 청년은 더욱이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 훈훈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자아내어 반응을 촉발했다.
“미안해, 몰라서 그랬어.”
“널 싫어하는 게 아니야.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또 갈 거니? 마을에 있으면 안 돼?”
“난 선생님이 좋아요!”
한두 사람으로 시작했던 것은 점점 늘어나 나중에는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청난은 예전의 일 따윈 없었던 것처럼 하나하나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가야 해요. 그리고 돌아올 거고요. 그나저나 아주머니, 몸은 괜찮으세요? 아까 찬으로 파시던 나물을 봤는데, 상처 회복에도 좋아요. 제 아버지가 잘 아실 거예요. 그리고… 다들 과찬이 심하세요. 전 그저 책에서 본 것을 따라 했을 뿐인걸요.”
한 번의 말을 주고받을 때마다 청난과 그들 사이의 간격은 줄어들어, 이제는 서로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다. 진영은 그들처럼 풀어야 할 회포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기만 하였다.
청난은 고아한 신선 같은 면모를 보이더니, 이제는 그들 사이에 어울림에 어색함이 없어 그들과 같은 범인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원래 온 목적을 잊은 것인지, 청난과 한참을 대화하더니 저마다 선물을 안겨 주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거 다 먹기도 힘들겠어요.”
“하하, 아무래도 그렇겠지?”
청난은 한 아름 들고 있던 선물들을 신상 앞에 내려놓았다.
떡이나 찐빵, 꽃이나 종이 등 같은 것을 평소에 들고 다닐 리도 없으니, 이것들은 애당초 해류진군 신상에 바쳐질 예정이었을 터였다.
“사존은 무슨 기원을 올리실 건가요?”
“응?”
“공양을 바치셨잖아요. 그럼 기원을 올려야죠.”
“기원… 기원이라…….”
청난은 선계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단 한 번도 기원을 올려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선 기원을 올릴 바에야 직접 움직였고, 현생에서는 선계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사당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수선계에서 멀어지겠다는 다짐도 사라졌고, 이렇게 사당도 생겼다. 그렇다면 다른 범인들처럼 기원을 올리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청난은 양 손바닥을 마주 대었다. 하지만 그저 신상을 바라볼 뿐, 눈을 감아 소원을 바라진 않았다.
“왜 망설이세요?”
“…….”
진영의 물음을 똑똑히 들었지만, 청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청난의 망설임에는 그에 대한 답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영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짧지만은 않은 스물두 해를 살았음에도 연모의 감정을 느껴 보지 못한 탓일까. 그저 저 두 존재가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들을 가까이서 본 것은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서로를 보는 눈이 어떤지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연모했다. 그것은 틀림없었고, 그래야만 했다. 만약 그것이 일반적인 사제지간의 눈빛 교환이라면…….
‘으으…….’
진영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저렇게 보는 수선계의 모습을 상상하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닥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를 연모하니 이제 마음을 고백하고 혼례를 올리든, 집을 마련하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만 남은 게 아닌가? 물론 그 전에 일을 해결해야겠지만.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애당초 고백을 나누긴 했을까 의문스럽다.
‘백매선은 마음을 전한 것 같지?’
백매선은 대부분의 것에 무심했으나, 제 스승에게는 조심스러웠다. 때로는 그 위에 있는 유일한 존재가 진청난뿐인 걸까 하는 몹쓸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백매선이 진청난을 걱정하고, 애틋해하며,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듯한 애정 표현을 하는 데는 거침이 없었다.
‘그에 비해 청난 사존은 회피하고 있어.’
자신의 마음이 가장 큰 악행인 것처럼 참아 내고, 또 부정했다. 그런 방면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가 싶다가도 또 어쩔 때는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섭리인 것처럼 멍하니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곤 하였다.
그 조심스럽고 애틋한 감정들 사이에서, 오직 진영만이 답답했다. 말실수할까 조심스러워서 마치 바늘 산을 걷는 기분이다. 진영은 백매가 없는 지금이 기회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지나면 다음은 없다! 영원히 애매한 관계 사이에 끼어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