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역시 이 일이 끝나면 진영과 백매를 데리고 산에 들어가든가 하자. 잘 찾으면 영맥 좋은 장소는 더 있겠지. 그곳에 사당을 지을까. 진짜 해류진군이 사는 해류진군 사당이 되겠지. 재밌을 거야. 진영은 사람을 좋아하니 금방 하산하겠지. 그럼 우리 둘만 남으려나.’
청난은 백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은 넓었다. 산과 강을 짊어지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다.
“안 되겠네…….”
“네? 사존, 뭐라고 하셨나요?”
“아니다.”
“으음, 네. 여기서부턴 걸어가셔야겠어요.”
창밖을 보니 어느새 서점 골목 앞이었다. 서점 앞 골목은 그리 넓지 못해서 마차는 들어갈 수 없었다.
청난이 고개를 숙여 나왔다. 마부석에 있던 백매는 또 어느새 먼저 내려와 있었다. 청난은 마차 벽을 짚었다. 한 발짝씩 천천히 내딛으려고 했는데, 백매의 양손이 허리에 닿았다. 그는 청난을 올렸을 때처럼 그를 번쩍 들어 땅으로 내려 주었다.
백매가 청난을 보며 싱긋 웃었다. 청난이 그에게 안기는 것이 익숙해졌듯이, 그 또한 스승을 안아 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서점의 문은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꽤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했다. 청난이 천천히 문을 당겨 열었다. 이제는 끼이익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세-.”
“아버지.”
들어선 청난과 눈이 마주친 청운은 들고 있던 걸레를 툭 떨어트렸다.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그의 시선이 공중에서 헤매었다.
“난이냐……?”
“다녀왔습니다.”
청운은 터덜터덜 다가오더니, 청난의 양 볼을 잡았다. 그러더니 청난의 고개를 좌로, 또 우로 돌리며 꼼꼼히 살폈다.
“진짜 난이냐……?”
“제가 알기론 가짜 난이는 존재하지 않아요.”
“네가 서신만 보내고 도통 돌아오지 않아서 종이가 돼 버린 줄 알았단다. 이제 보니 얼굴도 반쪽이 되었구나.”
절대 아니었다. 백매가 온갖 건강한 것들을 모조리 챙겨 주었으니. 살이 더 쪘으면 모를까 더 빠졌을 리는 없었다.
청운이 청난의 손을 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솟아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 춥지? 배고프지? 아비가 금방 먹을 것을 준비해 주마. 화 선사도 들어오세요.”
“응, 그럴게요.”
청난은 청운이 이끄는 대로 샛문을 건넜다.
그러다 지난번에 백매와 이곳을 지났을 땐 백매의 옷이 찢어졌던 게 생각났다. 청난은 그를 도와야 할까 싶었지만 청운이 재잘거리며 말을 건네었기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청난의 방까지는 금방이었다. 청난과 청운이 들어가고 바로 백매가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팔도, 옷도 무사했다.
“아 참, 맞다. 이 씨가 귀한 약차를 주었단다. 가져오마.”
청운은 앉자마자 바로 일어나 나갔다. 나가는 중에 문에 발끝을 부딪쳤지만 그럼에도 좋은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반년간 서신을 꾸준히 보냈지만, 그래도 역시 실물이 좋으신 모양이었다.
“종종 올 걸 그랬네요.”
“네가 생각해도 그러냐? 정말 기쁘신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응?”
“저는 사존이 기뻐하시니 올린 말이에요.”
“나 말이냐?”
청난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백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속 그리워하셨잖아요. 그런 일이 있어도 이 사람들은 아직 사존의 사람들인 거죠?”
“…….”
방금까지 이곳을 떠나 홀로 살 것을 생각했던 청난은 대답하지 못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기에.
확실히 계속 생각나긴 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서만 스무 해를 보내지 않았는가?
어릴 때는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달리, 이번 생은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탓에 수야각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청난은 제 볼을 긁적이며 어물쩍 넘겼다.
“그나저나 많이 바뀌었더구나.”
“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가끔 들여다볼 걸 그랬어요. 사존께 이야기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백매의 눈썹꼬리가 축 쳐지며 시무룩한 낯을 하였다.
‘세 살이네, 세 살.’
청난은 또다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풀 죽은 백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두 시야는 허공에서 만나 서로를 탐색했다. 백매의 눈동자엔 청난이 있었고, 청난의 눈동자엔 백매가 있었다. 청난은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매아…….”
드르륵.
청난이 입을 여는 순간에 현관문과 달리 여태 낡아 있는 문이 드르륵 열렸다. 청난은 과거로 회귀하듯 벌렸던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청운의 양손에는 다구와 세 개의 찻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청난의 얼굴을 바라보던 청운의 눈동자가 그의 손을 타고 가 백매의 머리 위에 닿았다. 청난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슬금슬금 손을 내려 자신 앞으로 거두었다.
청운은 세 개의 잔에 차를 따르곤 청난, 백매, 그리고 자신의 앞에 각각 두었다.
“막 도착한 게냐?”
“네, 바로 여기로 왔어요.”
“그럼 피곤하겠구나.”
“괜찮아요. 마차에서 잤거든요.”
“둘이?”
“저는 말을 몰았습니다.”
백매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굳게 닫았다. 청운은 만족한 듯 고개를 짧게 끄덕거렸다.
“그런데 아버지, 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진 대인이 사람들을 규합해서 여러 사업을 하고 계시다. 덕분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걸 마을 안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지.”
“잘됐네요. 그것 말고는 뭐가 없었나요?”
청운은 자신의 아들을 힐끔 보더니 찻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놓았지.
“몇몇 주민들과 싸웠단다.”
“네… 네?”
싸워? 누가? 주민들은 그렇다 쳐도, 아버지가? 청운이?
청난은 혼란스러웠다. 청운이 누구냐. 너무 사람 좋은 탓에 사기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자 아닌가. 청난이 어릴 땐 청운이 물건 떼러 나간다 하면 속으로 조상을 외곤 하였다. 하늘 위의 신선이 되셨으니 그 덕으로 후손의 아버지가 사기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따위의 쓸데없는 바람을 담아서 말이다.
청난이 어리둥절해하자 청운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건은 청난이 나간 지 석 달이 지난 때에 일어났다. 그때엔 이미 자급자족의 기틀이 다 갈고닦아진 후라, 마을 주민 모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햇볕이 따사로운 날이면 한곳에 모여 짧은 수다를 떨곤 하였는데, 그날은 그 장소가 해류진군 석상 앞이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발언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 이상한 애가 나가니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그리고 단숨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발언을 한 자도 그런 반응은 예상치 못해 눈치만 살폈다. 청난에 관해서는 자주는 아니라도 종종 얘기가 나오곤 하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나빴다. 마을을 비호하고 있는 이 해류진군 상을 만든 수사는 청난과 함께 떠나지 않았는가. 애초에 청난의 인연이었다. 그러니 그의 도움은 청난의 도움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말은 회의감을 가졌던 주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처음에는 단순한 말싸움이었다. 그런데 하필 청운이 그 주변을 지나갔고, 자초지종을 듣고야 말았다.
“누군가 그러더구나. ‘난이는 나쁜 애가 아니다’라고. 그러더니 한 명, 또 한 명 그 말에 동조하더구나. 마지막엔 너를 마을을 구한 영웅이라며 추앙하였지.”
청운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눈썹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습지 않니? 정작 너는 그곳에 없었지 않으냐. 화가 나더구나. 그래서 싸웠지. 별거 아니야.”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청난은 청운이 싸우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말로 싸운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청운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 손목이 나갔지. 일주일 동안 왼손으로 밥을 먹느라 힘들었지 뭐니.”
……몸싸움을 하셨구나…….
“아버지이……! 돌봐 드릴 사람도 없는데 그러시다가 큰일 나시면 어떡하려고 그러셨어요?”
“하하, 우리 난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음, 하지만 갑자기 화난 걸 어떡하니? 그래도 곧 진 대인네 사병이 와서 말렸단다. 그래서 손목 하나로 끝난 거지. 수지맞는 일 아니더냐?”
“에휴…….”
청난이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운은 고개를 옮기며 딴청을 피웠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만족하셨나요?”
그 간단한 질문에 청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라리 너랑 술 마시는 게 나았을 것 같구나.”
“아버지 술 못 드시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취하고 잊으려는 거지.”
청운이 허허 웃었다.
“일은 다 끝났니?”
“아직이요. 진 공자를 데려다주러 잠시 들른 거예요.”
“진 공자가 수련하러 갔다더니 너희와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럼 바로 갈 테냐?”
“네. 할 일이 남았으니까요.”
한연화. 그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를 막아야 했다.
청난은 연화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 누구의 형체도 남지 않은 그곳.
청난은 그곳에서 몇 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수북하게 쌓여 있는 모래 중 어느 것이, 아니 어디가 그 아이들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존재하게 둘 수 없었다.
청난의 표정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왔다. 청운은 그 모습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겠지. 아비는 나가마. 화 선사, 아들을 부탁합니다.”
“예.”
백매는 청난이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빠르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