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음……. 실감이 안 나서요.”
“어떤 게?”
“모든 게요. 일단 방금 들었던 대화도 구 할은 이해를 못 했어요. 아니,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부, 사부는 대체 누구세요?”
진영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청난이 씩 미소 지었다.
“여기서 들을래? 아니면,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들어가요?”
“사존, 제자가 방을 잡아 놓았습니다.”
“지… 진짜 심부름 다녀오신 거였나요?”
“응.”
백매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곤 청난의 손을 붙잡으며 가볍게 부축해 주었다.
“고맙구나. 영아, 너도 들어가자. 이러다 고뿔이 들 거란다.”
백매와 함께 걸어가는 청난을 진영은 마냥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들이 어둠 속에 묻혀 가자 다급하게 뛰었다.
“같이 가요……!”
백매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여관은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이런 한밤중에 어떻게 이런 곳을 구한 것일까. 아니, 규모가 컸기에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종업원도 많을 테니.
졸린 눈의 종업원은 숙박 명부까지 꼼꼼히 적은 후 지정된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녀는 인사하는 마지막까지 입을 쩍쩍 벌려 하품을 선사해 주었다.
원래 두 명만 머물 예정이었지만 방이 큰 덕분에 갑자기 생긴 일행에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청난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탁자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다구가 놓여 있었다. 청난은 소매 안쪽에 손을 슥 집어넣어 뒤적거리더니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열어 찻주전자에 털어 넣으니 작은 크기로 부서진 찻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우리 집에서도 차를 자주 드시더니, 정말 좋아하시나 보네.’
진영은 새로이 모시게 된 스승을 보필하고자 뜨거운 물을 가지러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백매선이 청난의 찻주전자를 사뿐히 잡아 먼 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들의 관계를 이제야 알게 된 진영이 보기에도 ‘안 된다’는 모양새였다.
“매아…….”
“오늘은 피곤하실 테니, 일찍 주무시는 게 좋아 보여요.”
“영이에게 설명은 해 줘야지 않겠니.”
청난이 손을 쭈욱 뻗었지만, 백매는 다시 한번 찻주전자를 밀어 청난의 손이 닿지 못하게 하였다.
“사제도 피곤할 거예요. 그렇지, 사제?”
“어… 네, 맞아요.”
진영은 재빠르게 백매의 눈짓을 알아듣곤 그가 원하는 대답을 꺼내 주었다. 사부에겐 죄송하지만, 진영은 사부께 감사하는 마음보다 신선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백매가 만족하여 미소 지었다. 백매는 동성이 보아도 넋이 나갈 정도로 미인이었다. 청난은 사제끼리 호감을 주고받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매아가 사제가 생겼다고 이리 챙겨 주는구나. 그래, 이 스승이 졌다.”
진영은 생각했다. 저건 챙겨 주는 게 아니라, 무언의 압박이라고. 하지만 진영은 그것을 입 밖에 꺼낼 만큼 담이 크지 못했다.
아랑 마을에 있을 때엔 말수가 적은 모습이 진중하고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멋졌다. 훌륭한 장인이 만든 아름다운 신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진짜 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손가락에 자신의 목숨 줄이 걸려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하는 한마디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아무 말도 않는다면 알 수 없음에 온몸이 빠르게 식어 갔다. 이대로라면 제 명에 못 살 것 같았다.
‘대신선이 한숨 쉬고 갔지. 한숨 쉬고 갔어.’
진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백매가 정리하고 있는 침상과 가장 먼 침상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저 침상은 분명히 청난의 것일 테니. 애틋한 관계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무섭기도 하고.
잠들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도라도 해 봐야지. 진영이 침상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영아.”
“네!”
“옷은 벗고 자야지. 물에 젖어 감기 걸릴 게다.”
그러면서 침상에 몸을 눕힌 청난은 꽤 만족스러워 보였다. 청난의 다정한 그 말에 진영 또한 기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마치 어릴 적 꾸었던 꿈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전히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고, 여전히 두려움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동경하던 광경에 자신도 포함되었다 생각하니 기대감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네, 걱정 마세요. 사부님, 안녕히 주무세요.”
“사존, 안녕히 주무세요.”
“으응, 너희도…….”
청난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그의 숙면을 알려 주었다.
백매선은 잠든 청난의 머리맡에 앉았다. 비어 있는 침상은 많건만, 그는 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신선은 잠을 자지 않는 걸까.’
진영은 그리 생각하고는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하였다. 백매가 청난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사부님 당사자 빼고는. 청난은 본인과 제자의 일에는 눈치가 없었다.
“절 떠나지 말아 주세요. 아프지 마세요. 제자는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존께서 늘 안전하고 편안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알아요. 이건 사존께서 바라시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참을게요.”
백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청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는 이미 잠들었기에 들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입 밖에 꺼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할 터였다.
아직 잠들지 않은 진영은 그것을 들었으나, 역시 모른 척하였다.
다음 날 진영은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엔 예상외로 금방 잠들었지만, 여전히 그는 목숨을 위협받은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몸이 여전히 그 두려움을 기억한 탓에 진영은 악몽을 꾸고 말았다. 그 탓에 새벽 중에 깬 이후 뜬눈으로 아침 해를 맞이하였다.
‘귀신 세 명에게 쫓기다니…….’
그 ‘귀신 세 명’이 들으면 불경하다며 다시 목을 가지러 올지도 몰랐으니 진영은 이 꿈을 무덤까지 끌고 갈 생각이었다.
진영은 햇빛이 창을 넘어선 후에야 비적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청난의 침상 옆에 있을 백매선과 눈이 마주칠까 일부러 자는 척했던 것이었지만 예상외로 청난의 침상 옆은 아무도 없이 비어 있었다.
“선군……?”
진영이 그를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돌아왔다.
드르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도기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든 백매가 있었다.
“선구…….”
“쉿.”
백매는 여전히 쟁반을 굳게 잡은 채 진영과 눈을 마주쳤다. 진영은 바짝 긴장되어 마치 회심의 일격을 날리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난에게 다가가는 백매의 발소리는 고요하기만 하였다.
‘어젯밤 신선들도 발소리가 없었는데, 모든 신선이 발소리가 없나.’
진영은 그를 알면 알수록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백매는 청난의 침상 옆에 놓인 협탁에 쟁반을 올려 두었다. 다행히 쟁반을 내려놓는 소리는 들렸다. 진영이 제자리에서 목을 길게 빼어 보니 다기 그릇 안에 든 것은 묽은 죽이었다. 백매가 이토록 알뜰히 살필 상대는 당연히 청난뿐이었다.
‘사부가 아픈가……?’
청난이 몸이 약하다는 건 알았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어려워했었으니까. 하지만 마을을 습격한 크고 작은 요마들을 물리친 책략이 주는 인상 탓에 그만 잊고 말았다.
“선군, 사부가…….”
“쉿.”
진영은 이번에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진영은 한참을 눈동자를 굴렸다. 말하지 말라는 거겠지? 하지만 구경꾼처럼 보기만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진영은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작게 조잘거렸다.
“사부님, 아프세요……?”
백매는 그를 잠시 보았다. 입을 열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 주었다.
백매는 쟁반 위에 놓여 있던 천을 집어 들고는 청난의 머리맡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고는 청난의 손을 조심히 이불 밖으로 꺼내 천으로 닦아 주었다. 그의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람이 아닌 얇은 종이를 닦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백매는 그의 오른팔을 다 닦아 내더니 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리었다. 그리고는 그가 누웠던 침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해석해 보자면 다시 돌아가 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
아무리 침상이 좋아도 오래 누우면 허리가 배기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진영은 그의 말에 거역할 수 없었다.
“네…….”
진영이 시무룩하여 몸을 돌리자,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 청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제를 너무 괴롭히지 말거라.”
“사존, 아직 무리하시면 안 돼요.”
“아직 일어나는 것밖에 안 했다. 너무 유난이구나.”
“의원이 다녀가도 같은 말을 할 거예요.”
청난은 하하 웃기만 하더니 백매의 만류에도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백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감을 뿐 제재하지 않았다.
진영이 보기에 그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분명 그들만이 공유하는 추억이 있는 것이겠지. 진영은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영아, 이리 오렴.”
“아, 네.”
청난의 부름에 진영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백매가 막을까 힐끔 바라보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대신 침상에 걸터앉은 청난의 어깨에 이불을 걸쳐 주었다.
청난은 추운지 이불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정말로 아파 보였다. 정말로! 의원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