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96)화 (96/111)

#96

“지금 가르쳐 주면 재미없잖느냐. 내일 건네주마. 스승이 약속하지, 분명 네가 기뻐할 거야.”

“……네.”

‘제 기쁨은 오직 한 가지뿐이에요.’

백매의 머릿속은 또다시 그가 하고 싶은 ‘대답’들로 가득 찼다.

그의 머릿속 흰 화지는 그렇게 한 필 한 필 그어지며 새까맣게 변모하였다. 그러다 청난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그 틈 사이로 한 줄기의 빛이 찾아왔다. 그것은 과히 따뜻했다.

“피곤할 테니 그만 들어가 보거라. 내일 보자, 매아야.”

“네, 사존. 이른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좋은 꿈 꾸렴.”

백매의 속을 전혀 알지 못하는 청난은 그저 오늘도 고된 하루를 보냈을 제자를 돌보았다. 백매는 그의 나직하고 다정한 음성을 거부할 수 없어 몸을 돌렸다. 방을 나간 백매가 문을 닫기 위해 방 안을 바라보았다. 백매의 등을 보던 청난의 시선은 어느새 돌아가 창가로 향해 있었다.

오늘은 달이 둥그렇다. 보름마다 찾아오는 한결같은 그 풍경이, 마치 둘도 없는 귀한 것인 양 청난의 눈동자는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듯이.

백매는 어쩐지 그가 작아 보였다.

백매는 그의 모습을 최대한 눈에 담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탁. 작은 소음과 함께 양 문이 맞물리며 백매의 시야에는 어둠만이 남았다. 불을 켜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백매는 여전히 불을 켤 생각을 않았다.

어두운 길목에 돌아가는 이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사문을 뜻하는 의복의 긴 소맷자락이 나부껴 인기척을 대신해 주었다.

그리고 청난이 말한 ‘내일’은 삼백 년이 지난 후에야 찾아왔다.

청난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눈앞에 펼쳐진 것은 기울어진 땅이었다.

‘응?’

자신의 몸이 딱딱한 것에 기대어져 있었다. 아니, 눌러지고 있다는 것이 옳을까.

“으음…….”

신음을 흘리는 청난의 입에 까끌까끌한 것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기절했었음을 떠올렸다.

딱딱한 곳에 누워 있던 탓에 온몸이 찌뿌둥하였다.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켠 청난은 상황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자신은 뭘 하고 있었더라. 참, 백매가 숙소를 알아본다고 하였지. 피곤하여 잠이 든 모양이었다. 몸을 혹사시키지는 않았지만, 정신력은 혹사시켰었다.

그렇게 잠들어서는…….

“……. 아!”

청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 꿈속에서 청난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얘기하였는지, 그는 누구인지, 자신의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감은 남아 있었다.

청난은 자신의 감에 따라 나아갔다. 자신이 오른발을 뻗는 건지 왼발을 뻗는 건지도 헷갈릴 정도로 헐레벌떡 뛰었다.

“허억, 헉, 허… 허어…….”

얼마나 힘든지 거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청난의 무릎이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가 원하던, 또는 원치 않았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뛰어도 소용이 없거늘.”

“아무리 그래도 어차피 잡힐 텐데, 우리 편하게 가는 게 어떻소?”

“히이… 익… 나, 난 잘못 없어요!”

“반성을 모르는구나!”

그 목소리들은 멀리서 시작되었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 기이하게도 목소리는 적어도 네 명이었지만 발소리는 한 명분뿐이었다.

그 목소리들을 듣자 청난은 자신이 꿈에서 들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랐다. 청난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며 서둘렀다.

발소리가 골목 모서리를 지나 청난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으악!”

“읏.”

그와 청난은 서로 부딪쳐 사이좋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도망치느라 바빠 청난이 있는 줄 몰랐을 테고, 청난은… 아쉽게도 발걸음을 멈추는 것 또한 신체 능력이라 그의 힘으론 할 수 없었다.

“아야야… 아, 아니, 이럴 때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딪쳐 온 그는 상대가 누군지 볼 틈도 없이 다급하게 일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떠나는 것보다 청난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막아서는 것이 빨랐다.

‘풀 냄새.’

그는 익숙한 냄새에 잠시 멈칫하였다. 그 덕분에 제자리에서 청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쁘신 분들께서 어찌 이곳에 행차하셨습니까. 이 진 아무개가 안내를 도와드려도 될는지요.”

익숙한 향,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점차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보여 주는 낯익은 얼굴.

“청 책사……?”

“오랜만입니다, 진 공자.”

진영은 청난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몰랐다. 동시에 그를 향한 걱정에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책사. 책사, 이건 제 일입니다. 책사께선 몸을 피하세요!”

“걱정 마세요. 이건 제 일입니다.”

청난은 진영을 등진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기에 진영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청난의 음성이 부드러웠기에,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란 착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말에도 걱정이 줄어들지 않았다.

청난이 누구인가. 한순간에 몰려온 마물들을 더 빠르게 해결한 자가 아닌가. 그의 능력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상대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진영은 도망치면서 저를 쫓는 이들이 누군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천지에 없을 것이다.

진영은 그들이 청난을 불편해하기 전에 그가 떠나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허어, 진 대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어느새 그들은 아무 인기척 없이 청난의 앞에 서 있었다. 밤이 어두웠고, 청난의 눈은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아 그들이 세 명이란 것 외엔 무엇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멀리서 들었던 목소리로 그들 중 한 명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대신선께서 이 땅엔 무슨 연유로 오셨나요.”

그는 지난날 선계에서 만났던, 대신선이라 불리던 신선이었다.

“책사……? 이분들을 아십니까?”

“예, 전에 한번 뵈었습니다. 그러니 공자께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공자를 지켜 드릴 테니.”

“예… 예?”

“진 선사, 너무 서운합니다. 지킨다니요. 저희가 악역처럼 보이는 건가요?”

말한 이는 대신선의 뒤에 있던 자였다. 청난은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지만 그는 청난을 아는 듯했다. 촤라락 철선을 펼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곧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떠나가고, 청난의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졌다. 과연 그들은 청난의 예상대로였다. 그들은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어 그 미모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하계의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을 보는 이는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구나.

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들이 바로 하늘의 신선들이었으니.

“악역은 상대적인 것이지요. 쥐에겐 고양이도 악역으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진 선사는 쥐보다는 호랑이에 가깝지 않았나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지금은 쥐에 불과하지요. 다만, 쥐는 모여 있으면 때론 고양이도 잡는다지 않습니까. 그런 쥐가 되려는 것뿐이지요.”

진영은 신경전인지 아닌지 모를 그 대화를 따라가랴 고개를 바삐 움직였다.

들어 보니 청난은 그들의 신분을 아는 듯하였다. 지금까지 도망쳐 온 진영도 그들이 단지 선술을 익혔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감히 신선이라고 생각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놀라 혼이 날아갈 뻔했다. 한데, 거기에 더하여…….

‘청 책사가 선군과 대화하고 있어?’

그것도 하급자가 상급자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청난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신선은 경외의 대상이다. 존경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존재인 것이다. 당연했다. 그들이 한순간의 ‘실수’라도 저지르면 힘없는 인계 백성들은 순순히 목숨을 명계로 보내야 하지 않는가.

청난이 담이 큰 줄은 알았지만, 이것은 그 정도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쪽도 청 책사를 알고 있던 눈치지……?’

진영이 세 명의 신선을 힐끗 바라보다가 철선을 쥔 신선과 눈이 마주치자 히익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진 선사. 처음에는 자신을 부른 줄 알았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지만 나름 선술을 쓰지 않는가. 하지만 곧 그것이 청난을 얘기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책사의 성은 ‘진’이 아니야.’

어째서 그를 그렇게 부르는 걸까. 단순한 호칭이라기엔 진영은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모르지만, 사실 그는 청난을 닮아, 정확하게는 그의 어머니를 닮아 감이 좋았다. 진영은 양측이 대립하는 이런 때임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끊어서라도 말을 건네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는 청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채… 책사, 왜 저들이 책사를 그리 부르는… 히끅…….”

말을 꺼내는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찼다. 노린 건 아니었는데, 청난은 그런 모습에 약했다. 그 탓에 청난은 핑계를 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진실을 숨겼다가 안심은커녕 더 불안하게 만드는 모습을 숱하게 봐 왔으니. 참 대단하게도 아이들은 그런 거짓은 용케도 잡아내곤 했었다.

청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야, 제가 정말로 진씨 성을 쓰는 수사이기 때문이지요.”

“예… 에?”

“그 아이는 선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가 보오. 이리 훌륭한 아군을 두었는데 그 진면목을 모르다니. 아깝군, 아까워.”

“아까울 게 있습니까. 그저 제 후손을 비호하는 것일 뿐임을.”

“예… 에?”

“이미 삼백 년 전에 출가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래도 혈육이지요.”

“예에에에에?”

여기 있는 다섯 명 중 유일하게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진영뿐이었다. 대신선은 그런 진영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선사,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닙니다. 저 아이가 지은 죄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 죄명이 무엇인지요.”

“저 아이가 연화문을 멸문시켰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