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진영은 쓸데없이 화려한 천장의 무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부님.”
“‘사존’.”
“네?”
진영의 고개가 청난에게로 돌아갔다. 청난은 진영을 마주 보며 살풋 웃었다.
“너도 이제 수선계 사람이니, 그에 맞게 불러야 하지 않겠느냐.”
“아.”
진영은 백매가 그를 그렇게 불렀음을 떠올렸다. 청난과 백매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것이 보편적인 호칭인 모양이었다.
진영이 알쏭달쏭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청난이 푸흣 웃었다.
“뭐가 그리 궁금하느냐?”
“아, 별건 아니고. 왜 그렇게 부르는지 궁금해서요.”
“아아… 그건 수선계의 특수성과 관련이 있단다. 지금은 딱히 이유가 있다기보단 전통적인 호칭에 가까워졌지만 말이야.”
청난이 말을 이었다.
“비승을 하면, 그러니까 신선이 되면 속세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단다. 하지만 감정이란 게 그리 쉬이 정리되는 게 아니지. 그래서 많은 신선들이 인간의 얼굴을 쓰고 사문에 내려오곤 하였다. 개중에는 자존심이 강해서 낮춰 불려지는 게 못마땅한 이들이 있었다. 사실, 많았지. 신선이 되는 이들이 지낸 환경은 비슷했거든.”
“어떤 환경인데요?”
“훌륭한 집안에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태어났을 때부터 비승할 때까지 떠받들어지던 환경이지.”
“잘 아시네요.”
“당연하지. 내가 그랬는걸.”
“…….”
진영이 자신의 말실수를 후회하는 동안 청난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사부’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단다. 그리 부르면 기껏해야 그들보다 한 세대 위라는 말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결론이 ‘사존’으로 불리는 것이란다. 그러면 적어도 세 세대 위니까 말이야. 하지만 신선들만 그리 불린다면 정체를 숨길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모두 사부 대신 사존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
진영은 말을 잇지 못 했고, 청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우습지?”
“예……. 정말 많이요…….”
진영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낮춰 불리기 싫어서 단체로 올려 부르기로 했다고? 조삼모사가 아닌가? 청난도 같은 생각인지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특이한 사람 참 많지.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야. 선조가 언제든 제 속에 섞일 수 있도록 배려한 결과이기도 하지. 그 덕분에 선술은 실전되는 경우가 적어. 선조가 와서 알려 주면 되니까.”
“오, 그건 좋네요.”
진영이 양 주먹을 맞부딪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과장된 몸짓에 청난은 파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으럼… 사존이라 부르겠습니다.”
“옳지. 그리고 하나 더.”
청난은 마차에 난 창문을 살짝 열어 밖을 보았다.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통 속도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풍경 또한 운치 있었다. 청난은 풍경에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백매의 등이 보였다.
“매아를 사형이라 불러 주겠니.”
“어… 그건…….”
청난의 시야가 다시금 진영을 비추었다. 진영이 머쓱하게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네 사형이잖니. 나이 차이가 좀 나지만.”
청난의 말에 진영은 ‘좀’의 수준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도 선군을 그리 부르는 건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요. 목포점 아저씨가 아시면 제 목을 따러 오실 걸요. 제가 어떻게 감히…….”
“앞으로 내게 ‘어떻게’와 ‘감히’는 빼고 말하겠니.”
“…….”
청난은 진영의 말을 잘라 내고는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은 퍽 익숙해 보였다. 백매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사존이 평소 자주 하던 말이 맞는 듯했다.
진영이 본 것을 청난이 보지 못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청난은 말을 이었다.
“누가 보면 남 일인 줄 알겠어. 너도 조심하거라.”
“윽……. 네, 사존.”
백매는 잠시 고개를 돌려 청난에게 목경례를 하였다. 그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하는 동시에 고삐가 크게 내려쳐지며 말은 더욱 힘차게 뜀박질하였다.
진영이 다시 청난을 바라보며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부르던 대로 부르면 안 되나요?”
“안 된다.”
“그건 실례되는 행동이기 때문인가요?”
“아니. 하지만 정이 없어 보이지 않느냐.”
청난의 눈꼬리가 내려앉으며 둥글게 미소 지었다. 진영은 하마터면 ‘그렇네요’라며 긍정할 뻔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미인이란 말이 있던가. 진영은 자신의 사존이 날아가는 새는 몰라도, 경공하는 고수는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와 보라고 하면 홀라당 내려가고 싶어지겠지.’
그의 외모는 그 자체로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영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청난은 어조에 담겨 있던 웃음기를 뺀, 보다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수선계는 변화무쌍하단다. 어제 대화를 한 이가 오늘 하늘의 부름을 받아 신이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과연 신만 되겠느냐. 누군가는 주화입마로, 또는 성심이 타락하여 귀가 되고 괴가 되기도 한단다.”
“사람이 괴가 되기도 해요? 귀신이 되는 건 들어 봤는데…….”
“맞아. 죽은 자가 변모하면 귀신이 되는 거고, 산 자가 변모하면 괴가 되는 거란다. 보통 사람은 잘 모르지. 평범한 사람들이 괴가 되는 일은 잘 없거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자주 들어 보았지?”
“네. 어머니께서 입에 달고 사시는걸요.”
“하하, 그렇구나. 응. 수선계도 그러해. 세계의 양면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람에, 변모하는 일이 생기고 말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누군가의 사형제지 않겠니. 형제가 어찌 변하든 우리의 관계는 굳건할 거라는 그런 다짐 같은 거지, 호칭은.”
“으음… 이해했어요.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좋아. 착하구나.”
청난이 진영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까마득히 어린아이를 달래 주듯이.
그들의 외모는 동년배였기에 그 모습은 다소 기이하게 느껴질 만했다. 하지만 청난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진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상관없지.’
진영은 오히려 그 손에 머리를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들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수선계의 기본 상식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청난의 지식은 삼백 년 전에서 멈춘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정세가 바뀐 것은 백매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백매는 잘 필요가 없었으며 마차에는 어떤 술법이 걸린 것인지 빠르고, 또한 흔들림도 없어 편안했다.
그들은 출발한 지 사흘째 된 날에 아랑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청난은 이 화려한 마차가 쓸데없이 눈에 띌 것을 염려하였다. 하지만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 다급한 발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청난은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거리에 활기가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마차를 신기하게 보았지만, 호기심도 잠깐일 뿐 곧 자신의 일에 집중하였다.
“활기가 넘치는구나.”
“그렇죠? 다들 회복이 빠르더라고요. 다 사존과 사형 덕분이에요.”
“다행이야.”
청난은 창을 살짝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다 한 노점상과 눈이 마주쳤다. 청난은 금세 시선을 거두고 창문을 도로 닫았다.
진영은 청난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났나요?”
“음, 아니야. 마을을 나서기 전에 몇 사람과 오해를 빚었었단다. 그랬더니 사람들을 마주하기 조금 껄끄럽구나.”
“아, 그거에 관해서 드릴 말이…….”
히이이이이이잉!
갑자기 들려온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기울어졌다. 그 탓에 청난은 마차 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으윽…….”
“으으으…….”
당연하게도 굴러간 청난의 옆에는 함께 구른 진영이 자신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파라… 청, 아니 사존,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청난은 빠르게 진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서야 청난의 시야는 사고의 원인일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냐?”
“사존, 별거 아닌…….”
백매는 청난이 나오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존은 정말로 행동력이 좋았으니, 백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난의 고운 이목구비가 마차 밖으로 빼꼼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청난은 바로 후회했다. 그가 고개를 내밀자 마차를 보고 있던 수많은 시선들이 곧바로 자신에게로 옮겨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청난이 아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들 중 대다수는 뒤에서 청난을 손가락질하던 이들이었다.
청난은 굳이 그들을 알은체하지 않았다. 자신이 구르게 된 원인을 찾으려 이리저리 살피던 청난의 눈동자가 한곳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어린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넘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마차와 부딪칠 뻔했나 보네.’
다행히 백매가 닿기 전에 급히 멈춘 모양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어찌나 갑자기 튀어나오는지 전생의 청난도 깜짝 놀라기 일쑤였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신선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청난은 여태 놀람이 가라앉지 않은 백매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아이 어머니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둔 것치고는 젊은 모습이었지만, 청난은 그녀가 이 아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