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탁탁.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대신 다구에서 쪼르르 흐르는 물소리가 방을 채웠다. 그 소리는 청량하여 듣기 좋았다. 청난이 찻잔을 높이 들어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셨다. 쓰다.
향은 달콤한데 맛은 이토록 쓰다니. 좋은 약차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청난은 백매를 힐끔 보았다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백매가 빈 잔을 다시 채웠다.
“…….”
“한 잔 더 드세요.”
청난은 애제자의 청에 또다시 쓴맛 가득한 차를 들이켰다.
“아느냐? 이거 정말로 쓰다.”
“쓰죠. 차보다는 한약에 가까운 것이니까요. 사존의 몸은 찬 편이시니, 도움이 될 거예요. 겨울이잖아요.”
청난은 벌써 세 잔째인 약 같은 차를 뚫어져라 보고는 깨작깨작 마셨다. 그래도 마시긴 마셨으니 백매는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슬며시 웃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입꼬리가 내려앉았다.
“사존, 한연화가 개입되어 있다면 이 일은 너무나 위험해요.”
연화문을 나서고 갑자기 진영을 제자로 받은 탓에 이제껏 미뤄 놓은 대화를 백매가 시작했다.
청난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백매의 낯빛만큼이나 냉랭했다.
“알지.”
“그런데 어째서…….”
백매의 눈썹꼬리가 축 처졌다. 청난이 말을 끊은 그 잠깐 동안 백매는 애타기만 했다.
백매가 생각하는 청난은 위대한 존재였다. 그가 어떤 육체를 가지고 있든, 어떤 술법을 쓸 수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 청난이라는 그 이유로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청난이 현재의 육체에 갇혀 생사를 오간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때마다 백매는 곧 뜰 해가 무서웠다. 해가 떴음에도 그가 움직이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시금 차갑게 식은 그를 안아야 할까 봐 두려웠다.
이성은 그의 행동을 존중하라 하지만, 감정은 그를 양손으로 붙들어 떠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제가 잡아 올게요. 그동안 사존께선 후일을 도모해 주세요.”
“네가 위험한 일을 할 동안, 나는 안전한 곳에 앉아 주판을 두드리면 된다는 말이냐?”
“아, 그… 그게…….”
백매의 계략 아닌 계략이 단숨에 파헤쳐지자, 백매의 두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기분 상하신 거… 알아요. 제자가 주제넘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걱정된다는 것이지.”
백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는 자신이 고친 줄 알겠지만, 이럴 때면 어릴 때 습관이 온전히 드러났다.
큰 덩치에 비해 그의 낯은 초라하였다. 청난은 저 표정에 담긴 것이 ‘걱정’이라는 말로 일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넌짓 알았다.
유독 바람이 찬 날 애달프게 자신을 보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두려움.’
그렇게 만든 것은 본인이었다.
하지만 청난은 죄책감 때문에 이 일을 백매에게 미룰 수는 없었다. 두려움을 가진 것이 그뿐은 아니었으니까.
청난 또한 그가 걱정되었다. 그가 산을 가르는 신선이든, 바다를 가르는 신선이든 그따위 것은 청난에겐 하등 상관없었다.
청난이 생애 처음으로 가지게 된 두려움이 바로 백매였다.
생애 처음 가지게 된 감정 또한 백매였다.
어릴 때부터 잡아 왔던 그 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난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데 익숙했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생각해 도출한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너만큼 그자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그러니 답해 보아라. 내가 여기 있는다 하여 안전하겠느냐?”
“…….”
“한연화의 그 집착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너라면 짐작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날이겠죠.”
그날. 한연화를 처음 만난 그날.
오래전 그와 그날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시원한 건 처음 느껴 보았어요. 아니야, 시원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청아함? 그것도 아니야. 저는, 다시 그걸 느끼고 싶어요.’
‘으음… 나는 그때 아무런 술법도 쓰지 않았어.’
‘하지만 저는 느꼈어요. 또 느끼고 싶어요. 저는 가질 수 없는 것이겠죠?’
‘너는 화계 천영근이니까 수계 술법은 익히긴 어렵겠지.’
‘그래도, 그래도 전 가질 거예요. 꼭.’
그러곤 한연화는 자신의 말을 지킬 요량인 것인지 수야각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새로운 술법을 볼 때면 쫄래쫄래 쫓아갔다. 쫓아가는 수사가 누구인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유독 청난에게 붙어 있는 것은 그가 가장 강한 수사였기 때문일 뿐이었다.
“차라리 네 곁이 더 안전하지 않겠느냐? 내 조심하마.”
네게 같은 경험을 겪게 할 수 없잖느냐. 청난은 뒷말을 꺼내지 않고 꾹 삼켜 내었다.
“으음…….”
백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청난을 힐끔 보았다. 백매는 이마 위에 ‘곤란’ 두 글자를 써넣은 것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청난이 말하는 ‘조심’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 궤가 달랐다. 지금까지 그가 조심하지 않겠다 한 적이 있었는가. 늘 조심한다 하고는 언제나 앓아누웠다.
그의 몸이 약한 것은 그의 탓이 아니고, 또한 그 몸으로 그런 일을 했던 적이 없으니 가늠하기 어려운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아팠다. 백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스승을 못 믿느냐?”
“아니, 그런 건 아니옵고… 음, 아니에요. 그렇네요, 차라리 저와 함께 계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좋아.”
“하지만 사존, 그래도 조심해 주세요. 한연화는 필요하다면 사존을 해치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거예요.”
“응.”
청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전적이 있었으니, 그 점은 외면할 수 없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는 찾았느냐?”
“아니요. 감이 안 와요. 있을 만한 곳에는 전부 영수를 보냈는데, 영 수확이 없네요.”
“다른 신선들은?”
“그게… 연락을 해 보긴 했는데…….”
말을 흐리는 것을 보니 누구도 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간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백매도 연락을 무시하던 편인 모양이니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사태가 사태였다.
“그럼 직접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느냐?”
“…….”
백매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굴렸다.
“아이고야, 어릴 땐 잘만 어울리지 않았느냐. 어찌 다시 아이가 되었어?”
“그때야… 사존께서 그런 제자를 원하시니까…….”
청난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맞지 않는 가면을 썼던 것이겠지. 그는 대업부터 사소한 것까지 노력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청난이 아이를 달래듯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말하였다.
“싫어하지만, 할 수는 있지?”
백매는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뒤늦게 소리 내어 대답했다.
“네.”
“그럼 조금만 힘내 주겠니.”
“하지만, 그럼 혼자 계시게 되잖아요.”
청난은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백매는 어쩐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불안함이 느껴졌다.
청난이 척! 손을 뻗어 창밖을 가리켰다.
“난 계속 너와 있을 건데?”
네모난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대하고 거대한 해류진군 신상이었다. 백매는 민망함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청난은 그런 반응에 상관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지켜 줄 텐데 무어가 걱정이더냐. 네가 세운 결계니 뭐가 침입해도 바로 알 수 있지?”
“맞아요…….”
“그럼 어서 다녀오너라. 어서 이 일을 끝내고, 우리 사제의 연을 돈독히 해 보자꾸나.”
“으음… 네, 그럴게요.”
백매는 결정이 끝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청난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럼 푹 쉬고 계세요.”
“지금까지 푹 쉬었으니 걱정 말아라.”
“……아픈 건 쉰 게 아니에요, 사존. 부디 몸조심하세요.”
백매는 끝내 안심할 수 없었다.
백매는 십 년 전 그날처럼 빛과 함께 흩어졌다. 청난은 작은 물방울이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와아… 진짜 신선 같네요.”
“진짜 신선이지.”
어느새 문턱에 서 있던 진영은 벌어진 입으로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진영은 백매가 떠난 빈자리 위에 홀라당 앉더니, 따끈따끈한 다구를 들어 보이며 청난에게 허락을 구했다. 청난이 가볍게 끄덕이자 한쪽에 놓인 빈 잔에 자신의 몫을 쪼르르 따랐다. 그 순간 진영의 눈빛이 살짝 죽은 것을 청난은 보았다. 막상 따르니 짙은 약 냄새가 올라온 탓이리라.
진영은 따랐던 찻잔에 입을 대지 않고는 딴청을 피워 대었다.
“삽… 아니지, 아니야. 사존은 놀랍지 않으세요?”
“뭐가 말이죠, 공자?”
“……아!”
청난의 존댓말에 진영은 잠시 영문을 몰라 하는 듯싶더니 금세 깨닫고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사제 관계를 맺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 관계에 익숙해져 버렸다.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진영은 내심 안심하는 동시에 의아함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표정을 읽은 청난이 작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께서 아래에 계세요.”
“아, 청운 아저씨는 나가셨어요. 식자재가 부족하다고 하셨거든요.”
진영은 서점 문 앞에서 막 나가려던 청운을 만났었다. 그는 손가락을 접으며 인분을 세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안에서 청난은 대충 일곱 명 정도로 분열한 듯싶었다. 그는 진영에게 청난이 있음을 알려 주고는 기분 좋게 걸어 나갔다.
“그렇니? 고맙다.”
“와, 사존, 정말 태세 변환이 빠르시네요.”
“그럼 ‘진 공자’가 좋아?”
“아니요오-.”
“사제가 한뜻이니 좋구나.”
청난이 허허 웃으며 쪼르르 차를 마셨다. 마치 오십 년은 산 애늙은이 같은 말투이건만, 그의 외모는 소녀 여럿이 선망할 아름다움이 있었으니 그 모습은 기묘하다면 기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