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청난이 말을 아끼고 있자 다행히도 그는 세 번째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자신을 소개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뇌공이라 합니다. 새로운 신선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절 데리러 오신 건가요?”
“네, 알고 계셨잖아요.”
“…….”
물론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 입에서 판정이 내려지니 기분이 생소했다.
청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뜸을 들였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도 딱히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이대로 상대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청난은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제 어딜 가죠?”
“인간들이 선계라고 부르는 곳으로 갑니다.”
“가서 무얼 하나요?”
“거처를 잡으신 후, 대인이 원하시는 건 뭐든 하실 수 있습니다.”
“뭐든?”
“네, 뭐든.”
“가서 식사도 할 수 있나요? 단거라든가.”
“원하신다면요.”
“음, 혼자 생활하나요?”
“영수를 길러 수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일어나면 혼자겠군요?”
뇌공은 청난의 잡다한 질문에도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이 실용성 없는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자, 결국 말을 끊어 냈다.
“대인, 걸리시는 게 있군요.”
“그렇게 티 나나요?”
“네. 많이요. 대인께서는 나름 표정 관리를 하신 것 같지만, 저만큼 오래 살면 그 정도는 알 수 있게 됩니다.”
청난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볼살이 처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청난의 비승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이었다. 천영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차근히 속세를 떠날 준비를 해 왔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제가 없으면 저 아이들이 무슨 정치적 입장에 휘말리게 될지, 저로 인해 문파 간의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를 노릇이니 청난은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다.
청난의 표정에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지자 뇌공이 말을 건넸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세요.”
청난은 그의 말을 바로 소화하지 못했다. 비승이 옆집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것처럼 가볍게 얘기할 일이었던가.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던 청난은 그런 당황스러움은 금세 잊었다. 그는 다소 밝아진 톤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되는 거였나요?”
“네, 속세에 미련 남은 선인들은 간혹 말썽을 부리거든요. 차라리 조금 지각하는 게 낫죠. 이런, 마침 시간이 됐네요.”
“예? 무슨 시간…….”
청난의 말을 끝나기도 전에 강한 무게감이 그를 덮쳐 왔다.
철푸덕-!
청난은 전혀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어느새 뇌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의 시야는 깊은 산속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난은 묵직한 느낌에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사랑하는 제자였다.
백매의 표정은 굉장했다. 청난은 그가 어릴 때부터 돌보았으니 울먹이는 것은 꽤 봐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눈물샘이 흘러넘치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머리카락 끝은 불에 탄 듯 그을려 있기까지 했다.
그는 무슨 충격을 받은 것인지 청난의 허리를 굳게 잡은 채, 넘어진 상태에서 일어나려 하지도 않았다.
“매아, 매아. 내 아가, 왜 그래?”
청난의 목소리에 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눈썹 앞머리는 올라가고, 눈꼬리는 처졌다. 우는 것 같으면서도 화내는 것 같았다. 그는 흐윽 숨을 들이마시더니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왜… 왜라니요. 그야 사존 때문입니다. 큰일 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존을 잃는 줄 알았다고요……. 사존, 사존, 청난… 사존… 제발요…….”
백매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워졌다.
효심 깊은 제자가 걱정할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청난은 당황하여, 흙 묻은 손을 털지도 않고 서둘러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이 스승이 널 두고 무모한 짓을 했겠느냐. 울지 말거라. 울지 마. 나는 무사해.”
“이제… 이제, 제자는 사존의 거짓말에 속지 않습니다. 무모한 줄 아시면서도 가셨잖아요. 저는 감히 사존을 말릴 수도 없고……. 흐으윽…….”
“…….”
백매의 말에 틀린 건 없었으니 청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청난은 어째서 연화가 안 보이는지,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힘이 빠진 탓에 그를 밀어 낼 수 없었고 그럴 분위기도 못 되었다.
결국 청난은 그의 흐느낌이 멎을 때까지 달래며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중 청난은 자신의 소매가 묵직하단 것을 알았다. 울고 있는 백매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소매 안을 휘적거렸다. 손에 잡힌 것은 둥근 물체였다.
그것은 연화가 가지고 있던 구슬이었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지금은 그 속이 비어 있었다.
“이건…….”
청난의 시선이 돌아가자 백매 또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청난이 들고 있는 구슬을 보고는 히끅 숨을 들이마시며 울음을 그쳤다.
“이건… 한연화가 갖고 있던 거죠?”
“경칭을 써야지.”
“히끅, 그런 놈… 아니, 사람한테 왜 경칭을…….”
누구 때문에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잊은 건지, 여전히 연화에게 호의적인 청난의 모습이 백매는 못마땅했다.
백매의 아랫입술은 삐죽 튀어나왔고 눈가는 붉게 충혈되었다. 청난은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손을 올리니 백매가 자신의 머리를 청난의 손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백매의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두어 번 빗겨 주자, 그제야 뚱해진 표정이 잠잠해졌다.
“연화는?”
“사존께서 밀쳐 내신 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도망쳐 버렸습니다.”
“내가 밀쳐 내?”
“네, 사존께서 번개에 사라지신 후, 한 공자가 굴러 나왔습니다. 사존께서 빼낸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렇구나. 나는 기억이 안 난다.”
“제, 제자가 본 걸 말씀드릴게요.”
백매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청난이 번개 속으로 사라진 후,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청난이 빛의 기둥 속으로 뛰어 들어가자, 한연화가 밀쳐지듯 튕겨 나왔다. 빛의 기둥은 더욱 강렬히 빛나기 시작했고, 청난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백매는 청난이 놓고 간 제 빈손을 허공에서 거둘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온갖 요마들은 떠났고, 한연화는 정신을 잃었으며, 번개는 고요했으니, 이 깊은 산속을 울리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매는 이 순간이 견디기 어려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어찌 행동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애타는 감정이 보채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어느새 백매의 귓가에는 흙을 박차는 신발 소리가 들리고, 그의 소맷자락은 바람에 나부꼈으며, 시야 속에는 뻗어 낸 제 손이 보였다.
청난이 번개 속으로 사라지고, 백매가 그의 위를 덮치는 데에는 결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존!”
백매는 자신에게 쏟아진 번개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코끝을 찌르는 이 탄내는 자신의 것이겠지. 사존께선 강하시니.
다행히도 주인의 애제자를 강하게 때린 번개는 곧장 사라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대신 백매의 품에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청난이 남았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네가 날 덮쳤고, 그러자 번개가 멎었다고?”
“네. 맞습니다, 사존.”
청난은 검지로 백매의 둥근 이마를 톡 쳤다.
“이 녀석, 무모한 짓은 네가 했구나.”
“사존께서 먼저 그러셨습니다.”
“너와 내가 같으냐?”
“뭐가 다릅니까?”
“그건…….”
막상 그리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네가 걱정되니 그러지 말라 할 수 없지 않은가. 백매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니 제 마음 가는 대로 할 권리가 있었다. 청난은 그저 그의 행동이 제 마음에 차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결국 입 밖으로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왔다.
“네 목숨은 내가 거둔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네 목숨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내 것이기도 하지. 이 스승의 것을 함부로 다뤄선 되겠느냐.”
“제가… 사존의 것인가요?”
“그, 그렇지.”
어감이 이상했지만, 일단 문맥상 맞는 말이었다.
백매의 양 볼이 발그레해졌지만, 청난은 멋쩍어 시선을 돌린 탓에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백매는 그제야 청난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어 냈다.
백매가 먼저 일어나 손을 털고 청난을 향해 뻗었다. 청난이 그의 손을 맞잡으며 일어서자, 그들의 두 발 사이에는 한 뼘의 거리도 있지 않았다.
‘백매의 키가 이렇게 컸던가.’
그는 어느새 부쩍 자라 있었다. 선도 굵직해졌다. 십 년 전 그 아이를 데려와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손도 커졌지.’
평범한 사람은 허리를 에워싼 그 굵직한 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세상에 온통 저뿐인 듯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들게 했다.
‘애들은 참 쑥쑥 자라는구나. 장하기도 하지.’
청난이 백매의 머리를 비비적 쓰다듬었다.
“사존, 이제는 어떡하죠? 천겁도 그렇게 끝났고, 한연… 한 공자도 사라졌습니다.”
“끝나지 않았다.”
“예… 에?”
“서둘러 돌아가자꾸나.”
청난의 검집에서 검이 저절로 뽑혀 땅 위에 수평으로 누웠다. 청난은 검날을 밟아 서고는 백매에게 손을 건넸다.
“아직 영력이 회복되지 않았지? 오랜만에 스승과 함께 가자.”
“하, 하지만 사존, 그런 고초를 겪으셨는데 벌써 움직이신다고요? 부디 몸을 생각해 주세요.”
“아쉽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