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괜찮아. 이 정도는 흔하단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진영의 반응은 과히 솔직했다. 청난은 또다시 하하 웃었다. 은근슬쩍 밖으로 나가려 할지도 모르니, 진영은 손을 들어 언제든 그를 잡을 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그의 엉덩이는 제자리를 지켰다.
“하하, 그러냐? 뭐, 괜찮다. 이 정도론 안 죽어. 내가 잘 알지.”
“사조온…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백매의 눈썹이 휘며 울상을 지었다. 당장에라도 저 어여쁜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나와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진영은 어젯밤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얼굴은 같은데 표정은 전혀 달랐다. 좋게 말하면 스승에 대한 마음이 갸륵한 것이었고,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내숭 장난 아니시네…….’
그걸 스승, 청난만 몰랐다.
어느새 백매를 쓰다듬고 있던 청난이 입을 열었다.
“누워만 있으려니 적적하구나. 대화라도 하고 싶어. 그러니 영이의 의문을 풀어 주면 서로 좋지 않겠어?”
“음… 좋아요. 하지만 무리하지 마세요.”
“좋아, 좋아. 여기서 안 내려가마.”
청난이 보란 듯이 이불을 굳게 잡았다.
그렇게 거래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청난은 진영을 바라보았다. 진영과 그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청난의 눈이 가늘어지며 둥글게 휘었다.
평상시의 청난은 온화한 상이었다. 잘 웃었고, 목소리도 나긋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랑 마을에선 딸을 둔 많은 이들이 그를 노리곤 하였다.
‘우리 어머니도 노리셨지.’
어느 날 불러 친척 누이의 이상형을 물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쨌든, 청난은 많은 이들의 호감을 얻었고, 그럴 만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진영은 그의 미소에 익숙했다 그런데 어쩐지 지금 그가 보여 주는 온화함은 평소의 것과 달라 보였다. 그에 진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할아버지……?”
“응?”
“헙! 죄송해요. 시, 실수였어요!”
“하하, 괜찮아. 뭐, 비슷하지. 자, 어디서부터 설명해 줄까?”
진영은 입을 막았던 양손을 내리고는 양반다리하며 편하게 앉았다. 두 손으로 발목을 잡고는 몸을 앞으로, 뒤로 흔들었는데 마치 어린아이들의 장난감 같아 귀여웠다.
“음… 정말 제 선조님이세요?”
“그렇지. 네가 내 형인 진주국의 후손이 맞다면 말이야.”
“음… 그건 맞아요. 아버지가 매일같이 자랑스러워하셨거든요. 그래도 역시 음…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죠?”
“차근차근 알려 주마.”
청난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갔다. 어쩔 땐 유쾌하게, 또 어쩔 땐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책을 읽어 주는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 중 대부분은 다시 태어난 이후의 경험들이었다. 전생의 일은 단지 ‘하늘에 오르기 직전에 죽었다’로 간략하게 끝마쳤다. 그때 진영이 힐끗 본 백매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 그를 위한 배려이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까지다. 궁금한 게 있느냐?”
청난은 수업을 마친 선생님처럼 물었다. 진영은 성실한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고는 질문하였다.
“정말로 선술을 가르쳐 주시나요?”
“물론이야.”
“그럼 수야각으로 가는 건가요?”
“어… 음…….”
청난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턱을 매만지며 고심을 하는가 싶더니 백매를 바라보았다.
“수야각에 사람이 남아 있느냐?”
“몇 명이 맥을 이어 오고는 있지만, 그리 좋은 상태는 못 돼요. 하지만 사존께서 돌아가신다면 분명 형편이 나아질 거예요. 그 땅은 여전히 영맥이 좋으니 사제의 수련에도 좋을 거예요.”
“좋아, 일이 끝나면 방문해 보자꾸나. 그럼, 영아. 이번엔 내가 물으마.”
“네, 물어보세요.”
“정말 수선하고 싶으냐?”
“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진영은 잠시 넋을 잃었다. 청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니 신중해야 해. 수선이라 함은 속세를 떠나는 것을 이른다. 네가 이리도 장성하였으니, 속세의 연이 많지 않으냐.”
“음…….”
진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뻐끔거렸다. 청난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고,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동안 백매는 어느새 따뜻한 차를 끓여 청난의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청난이 한 모금 마시고, 국화차의 깊은 맛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눌 무렵이 되자, 진영이 고개를 들었다. 생각을 끝낸 모양이었다.
그는 청난과 마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말고, 말로 대답하거라.”
“아, 네! 수선할래요!”
지적한 것은 백매였다. 그것은 백매가 제자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에, 청난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청난이 피식 웃었다. 진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진가는 대대로 수선을 하는 집안이었고, 진가에서 배출된 수사들은 매우 뛰어나 많은 이들의 삶을 구하셨다고. 다른 아이들이 영웅담을 들으며 자랄 때, 저는 그분들의 활약을 들으면서 컸어요. 그러니까 제게는 그분들이 영웅이고 우상인 거죠.”
“쑥스럽네.”
“하하, 맞아요. 사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어요. 사부의 모험담을 가장 좋아하셨거든요. 음, 그래서 저는 수사분들을 동경했어요. 어릴 땐 수사가 될 거라면서 뒷산에 오르다 혼나기까지 했었죠.”
진영은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코를 매만졌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없었어요. 몸이 약했으니까요.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죠. 그래도 저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래서 선술을 조금 아시는 아버지 친구분 아래에서 몇 년 지냈었죠.”
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청난만큼이나 남 이야기하듯 하는 모습에 백매는 그들이 서로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전 그냥 몸 약한 도련님에 불과해요.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제 자리를 가지고 싶어요! 무언가 이룰 힘을 갖고 싶어요!”
진영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청난을 직시하였다. 참 강아지 같았다. 청난은 익숙한 머리를 만지듯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냐. 좋구나. 우선은 이 스승과 네 대사형은 맡은 임무가 있어 그것을 마무리해야 한단다. 본격적인 수선은 그 후로 미뤄야 해. 임무를 끝내면 함께 수야각에 가 보자꾸나. 내 기억과 같다면 그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야.”
“좋아요, 좋아요! 풍경이 어떠하든 상관없어요. 선술을 배우기만 하면 돼요!”
“마냥 상관없는 것도 아니야. 영맥이 좋은 곳과 아닌 곳은 같은 수련을 하여도 성과가 달라. 다행히 수야각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백매가 무미건조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청난은 그 모습을 마냥 지켜보았다. 과거의 그는 사형제에게 살가웠었는데, 이제는 그의 원래 성격은 이쪽이란 걸 알았다. 오히려 제 편한 대로 하는 모습이 더욱 좋았다.
그들은 그 후로 나흘이나 더 숙소에 있어야 했다. 청난의 열이 내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동안 백매와 진영은 청난의 병간호를 하며 손발을 맞추었고, 더욱더 친근해져 마지막 날에는 방을 나서려는 청난의 양팔을 사이좋게 나눠 부축하기까지 하였다.
백매는 청난의 말이면 마지못해 들어주었는데, 진영은 그런 게 없었다. 아프면 아픈 것이고, 환자는 무조건 쉬어야 했다. 백매로부터 청난이 무리하다 쓰러진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에는 더더욱 가차 없어진 탓에 청난은 나흘 내내 침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그리고 그동안 아랑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결정되었다. 한연화를 잡을 때까지 진영은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진영은 한차례 목숨을 위협받았던 터라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마침내 숙소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부…….”
“왜 그러냐.”
“선군께서 마차를 준비한다 하셨죠?”
“그랬지.”
“그게 이건가요?”
“그런가… 보구나…….”
번화한 소도시의 저잣거리. 지나는 사람은 참으로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청난, 진영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백매가 준비한 마차는 값비싸 보일 뿐 아니라 그 크기도 대단하였고, 더구나 그 마차를 끄는 말들은 무려 네 마리였다.
“저 사두마차 처음 봐요.”
“하하, 나도란다.”
청난이 허허 웃으며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백매는 마지막까지 짐을 정리하느라 제일 늦게 나왔는데 어느새 마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는 그 크기만큼이나 오르기 힘들어 보였는데, 청난이 다가오자 백매는 손을 뻗어 그가 가뿐히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진영이 청난의 뒤를 이어 마차 앞으로 갔다. 백매는 청난에게 베푼 것 같은 호의를 보이지 않았고, 진영은 모여드는 시선을 일 초라도 빨리 피하고 싶었기에 거의 기다시피 손을 짚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백매가 뒤에서 그의 등을 움켜잡고는 불쑥 올려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백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마부석으로 가 앉았다.
진영은 청난의 옆에 앉아 고삐를 쥐는 백매를 바라보았다. 신선을 저리 부려 먹어도 되는 걸까. 진영은 걱정되었다.
“사부, 평소에도 선군께서 말을 모세요?”
“아니,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처음이란다.”
“어? 그럼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만 오신 게 아니라 각지를 돌아다니셨잖아요.”
“음…….”
청난은 말할 수 없었다. 제자에게 안겨 다녔다고 새로운 제자에게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음, 비밀이야.”
하지만 제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진영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낯으로 눈썹을 휘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털썩 마차에 기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