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청난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백매가 잘 돌볼 터. 청난은 손바닥을 살짝 흔들며 인사를 하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갑자기 자신에게로 뛰어오르는 게 아닌가?
“선생님!”
“아……!”
제게 달려드는 걸 알았을 때도 버티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갑작스러운 포옹을 버틸 턱이 있나. 청난은 아이의 힘에 그만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뻔’으로 끝났다.
청난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길을 느꼈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지만, 청난은 고개를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백매는 분명 말 앞에 서 있었는데, 언제 제 옆에 와 있던 것일까. 신기하게도 그의 손길은 애당초 자신에게 붙어서 태어난 것처럼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청난의 제자 감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목을 당겼기 때문이었다.
“아, 아가?”
“헤헤헤. 선생님,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 아, 자, 잠깐……!”
아이의 손길에 따라 청난의 상체가 오뚝이처럼 볼썽사납게 휘청거렸다. 청난이 앞으로 넘어지려 하자, 이번엔 백매의 손이 그의 가슴 앞을 막아 주었다. 청난이 빨랫줄에 널린 빨래처럼 그의 팔에 매달린 품새가 되자, 아이는 그제야 두 발을 땅에 대었다. 그럼에도 여태 청난의 옷을 놓아 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청난은 아이의 어머니가 올 때까지 소매를 잡혀 있어야 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숨을 헐떡이다가 아이의 손과 잡혀 있는 청난의 소매를 보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아이의 주먹을 펴며 청난에게 자유를 주었다.
“선생님이 불편해하시잖아. 응?”
선생님.
그 단어에 청난은 내심 놀랐다. 청난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찾아와 더는 수업받지 않겠다 의사를 전했었기 때문이었다. 집 안을 정리해야 한다며 좋게 헤어졌지만, 청난은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서웠겠지. 누가 짐승 가죽을 자르고 피로 목욕하는 사람을 자식 가까이에 두고 싶겠어? 비록 그 피로 구명하였더라도 말이다.
청난은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이라도 지을까 서둘러 마차 안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백매가 속상해할 것이 분명하였으니.
하지만 청난은 이번에도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에 그의 소매를 잡은 건 아이의 어머니였다.
“처, 청 선생님……? 돌아오셨네요……!”
“아, 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부인.”
예상치 못하게도 그녀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청난은 재빨리 표정에 드러난 당황스러움을 갈무리하였다. 그러고는 그녀가 보낸 미소에 화답하듯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청난이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이후 처음 보는 미소였다.
그 때문일까.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던 주민들이 너도나도 나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청 공자, 왜 이리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 지냈어요?”
“청 선생, 이젠 계속 있는 건가?”
“난아! 나중에 우리 집에 들러. 줄 게 있어.”
청난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리둥절함은 떠나지 않았다. 왜 갑자기 이토록 반기는가. 마치 요마가 습격했던 그때가 꿈이었나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코 꿈이 아니지.
“잠시 들렀습니다. 금방 다시 떠날 예정입니다.”
“에휴, 정말? 밖은 위험한데…….”
“청 선생이면 잘하겠지.”
청난의 말에 주민들은 아쉬움을 토했다. 청난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들어가 그간 마을에 박혀 있었을 청운에게 경위를 묻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때 진영이 도통 돌아오지 않는 청난을 따라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민들의 시선은 진영에게로 돌아갔다.
“어머, 진 공자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그새 더 보기 좋아지셨네요!”
“이게 다 두 분 덕분이죠. 오늘 돼지를 잡을까 하는데, 오시겠어요?”
“하하, 괜찮아요.”
진영은 아예 마차에서 내려 주민들과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청난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으나 진영이 마차 앞에 서 있는 탓에 청난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진영과 주민들의 대화는 일상적이라 딱히 정보가 될 것도 없었다.
청난은 심심함에 눈동자를 굴렸다. 시야가 가장 먼저 비춘 것은 백매였다. 마침 그도 자신을 본 것인지 두 시선은 허공에서 만났다. 무뚝뚝하게 입꼬리를 끌어 내렸던 백매는 청난과 마주치자마자 입꼬리를 크게 올려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귀여워. 누가 쟤를 삼백 살이나 먹었다고 생각하겠어? 세 살이지.’
스승의 이런 과한 생각을 백매는 전혀 짐작도 못 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진영의 대화는 이어졌다.
“오, 소공자 오셨나요? 갑자기 수행을 떠나셨다길래 걱정했습니다.”
“헤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지나가던 중년 남성이 대화에 합세했다. 들어 보니 진 대인은 진영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쳤던 모양이었다.
‘그럼 서둘러 들어가야 하지 않나. 대인께서 걱정하실 텐데.’
지나가던 이들도 한 번씩 걸음을 멈추며 길게 또는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비밀스러운 공자님에 대한 선망은 누구나 있을 법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다소 과해 보였다.
‘마을을 구한 것에 진영 또한 큰 일조를 하였으니 그 영향이 큰 걸까.’
청난은 평범한 사람들의 시야에 공감할 수 없던 터라 백매의 머리카락을 땋으며 저 대화가 끝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혹은 진영이 마차 앞을 가로막은 발을 물려 주거나.
청난은 겸사겸사 귀를 열어 대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아랑 마을을 떠날 땐 막 재난을 겪은 후라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때문에 청난은 여태 어두운 분위기가 맴돌 것이라 생각했었다. 튼튼하게 이곳을 지켜 주고 있는 결계 덕일까, 마을은 대봉인이 깨지기 전인 십 년 전의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다.
필히 진 대인이 크게 힘썼겠지. 그의 인간성과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뭣보다 그는 돈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보기 마련이지.’
사태가 끝나면 외부 마을과의 교류가 다시 시작될 테니, 그때를 도모하려면 우선 아랑 마을의 경기가 지나치게 침체되지 않도록 방비했어야 했겠지. 그래서 적절한 노동을 맡기며 삯을 충분히 쳐 준 모양이었다. 폐쇄된 마을임에도 충분히 돈이 돌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듯하니.
‘진짜 형을 닮았네…….’
청난의 형 진주국은 인적, 물적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감이 특히 뛰어났다. 그 덕에 수야각은 능력에 비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느라 다치는 제자는 한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렇게 지킨 제자들은 수야각의 위상을 드높여 갔지.
만약 그가 상업을 했다면 분명 손에 꼽히는 부호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예도 손꼽힐 만큼 뛰어났고, 본인의 선택 또한 그러하였기에 수사로서의 삶을 살았었다.
‘음… 곱슬이라 자꾸 삐져나오네.’
청난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어떻게 땋아야 예쁘게 땋았다 소문날지 고민하였다. 어차피 소문날 리도 없고, 금방 풀 것이 분명했지만, 어쨌든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청난이 시선을 돌리니 한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흠칫 놀라더니, 언제 보았냐는 듯 딴청을 피워 대었다. 청난이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거 아무래도…….’
청난의 차갑게 식은 눈이 진영을 스쳐 지나가 백매를 보았다.
“사존?”
청난은 그에게 양손을 뻗었다. 과연, 그의 애제자는 스승이 원하는 바를 바로 잡아내었다.
백매는 청난의 가슴 옆을 잡아서는 번쩍 들어 마차 위에 걸터앉도록 해 주었다.
“진 공자,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천천히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청난은 홀연히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 맞춰 백매가 마부석에 앉아 가볍게 말 엉덩이를 때리니, 말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영은 마차로 오르는 계단에 가볍게 발을 걸치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백매는 그것마저 계산한 것일까. 말의 걷는 속도로는 그럴 뻔하기만 할 뿐, 결코 넘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청난은 진영을 두고 마차 안을 독차지했다. 저잣거리가 형성된 대로변을 지나자 백매는 그제야 말을 건네 왔다.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조금 그렇구나.”
“그렇군요.”
백매는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이 마차를 몰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청난은 창을 열어 천천히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주민들이 몰려든 건 진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영 이전에 청난이 먼저 고개를 내밀었었으니.
‘찔렸겠지.’
위험이 사라진 후에야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무사할 수 있던 것이 누구의 덕분인 것인지. 그리고 누리게 된 안전은 죄책감을 불러왔을 테고.
하지만 사과할 용기는 없는 것이다.
사과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 하지만 그 ‘사소’함은 가해자 입장이지. 피해자는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은 별거 아니라 치부한다. 피해자가 받는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서 도피하고 만다.
그래서 이른 결론이 ‘은근슬쩍 넘어가기’일 것이다.
청난은 전생에 그런 작자들을 여럿 겪었다. 그때의 청난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휘말려 줄 수밖에 없었다. 진청난이란 이름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진가의 둘째 공자. 수야각의 소각주. 더 나아가서는 수야각주. 누군가의 스승이었다.
지금도 어물쩍 넘어가 그들에게 인사 한번 한다면 전과 같은 관계가 될 터이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할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