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여타 문파들이 그러하듯 수야각 또한 산중에 위치해 있어 방문객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저잣거리에 온 것처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야각의 제자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심지어 네다섯 살의 어린 제자까지 나와 방문객의 안내를 도왔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족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이들로 꽤나 시끌벅적해졌다.
청난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처럼 수야산을 걸어 올라갔다. 그들은 값비싼 것을 두르고 있었지만, 흙바닥을 굴러 지저분해진 탓에 본래의 값어치가 드러나지 않았다. 수야각에는 부자와 거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던 터라, 흙바닥을 구른 미남 정도로는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방문객 사이에 섞여 있던 청난이 문 앞에 섰다. 입구에서 방문객 명단을 적던 제자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도 못한 채 말을 건넸다.
“성함을 말씀해 주세요.”
“성은 진, 이름은 청난. 푸를 청에 난초 난자를 쓴단다.”
“푸를 청에… 난초… 난……. 예?”
부르는 대로 받아 적던 제자는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청난은 싱긋 웃어 보였다.
“들어가도 되지?”
“예, 예, 각주!”
산밑까지 울릴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시선을 집중시켰다.
당연히 사방에서는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수야각주가 신선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그 기를 받아 가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신이 되어야 할 이가 온몸에 흙을 묻힌 채 이곳에 있으니, 이것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 못 되었다.
청난은 조용히 들어오고 싶었는데 되레 침울한 표정을 가득 받았으니 곤란해졌다. 그는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냥 들어가셔도 되셨을 텐데 굳이 사제를 놀리시니 그렇죠.”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청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어린 제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럼 난 들어가마. 힘내.”
청난이 대문을 지나자 광장에 들어서자 이곳에 모인 이목 또한 청난에게로 집중되었다.
청난은 어디서든 이목을 끄는 편이었지만, 수야각 제자들은 진청난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수야각 안에서 이토록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은 꽤나 어색했다.
“각주.”
“각주.”
“각주께서 돌아오셨다!”
청난과 백매가 지나는 곳마다 제자들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고, 외부인들은 그들의 옷차림을 보며 지난날을 추측하기 바빴다. 백매의 눈썹 사이의 골이 깊어지자 청난은 걸음을 빨리하였다.
그러자 대중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진 각주! 당신은 신이 될 재목이 아니었던 거요?”
백매가 발끈하며 고개를 돌리자 청난이 그의 시선을 막아섰다.
소리 지른 인물은 몸집이 풍부한 남성으로, 옷차림을 보아하니 상인인 모양이었다. 청난의 천겁을 앞두고 수야각과 교류를 트고자 하는 상인 가문들이 줄을 섰었는데, 아마 그중 한 가문의 사람일 터였다.
그는 신선이 난 문파에 줄을 대어 큰돈을 벌어 볼 생각이었건만, 자신이 줄을 잘못 선 것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청난은 그에게 화내지도, 웃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앞에 서서 방문객을 맞이하는 각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곳은 도관이니 모쪼록 언행에 조심해 주십시오.”
아무리 사람 좋아 보인다 하여도, 청난은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그가 이렇게 잘못을 따지니 상인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청난이 백매의 손을 잡고 몸을 돌린 차에,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건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흘 후에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청난이 자신의 방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두루마기 산에 파묻힌 주국이 있었다. 문소리에 또 어느 안건이 들어오나 고개를 든 주국은 청난과 눈을 마주치자 급하게 일어나려다 그만 탁상에 무릎을 부딪히고 말았다.
“형님, 제가 어디 도망갑니까.”
“도망갔어야 할 애가 여기 있으니 놀라는 게 아니냐?”
주국이 주인의 자리를 비켜 주었으나 청난은 좌우가 두루마기로 쌓인 그곳에 앉고 싶지는 않았기에 대신 화로 앞에 앉았다. 백매는 자연스럽게 내실에 들어가 찻잎을 꺼내 왔다.
주국은 붓을 놓고 청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소매를 적신 먹물이 그가 얼마나 바쁜 나날을 보냈는지 알려 주었다.
“저 때문에 형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네가 한 것 같구나. 행색이 왜 그러느냐. 듣기론 네가 사흘 후를 예고했다는데,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다오.”
“소식이 참 빠르네요.”
“어디 보통 중한 일이더냐. 아이들이 부리나케 달려오더구나.”
“하하하, 그랬군요. 천겁은 사흘 후에 다시 올 겁니다.”
“……뭐? 천겁이 다시 온다니. 천겁이 사람도 아닐진대 재방문을 예고했다는 말이냐?”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이었던 자였습니다.”
청난은 천천히 겪은 일을 설명해 주었다. 한연화가 법보를 사용해 자신의 힘을 약화시킨 것부터, 천겁을 맞아 뇌공선인을 만난 것까지 모든 것을 말했다. 주국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에라도 연화문으로 가려고 한 탓에 청난은 그를 가까스로 말렸다. 평소 청난의 편을 들어주던 백매가 이번만큼은 주국의 편을 들어준 탓에 더욱 힘들었다.
“귀괴들이 한 공자를 찾아온 건 그 법보 때문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 값진 보물이 형편없는 문지기 손에 있으니 얼마나 탐이 났겠어?”
“한 공자만큼 뛰어난 수사가 몇이나 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흥, 너보다 못한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으냐.”
주국은 성숙함에 있어서 따라올 자가 없었지만, 유독 청난에 관련된 일에는 유치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이번 일은 그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으니, 더욱 참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백매가 수야각에서 실력으론 두 번째로 꼽힌다는 얘기는 주국을 넘어섰다는 말이었다. 그런 백매마저 속수무책이었다 하니, 듣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졌을 터.
주국의 심통함이 풀어지지 않자 청난은 말을 덧붙였다.
“형님, 한 공자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듣자 하니 집에서 쫓아낸 모양이었습니다.”
“그들이 진짜 쫓아냈겠느냐? 그리 말했다고 해도 엄포를 놓았을 뿐이겠지. 그들 욕심에 천영근을 놓아줄 리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몰아세웠으면 얘가 그랬겠어요.”
“너 또 애라고 봐주지. 한 공자는 네 제자랑 고작 한 살 차이야.”
“그러니까 애죠.”
“……네 제자도, 한 공자도 벌써 약관이다. 두 살이 아니야.”
청난은 대답하지 않고 차를 후루룩 마시기만 하였다.
청난이 소각주를 길에서 주워 온 강아지처럼 싸고돈다는 것을 모르는 동년배가 없을 지경이었으니, 주국은 이 점에 있어서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제가 좋다는데.
주국의 찻잔이 비자 백매가 금세 채워 주었다. 백매는 제 사존의 형인 주국에게 온 예의를 다하였다. 그런데도 주국은 어쩐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인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던 까닭에 표면에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가 청난의 옆에 있을 때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들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 것은, 그가 제 동생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까닭이었다.
‘내가 셋이 있더라도, 천영근 하나가 낫지.’
주국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나저나, 사흘 후까지 계획은 있느냐?”
“딱히요. 해야 할 건 이미 다 해 놨으니까요.”
“그럼 연회를 여는 건 어떠냐? 너는 우리의 각주다. 각주가 문파를 떠나는데 어찌 그냥 보내겠느냐. 수야각의 체면이 떨어질 게다.”
“음…….”
지금까진 수야각주의 은퇴라 하여도 성대한 연회 따위를 연 적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조용하여, 문하생들이 각주가 바뀐 줄도 모른 채 일 주가량을 지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청난의 사존인 유회평이 은퇴했을 때였다.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다음 수야각주가 될 청난도 당일 아침에야 통보받았을 지경이었다.
‘그 덕분에 고생 꽤나 했지.’
물론 그가 과한 경우긴 하였지만, 어쨌든 도가이니 이런 큰일에도 속세의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가급적 평탄하게 지내는 것이 이제까지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려다 되레 잃을 수 있다. 이번에 연화문이 선을 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수야각의 입지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도 많은 이들이. 그러니 수야각의 건재함을 넌지시 알릴 필요가 있었다.
“좋습니다. 기왕이면 성대하게 열어 주세요. 돈도 많잖아요.”
“오냐. 널 위한 연회인데 당연히 성대해야지. 황제보다 거하게 해 주마.”
주국은 연화문이 무슨 수를 썼든 안 썼든 성대한 연회를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과대평가하는 형제였기에 청난은 이것이 그의 팔불출에서 기인한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청난은 형의 ‘농담’에 푸흣 웃으며 장난스레 말하였다.
“수야각이 도문인 건 잊지 않으셨죠.”
“…….”
“……형님?”
실없는 소리로 맞대응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주국은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대신 방금 전의 청난처럼 빈 잔을 입에 물고 있었다. 백매는 새로운 잔에 차를 따라 건네며 생각했다.
‘거짓을 입에 못 올리시는 건 닮으셨네.’
그런 주국에게 백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대화의 화제를 바꾼 것이다.
“그런데 사존, 한연화는 왜 사존의 영력을 챙긴 건가요?”
“매아, 경칭을 써야지.”
“감히 그따위에게!”
“감히 그따위에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주국과 백매는 때아닌 이구동성에 서로 마주 보았다. 그 시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획 하니 돌리며 청난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리 행동하는 게 같을까. 누가 보면 피를 나눈 가족이라 오해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