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하하하, 알았어요. 알았어. 지금은 네 편한 대로 말하거라. 이 스승이 눈감아 주마.”
“감사합니다, 사존.”
“네가 묻고자 한 것은 쓰지도 못할 영력을 왜 챙겼냐는 것이지?”
“네, 맞아요. 그런 법기로 남의 것을 취할 수 있다면 하늘엔 사기꾼만이 들썩였을 겁니다.”
“수사란 자가 어찌 그리 말하느냐?”
“형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지금 하늘 위에 계신 선군께서 사기꾼이란 게 아니잖습니까.”
“넌 얘를 너무 편애하는 경향이 있잖느냐. 나라도 가르쳐야지.”
내가 그렇게 매아를 싸고돌았던가. 청난은 모른 척 차를 마시며 딴청을 피워 댔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원하던 건 천겁일 것이다.”
“천겁이요?”
분명 한연화도 그리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백매는 영 이해되지 않았다. 천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이던가? 아니, 애초에 ‘가질’ 수 있던 것인가? 하지만 그날을 떠올리면, 확실히 천겁은 청난의 영력을 향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번개를 사서 맞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으음… 사존, 제자는 부족하여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시면 안 될까요?”
“꼬부랑 할배들의 말 때문이겠지.”
“형.”
주국이 삐딱함을 가득 담아 대신 대답해 주었다. 방금 전 ‘사기꾼’을 입에 올렸다고 백매를 혼내던 이는 그가 아니었나. 이번엔 청난이 주국의 옳지 못한 단어 사용에 제재를 걸었다.
“그자들은 신선이 아니니 괜찮아. 배분1)도 같지 않으냐. 네게 한 짓을 생각하면 연화문 현판을 가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는 것이다.”
“그럼 제가 곤란해질 텐데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사백, 그게 무슨 말인가요? 연화문 장로들이 한연화의 목숨을 노리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아니다. 그저 허무맹랑할 말을 믿고 도박질이나 해 댄 것이지.”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주국은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헛바람을 내뱉었다. 이대로면 본론을 말하기까지 사흘은 족히 걸릴 것 같아, 청난이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가장 최근에 수사가 비승하였던 것이 몇 년 전인지 아느냐?”
“백이십 년가량 되었다 들었습니다.”
“맞다. 적어도 두 세대는 훨씬 지났지. 그래서 비승이란 현존하는 신화와 같은 것이다. 신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근본 없는 이야기도 생기지 않느냐?”
“천명선인이 옥황천존의 아들이네, 월궁선녀가 그의 부인이네 하는 말들 말이죠? 저도 어릴 때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조금… 굉장했죠.”
백매는 말하다 보니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민간에 도는 이야기 중에는 상스러운 것들이 많았고, 특히 술에 취해 거지와 말을 나누는 이들은 특히 그런 것들을 좋아하던 까닭에…….
청난은 어느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제자를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주국은 그 모습도 그리 내키진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제 동생이 좋다는데.
“맞다. 사실도 있겠고, 아닌 것도 있겠지. 그리고 이야기는 꼭 인물에 한정되지 않는단다. 그런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천겁에 관한 것이지. 수련을 하여 정점에 달하면 시련이 내려지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증명하여 신선이 된다. 이것이 정론이다. 하지만, 수사가 아닌 이들은 그런 이야기보단 조금 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법이지.”
“파란만장한 이야기 말인가요.”
“그래, 논일을 하던 청년이 지나가는 천겁을 맞고 신이 되었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수사나 되어서 그런 이야길 믿는다니, 거참.”
가만히 듣고 있던 주국이 결국 혀를 차며 추임새를 넣었다.
“형님…….”
청난은 그를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주국이 여전히 성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히 그런 요행을 바란다니. 아니, 헛된 바람을 가질 거면 바라기만 하지, 왜 이런 일을 벌이느냐 말이다. 신선이 무슨 존재냐? 개나 소나 다 될 수 있는 이야기더냐? 천겁을 맞으면 신선이 돼? 그런 꼼수가 있었더라면 하계는 사기꾼들에게 짓밟힌 지 오래였겠지!”
주국의 목소리는 점점 끓어오르더니, 곧 증기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인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속으로 삭이는 것일까. 청난과 백매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이런 모습은 그답지 않았다.
그가 말한 예시들은 허무맹랑한 게 맞았다. 특히나 비승을 넘보는 청난과 백매에겐 더욱 그러했다. 그 때문에 분노와 함께 실려 있는 주국의 울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야기야 민가에 흔한 것이 아니었던가.
“자격이 없으면, 넘봐선 안 되는 것이 있단 말이다.”
주국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주제를 잇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원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 하여도 이 자리에는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슬픔을 청난과 백매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여도 말이다.
청난과 백매는 남은 날을 바쁘게 보내야 했다. 연회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문파의 결정권자였다. 청난이 아직 수야각에 남아 있는데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수야각주과 소각주의 역을 다하느라 청난과 백매는 서로를 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의 사형제가 그리도 무정하진 않아 연회 전 마지막 밤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하긴 연회 주인공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하면 연회의 흥이 나겠는가.
백매는 이 귀한 시간을 지금, 청난의 숙소 문 앞에서 보내고 있었다. 사실 온 지는 꽤 되었는데, 들어가도 될지 고민하느라 반 시진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동시에, 청난이 그의 모습을 본 것도 반 시진째였다.
청난이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또한 숙소의 창호지는 과히 얇았다. 그 탓에 반대편에 빛 한 점 없다 하여도 문 앞에 있는 이의 실루엣은 확연히 비쳤는데, 이처럼 주체 못 할 정도로 머리카락이 소용돌이치고 키가 큰 사람이 제 제자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청난은 이대로면 저곳에 제자 석상도 세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아야, 거기서 무얼 하느냐? 어서 들어오너라.”
“아… 아! 그, 그것이……. 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백매는 덕분에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순간 그에겐 기쁨보다 두려움이 덮쳐 왔다.
이대로 멈춰 서 있으면 시간도 멈춰 줄 것 같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바라옵고 바라는 소망이었다. 그러면 그가 떠나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그 사존이 저를 불렀다. 그의 부름을 어찌 거절할까. 어찌 그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할까. 뜨거운 열기가 제 얼굴을 물들이기 전에 백매는 크게 숨을 내쉬며 열기를 모두 떨쳐 버렸다.
백매는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청난은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내일도 평범한 날에 불과한 것처럼.
“내 아가, 어찌 그리 시무룩한 게야. 스승이 떠나는 게 그리 서운하더냐.”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냥… 제자는…….”
제자는 당신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게 될까 두렵습니다.
감히 원하건대, 가지 말아 주세요. 제자의 곁에 함께 있어 주세요. 제자는 그리 영리하지 못하니, 당신을 잊어버리면 어찌합니까.
백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중엔 이보다 더 구질구질한 것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가 날 돌아볼지도 몰랐다. 그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욕심부려선 안 돼. 날 미워하시게 될 거야.’
백매는 제 욕망을 속으로 삼켰다. 백매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청난은 이해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서운할 테지. 아니면 걱정되거나. 내가 어디 널 모르더냐? 또 혼자 땅 팠겠지? 그럴 땐 이 스승을 찾아오라 하여도 말을 듣지 않았지.”
“죄송합니다…….”
“혼내는 말이 아니라 하였는데도.”
백매는 대답하지 않더니 입 끝을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청난은 백매의 속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나의 제자는, 언제쯤이면 억지로 웃을 때 눈이 휘지 않음을 깨달을는지.
“정말 아니에요. 물론… 보고 싶겠죠. 하지만 사존께서 신검합일을 이루시어 거룩해지시는데 그것을 방해하고 싶은 제자가 어디 있겠어요. 곧 세상은 사존의 이름으로 뒤덮일 텐데, 매아는 그것을 들으며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장하구나. 내가 널 어리게만 본 모양이야. 널 달래려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보고 싶지 않겠구나.”
“서… 선물이요?”
자신이 바란 반응이 돌아오자 청난은 빙그레 웃었다.
방금 전까진 백매의 머릿속은 청난으로 가득 차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지만 선물 또한 청난에 대한 것이었다. 새로운 ‘청난’이 당도하자, 그의 머릿속은 그것을 위해 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가 저를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일까. 그 기대감이 부정적인 감정 사이에서 파릇하게 싹을 틔웠다.
“사존께서 주신다면, 그것이 뭐든 평생 간직할게요……!”
“그럼, 평생 간직해야지. 그럴 수밖에 없을 게다.”
“네……? 그게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