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선사!”
대신선이 크게 노하였다. 두 신선이 그의 양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청난은 그의 주먹에 의해 벽과 한 몸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노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난의 표정은 구겨진 채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 사이로 시선을 오가던 신선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선사, 이러나저러나 결국 선계의 일이 아닙니까. 저희도 다른 이들을 달랠 명분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선사와 직접적인 연이 있는 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많은 후손이 태어날진대, 이번 한 번만 물러나 주시지요. 이 빚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빚’이라 하였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청난을 존중하고, 좋은 마음으로 달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 좋은 마음이 옳은 행동인 건 아니다. 그것이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면 더더욱.
청난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뒤에 있던 진영이 그의 콧날을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으나, 이제껏 목석처럼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볼일이 저에게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진영은 한껏 긴장하며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영아.”
“네… 네, 네, 네! 네!”
긴장한 탓에 대답 한번 하는 것도 요란스러웠다. 진영은 여전히 그가 자신이 알던 청난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의 유일한 구명줄이라는 점이었다.
“하하, 긴장할 필요 없단다. 그저 한 가지 묻자꾸나.”
“네, 네. 말씀하세요.”
“선술을 배울 생각이 있느냐. 주먹구구식이 아닌 제대로 말이다.”
“선술이라 함은… 수선을 하고 싶냐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내가 가르쳐 주마. 그럼 백매는 네 사형이 되겠구나.”
신선들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졌다. 두 신선은 이 나이만 많은 작자가 언제 또 뛰쳐나갈까 싶어 대신선을 붙든 두 손에 힘을 다잡았다.
“선사,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선사께서 이리 적대하시니 썩 좋지 않습니다. 저희가 이 아이를 해코지한다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청난의 진의는 분명했다. 때로는 혈육보다 중요한 것. 그것이 바로 수선계의 사제 관계였다. 혈육은 속세의 것이지만, 수선계의 제자는 자신이 갈고 닦은 모든 것의 흔적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청난은 끝끝내 그를 비호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다. 자신과 제자의 이름을 내걸고서라도.
청난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 앞의 신선들을 직시하였다.
“선군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이 아이는 제 가까운 핏줄로,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며 제자로 들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증인이 되어 주실 선군들을 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딨겠습니까.”
세 신선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 앞에서 거짓부렁을 늘어놓는다는 것에 화가 난 듯하였다. 가장 말이 없던 신선까지 눈썹이 들썩였다.
사실 그들은 청난이 진영을 후손이라 얘기할 때도 딱히 믿지 않았다. 고작 삼백 년 전이다. 몇 대나 지났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후손을 만났다고? 그럴 확률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는데도 그의 체면을 생각해 넘어가 준 것에 불과했다.
“당신이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군요.”
“하하, 선군께서는 믿지 않으시나 봅니다. 그럼, 영아 네가 직접 소개해 보거라. 네 선조가 누구라고?”
“제… 제 선조…….”
진영은 당황했다. 청난의 속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정말 내 선조가 맞는 걸까. 그렇다면 누굴 말해야 하는 거지?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일까. 찰나 동안 빠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그러다 일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에게 말했던 단 한 명의 선조.
“저, 저는 수야각의 제자였던 진주국의 후손… 진영이라 합니다.”
“잘했다. 나는 27대 수야각주로, 네 선조는 내 형님이시다. 내 형님께 받은 은혜가 크고도 크다. 내 너를 거두어 그 은혜를 갚아야겠으니, 절을 올리도록 하거라.”
그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해되진 않았고 여전히 어리둥절하였다. 하지만 제 목을 노리던 세 신선이 동아줄을 끊어 버리기 전에 서둘러 다리를 모으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두 번의 절을 올림으로써 사제의 인연이 이어졌다.
“사… 사부님.”
“좋다.”
신선들은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청난이 사제의 연을 맺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저 진영이란 아이의 선조에 있었다.
청난은 알지 못했으나, 선계에서 청난이 유명한 이유는 오직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형제인 진주국. 그에 관한 일화는 도를 외우고, 의를 말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회자되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또 다른 신선이 있다.
선계에서 그의 이름을 무시하는 건 고대 신선이나 사헌 선자, 백매선처럼 남의 눈길을 신경 쓰지 않는 자들 정도일 것이다.
철선을 든 신선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하아……. 선사, 정말 너무하십니다. 연화문 출신 신선들의 성향이 얼마나 불같은지 아시면서……. 하지만 이해합니다. 저도 두 분의 이야기에 감명받았거든요. 그리 아끼실 만하지요. 대신선, 저는 여기서 손을 떼겠습니다. 선께서도 괜히 적을 만들지 마세요.”
그는 누가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뒤를 돌더니, 그대로 유유히 떠나 버렸다. 그러자 말수가 적었던 신선도 잡고 있던 대신선의 팔을 놓았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진 선사도 천겁을 겪은 이인데 선계에 해가 될 짓은 하지 않겠지요. 저는 연화문으로 돌아가 단서를 찾겠습니다.”
그 또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셋 중 둘이 떠나고, 대신선만이 자리를 지켰다. 그도 이렇게 물러나 주면 좋겠건만, 아쉽게도 그는 얼굴 끝까지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 절대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선사가 아직도 제일 선사 같소? 오만이 과하구나! 이리 무사할 수 있는 것은 너를 둘러싼 이들의 힘이지, 결코 네 힘이 아니거늘! 선계를 우습게 아는-.”
쏴아아아.
갑자기 쏟아진 비는 한순간에 대신선을 물에 빠진 큰 쥐로 만들어 버렸다.
“…….”
“…….”
“……풋.”
“영아…….”
“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사부, 저분이……. 아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네… 소인이 정신을 놓아서… 네…….”
폭소하던 진영이 다시 현실을 자각하는 데에는 불과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좁은 상자에 들어가듯 몸을 구기며 청난의 얄팍한 등 뒤에 몸을 숨겼다.
이 와중에도 청난은 단 한 방울의 비도 맞지 않았다. 마치 그의 머리 위에 투명한 우산이 있는 것처럼 빗방울이 그만을 피해 갔다. 진영은 옷 끝이 흠뻑 젖었지만, 이 사실을 알고 청난에게 붙음으로써 물에 빠진 생쥐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청난은 손바닥을 들어 보았다.
“이건…….”
“내 사존께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 그 전에 날 찾아오는 게 올바른 순서인 것을 잘 아실 텐데.”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언제나 들어 왔던 감미로운 목소리. 하지만 이토록 차가운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있었다. 불개미의 동굴에서.
서서히 다가온 것은 그의 사랑스러운 제자 화백매였다. 그는 청난을 스치고 지나가 그가 진영에게 그러했듯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렇게 내가 우스운가?”
“백…….”
대신선은 드디어 말이 통하는 신선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단어를 뱉기도 전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매아, 네 사제가 된 진영이다.”
“아, 안녕하세요.”
백매는 여유롭게 고개를 돌려 진영과 마주 보았다. 진영은 얼굴에 ‘어리둥절하다’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는 듯 멍해 보였다. 그것을 본 백매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그렇군요. 좋습니다.”
“무엇이 좋은 것이냐.”
“사존께서 좋으신 것이 좋습니다. 사존께서는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즐기시지 않습니까. 자리를 나눠야 하는 것에 질투 나지 않는다 하면 허언일 겁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기뻐하신다면 보상되고도 남는 기쁨이 될 겁니다.”
“아가, 어찌 그리 착해?”
“사존께서 너그러이 봐주시는 것이지요.”
저 화기애애한 분위기 밖에는 주먹을 불끈 쥔 대신선이 있었다.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백매선은 내가 안 보이시오?”
백매는 그제야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청난과 대화하며 올라갔던 입꼬리는 어느새 명계까지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매아야, 입.”
“…….”
백매가 온 덕에 여유가 생긴 것인지 청난이 이제껏 보였던 날 세운 면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장난스레 제 제자를 탓했다. 대신선이 보기에 청난은 제자 앞이라고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고, 또 제자를 과하게 믿는, 호랑이 옆 여우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에 반해 진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문은 들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두고 저리 행동하는 것일까.
“사존, 걱정 마세요. 제자는… 매아는 꽤 강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 해낼게요.”
백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탓에 청난은 수줍어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대신선이 보았다.
‘이게 무슨…….’
그가 숟가락을 들고 있었더라면 땅에 툭 떨구었을 것이다.
그럴 만했다. 이제껏 그가 봐 온 백매의 모습은 위풍당당한 장군의 기개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 신선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백매선이 지금… 수줍게 미소 지은 것인가? 이쯤 되니 화가 나기 이전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가 신선이 아니었더라면 필히 귀신에 씐 것이라 생각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