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92)화 (92/111)

#92

허억허억.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베고, 또 베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제 검격이 헛짓처럼 느껴지는 것이, 마치 불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저들은 무한한 것 같았고, 그에 비해 연화의 체력은 한계가 있었다. 검이 천근같이 무거워지니, 끝이 머지않았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결국 연화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검을 놓치고 말았다. 때마침 일각수 한 마리가 그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연화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피하는 대신 반격의 준비를 하였다. 뼈를 내주어야 한대도 살을 깎으리라.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그 일각수가 연화의 팔을 코앞에 두고 날아가 고꾸라져 버린 것이다.

“한 공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 익숙한 사람이었다.

청난이었다.

그가 날아간 일각수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괴수의 피가 그를 더럽혔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공자, 무사… 아, 하신지요.”

연화의 몰골에 청난은 그만 말을 잃어버릴 뻔했다.

그의 복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모든 색이 변해 버렸다. 피인지 진흙인지, 또 피라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옷과 피부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만이 아닐 수도 있었다. 청난은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저자는 막 이립이 된 어린 아이에 불과한데 어찌 피로 얼룩진 모습이 노련한 살인광처럼 보이는 것인가. 저 한데 뭉친 덩어리 사이에 어떤 짐승의 가죽이 섞여 있다고 하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설사 그것이 인간의 수족이라 할지라도.

살육에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 듯 무덤덤한 낯. 그는 인간인가, 나찰의 현신인가.

연화를 뻔히 바라보던 청난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떨쳐내었다.

‘지친 것뿐이겠지.’

연화는 피 칠갑을 한 채 청난을 보며 빙긋 웃었다.

“와 주셨군요, 사존.”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대답을 한 것은 백매였다. 그는 귀괴들을 베며 빠르게 달려왔다.

“당신이 감히 그렇게 부를 입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가까이 두지 않았을 겁니다!”

“화 공자께서 언제 절 가까이 두셨다는 건가요? 늘 제게 화만 내셨으면서.”

“너희 둘, 계속 대화하면서 싸울 생각은 아니겠지? 집중하거라.”

청난은 그리 말하며 가까이에 있는 귀신을 베어 냈다.

백매와 청난이 합세하여 세 명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전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여전히 우렁찬 소음을 내는 천겁은 주인을 찾느라 번쩍이고 있기까지 하였다. 청난은 영력을 잃어 본 적도, 하물며 영력이 없는 상태에서 천겁을 눈앞에 둬 본 적도 없었으니 판단하기 어려웠다.

백매가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연화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한연화! 대체 이것들이 왜 널 따라오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알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연화와 백매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전우애라도 다진 것인지 더 친근해진 것 같았고, 그 와중에도 적을 베는 검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난 그저 사존의 영기를 훔쳐서 천겁을 가로채려던 것뿐이야.”

“…….”

가로챈다는 말을 당사자 앞에서 저리 당당하게 할 수 있다니. 청난은 오늘 두 아이들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는 것을 기뻐해야 하나 헷갈렸다.

“잠깐, 내 영기를 훔치다니, 내 것을 네가 ‘갖고’ 있다는 것이냐?”

“네. 제가 갖고 있어요. 아까 그 연기는 법보였는데, 연기는 눈속임일 뿐이고, 진짜 목적은 사존의 영기를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하늘도 속일 수 있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한 문주가?”

“네, 아버지가요.”

다행히 연화는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청난의 질문에 술술 대답해 주었다.

하늘도 속인다. 그로 인해 이루려던 목적이 무엇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청난은 휘두르는 검도 멈추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한 공자, 지금 당장 그거 버리세요!”

“네?”

“어서!”

“네, 네!”

처음 보는 청난의 위압적인 모습에 연화는 순순히 품 깊숙한 곳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은 눈앞의 귀괴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연화의 손끝이 물체에 닿은 순간, 여귀의 손톱이 연화의 눈을 향해 바짝 달려들었다.

연화는 손을 올려 여귀를 쳐 냈다. 다행히 눈은 지켰지만, 대신 제 손에 들었던 것을 땅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것은 탱탱 뛰며 아래로 굴러갔다.

연화는 제 것을 떨어트렸다는 생각에 애당초 버리려 했었다는 목적조차 잊고 손을 뻗어 버리고 말았다.

“연화!”

뒤늦게 청난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저지해 보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붉은 구슬이 하늘 아래에 나왔으니, 이제껏 주인을 찾아다니던 천겁이 이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애석하게도 연화가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붉은 구슬에 손바닥을 대는 순간-.

파직!

번개가 연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크… 크아아아아아악!”

사방으로 펼쳐진 연화의 수족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며, 주방에서나 날 법한 강렬한 탄내를 뿜어냈다.

번개는 한 번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하늘과 지상을 잇는 기둥을 박아 세운 것처럼 하나의 빛의 기둥이 되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강한 전류를 품고 있었다.

청난은 강렬한 빛에 두 눈을 뜰 수 없었다. 다만 그 속에서 들리는, 비명을 내지르기도 힘겨워하는 신음 소리가 명백하게 귀를 찔러 왔다.

천겁의 엄청난 기세에 몰려왔던 귀괴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껏 그들을 상대하던 백매는 그제서야 우두커니 서 있는 청난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백매는 빛의 기둥을 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금세 시선을 돌렸다.

“왜 끝나지 않는 거죠?”

“모르겠어. 천겁도 확신하지 못하는 탓이 아닐까 싶구나. 결국은 내가 아니니. 이대로는 연화가 버티지 못할 거야. 아무래도 내가 다녀와야겠구나.”

청난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발을 굴려 튀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자신의 제자가 저의 팔을 붙잡았다. 청난은 언제나처럼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백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표정에는 불안함이 역력했다.

백매는 명실상부 위풍당당한 대사형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는 강인하고 뛰어난 수사. 많은 제자들이 그를 우러러보며 그와 닮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지금은 십 년 전 막 산에 올랐던 그때의 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가지 마세요. 영력도 흩어지셨잖아요. 저것을 버티실 수 있으시단 보장도 없고, 사존께서 가신다 하셔도 한연화를 구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애초에 사존의 잘못도 아니시잖아요. 한연화가 ‘실수’한 것도 아니죠. 고의로 사존의 것을 뺏으려 했는데, 왜 사존께서 위험을 감수하셔야 하는 건가요?”

백매의 얼굴 근육이 움찔거렸다. 그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청난은 그의 손길을 거절해야 했다.

“그래도 가야지. 어른이잖느냐.”

청난이 백매의 손을 떼어 내자, 그는 더 이상 청난을 말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감히 사존의 행동을 막아도 되는 것일까.’

‘사존의 의중을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닐까.’

‘오히려 그에게 방해되는 게 아닐까. 나로 인해 더 다치신다면?’

백매의 머릿속에서 서로 다른 입장들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동안, 그의 손이 완전히 떨어졌고, 청난은 즉시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백매의 말대로 청난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영력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사술을 쓸 수 있는가?

사술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편리한 기술이 아니다. 매개체가 필요했고, 청난은 이제껏 자신의 영력으로 매개체를 대신해 왔다. 영력이 없는데 어찌 사술을 부리랴? 지금 그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이제껏 영력에만 너무 의존해 왔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있었다. 천겁의 주인이라는 자신의 존재. 여러 문제로 차마 입을 열지 못했으나, 청난은 이 천겁이 자신의 것임을 확신했다.

수행의 경지나 실력 때문이 아니었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천겁이 저를 부르는 기묘한 감각 때문이었다.

‘제발 몇 번 내리치는 걸로 끝내 주세요, 천겁대인.’

그렇게 청난이 빛의 기둥으로 뛰어들었다.

경계를 넘어서자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무성한 풀들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이 남았다. 그곳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감촉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청난 자신뿐.

청난은 발을 움직여 걸어 보았지만 여전히 변하는 건 없었다.

이번에는 눈을 감아 보았다. 애초에 존재하는 것이 없으니 감으나 뜨나 차이는 크지 않았다. 시각을 포기하고, 촉감을 포기했다. 자신의 다리가 여전히 걷는지 아닌지도 느껴지지 않을 무렵, 청난은 자신의 주변으로 흐르는 기를 느꼈다.

그것은 청난의 몸을 빙 휘감으며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텅 빈 심장은 새로운 것들로 점점 차올랐다.

“청난 대인.”

또렷하게 들려온 음성에 청난은 눈을 떴다.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자는 기다란 풀잎 같은 남성이었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려 누군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체격은 청난과 비슷해 보였다. 옷차림은 화려하다 말하기엔 부족함이 있었지만, 척 보아도 질 좋은 옷감으로 지어진 듯했고, 그것을 배제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귀태가 보였다.

그는 목소리마저 좋았는데, 기이하게도 다시 생각하려고 하면 기억나지 않았고, 그저 감미로웠다는 감탄만이 남았다.

“청난 대인, 저와 가시지요.”

“…….”

청난이 천겁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갈’ 곳은 선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마치 삼도천을 건너자는 말처럼 들리는 까닭에 대답하기가 썩 내키지 않았다.

마침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르고 명계로 데려간다는 동쪽 어느 민족의 신이 떠올라 더더욱 꺼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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