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무얼 하고 있는지 물은 게 아니었다. 청난은 이미 진영의 보법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의 질문의 요지는 진영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에 있었다. 진영은 그 점을 깨닫고 대답을 골랐다.
“어……. 진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너는 진법을 파헤치고 있는 거란다. 이런 형식의 진법은 막는 것과 혼란을 주는 것에 목적이 있다. 다만 적절하게 파훼하고 다시 맺음으로써 길로 쓰고 있는 것이지.”
“벌써 수업이 시작된 건가요?”
“맞아. 생활에서 접목하면 기억하기도 쉽겠지?”
청난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진영은 차라리 탁상 앞에서 듣고 싶었다. 어떻게 저 말을 다 외우겠는가. 받아 적기라도 해야지! 물론 다시 물어보면 알려 주시겠지만, 청난의 어투를 보아하니 한번 듣고 기억할 것이라 여기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런 진영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청난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주변 인사들도 뛰어난 자들이 수두룩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가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었다. 청난은 평범한 사람들의 수준을 오해하고 있었고, 그렇게 진영의 머릿속은 흘러넘치는 정보들을 주워 담으랴 정신없게 되었다.
청난의 짧은 교습은 마침내 도착지에 다다라서야 끝이 났다.
큰집의 벽은 높기 때문에 어디서라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눈대중으로 재어 본 결과 이곳은 큰집의 가장 정중앙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건 작은 오두막. 평범한 서민의 집보다도 작은 오두막에 불과했다.
‘보이는 것보단 크려나.’
진법 안에서는 보이는 것을 믿어선 안 되고, 들리는 것을 믿어서도 안 된다. 이곳에 오두막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오두막이 아닌 거대 저택이 있을지도 몰랐다.
“엄마, 저 들어가요.”
진영이 문 앞에서 소리를 내지르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과연 안은 보이는 것보다 넓었다. 이곳은 방의 구분이 없었는데, 수많은 책장들과 가득 찬 서적들로 인해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진영을 따라 헤쳐 들어가니 가장 안쪽에서 수기에 열중하는 진 대인이 보였다.
그는 진영의 발소리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영아, 그만 돌아가… 아, 책사께서 오셨군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인.”
다른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진 대인과 눈이 마주치자 청난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이에게 듣기로는 이번에도 책사의 도움으로 구명하였다고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포권을 하던 진 대인은 말을 끝으로 상체가 점점 내려가더니 급기야 절을 하기에 이르렀다. 청난은 깜짝 놀라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막아지지 않았다. 그 누가 이런 무력을 지닌 이를 표국주도 아닌 평범한 상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오늘은 청이 있어 온 것인데 이러시면 제가 어찌 청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봐서라도 일어나 주세요.”
“책사의 청이라면 무릇 들어야지요.”
진 대인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쪽으로 청난을 안내하였다. 그곳 역시 책장에 둘러싸인 탓에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절한 곳은 못 되었으나, 적어도 세 명이 앉을 자리는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안채로 모시고 싶지만, 이곳에 들어오시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지셨겠지요. 영아, 다음엔 어미를 밖으로 부르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하하…….”
이 모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체력이 짐작이 갔으나, 부정할 수도 없었기에 청난은 그저 웃음으로 넘겼다. 확실히 더 걸으면 다리가 아팠을 터였다.
진 대인은 가까이에 있는 책장에 손을 뻗어 뒤적이더니 그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정리를 안 한 걸까, 원래 저 자리에 두는 걸까 의문스러웠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것은 예상한 대로 찻잎이었다. 청난이 차를 좋아하는 것을 아니 굳이 평소에 즐기지 않는 것을 애써 꺼낸 모양이었다.
“영아, 잠시 나가 보거라.”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청은 영이에 대한 것이니까요.”
청난의 눈이 가늘어지며 부드럽게 휘었다. 평소의 청난도 온화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미소를 자주 지었다. 그러나 진 대인은 지금의 청난에게 평소의 온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이것은 굳이 따지자면 고풍스러움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단어도 완전히 부합하진 않았다.
날 때부터 부와 명예를 가지고 태어나, 자신의 것임이 당연한 그런 세계에서 산 자들이 지을 법한 표정을 이 고아였던 청년이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진 대인의 신경은 그것보다 다른 것에 향하였다.
‘영이?’
언제부터 청 책사가 자신의 아들을 이리도 정답게 불렀던가. 적어도 그가 마을을 떠날 때까지는 그러지 않았을뿐더러, 그의 어투가 주는 느낌은 친분이 깊은 지기를 부르기보다는 자신보다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이를 제게 보내 주시겠습니까.”
“푸흐흐흡!”
갑자기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청난의 얼굴을 가득 적시었다. 청난은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허망하게 원인인 진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영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소매로 청난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엄마야, 죄송해요 사존. 아니,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에에……! 하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느냐…….”
피부가 박박 문질러지는 동안, 갈 곳을 잃은 청난의 양손은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었다. 청난은 물도 맞았는데 심지어 자신의 탓이라 하니 억울했다. 하지만 억울한 건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말 좀 그렇게 하지 말아 주세요! 오해받을 거라구요!”
“되었다, 되었다. 그만 닦아라. 내 살다 살다 얼굴에 차가 뿜어지는 건 또 처음이구나.”
살결이 벌겋게 부어오를 지경이 되자 청난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피했다. 그리고 남은 물기는 자신의 양 손바닥으로 세수하듯 닦아 내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물에 젖으며 피부에 달라붙었다. 피부가 얇은 탓일까, 눈가를 비롯한 얇은 곳들은 특히 더 불그스름해졌다. 아니, 이건 진영이 문지른 탓이었지.
어쨌건 청난은 똑바로 보기 민망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 탓에 진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자신이 고개마저 돌리면 상황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란 것은 뒤늦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 우당탕하는 알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진 대인이 신경 쓰는 건 또 다른 것이었다.
“제자라니?”
“아, 그게 말이죠. 엄마, 아니 어머니, 아들이 속세를 벗어나 도를 닦고 싶습니다.”
“아가, 왜 그렇게 말하느냐?”
새 제자의 말에 청난이 눈썹을 휘었다. 그의 말은 아무래도 몹시 수상쩍었다.
“어라, 그럼 보통 무어라 말하나요?”
“입문이라 하면 되지 않느냐.”
“아, 그렇구나. 어머니, 아들 입문합니다! 청 책사를 스승으로 모실 겁니다.”
어머니는 황당하였다. 대체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그리고 황당함보다 더 큰 것은 걱정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냐. 네가 수선한다면 몹시 기쁜 일이다. 하지만 책사는 수사가 아니지 않느냐. 널 부른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지 한 대인 밑에서 하산하라는 게 아니야. 안전해지면 다시 가도 좋단다.”
아들을 달래는 말을 마친 진 대인은 청난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 기분 상하시지 않았길 바라오. 책사가 만사에 뛰어난 건 알지만, 지식만으론 가르치기 어려운 분야란 게 있지 않소.”
청난의 태연한 낯은 변하지 않았다.
“그 마음 이해하니, 염려하지 마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한 대인이 어느 분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제게 술법을 가르쳐 주셨던 사부님이 한씨 성을 쓰세요.”
대답을 한 건 진영이었다.
“그분을 사부라 불렀었구나.”
“맞아요.”
진영은 고개를 돌려 진 대인에게 말을 이었다.
“한 사부는 좋은 분이시지만, 그분은 절 취미로 가르치셨어요. 물론 그 또한 즐거웠지만, 그래도 저는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책사의 아래에선 제대로 배울 수 있단 말이냐?”
이번에 진영에게 간 질문에 청난이 대답하였다.
“네, 그렇습니다. 영이는 제 아래에서 수행하여 공덕을 쌓을 겁니다. 우화등선까진 어렵지만 한 명의 수사는 될 수 있죠. 잘 가르칠 수 있다 자신합니다.”
“책사, 수선은 그리 간단하게 입에 올릴 게 아닙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는군요. 제가 어디서 속아 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불편해 마시오. 책사는 마을 토박이가 아니오? 책사가 제 입장이면 충분히 걱정할 것이외다.”
“음, 그렇네요. 저 같아도 그리 생각할 거예요.”
진 대인이 걱정한 것과 달리 청난은 아무런 불편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풍문을 들은 귀공자처럼 작게 조소할 뿐이었다. 진 대인은 그 표정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혹시 그가 사기당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를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일 터였다.
청난은 진 대인의 반응이 더 이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스스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진영 공자를 제게 보내 주시렵니까?”
“…….”
진 대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진 대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장군의 기개를 담고 있던 눈동자가 지금은 어머니의 혼을 담고 있었다.
그는 숨을 살짝 들이마시고, 입 끝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그 속에서 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나긋한 것이었다.
“……책사, 자식을 고난 속에 넣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있던데. 청난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사태가 벌어진 원인을 거슬러 간다면, 그곳에는 한 문주가 서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