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청난은 차마 더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연화를 보며 씨익 웃고는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걱정 말아라. 내가 아이들을 이런 황무지로 데려왔을까 봐? 시야를 현혹하는 것은 너희만의 장기가 아니란다.”
청난은 검을 뽑아 단숨에 허공을 길게 베었다.
그러자 천막이 쓰러지듯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잘려 나가고 순식간에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수수한 미가 있었고, 그리 크진 않았지만 장정 열 명이 지낸다 하여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유독 조용한 걸 좋아하시는 선조께서 만드셨지. 그것이 과한 탓에 아무도 오지 않게 된 외로운 별장이란다. 듣기로는 인계에서 천명궁과 가장 가깝다지. 자, 들어가자꾸나.”
청난이 검을 집어넣고 성큼성큼 건물 내부에 발을 들이자 그 뒤로 백매가, 그리고 연화가 따라 들어갔다.
신비롭던 등장과 달리 내부는 아주 평범했다. 화려하지 않았으나 필요한 가구들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오래도록 이용되지 않은 건물임에도 막 청소한 것처럼 먼지 한 톨 없이 청결하였다.
청난은 건물 내부를 잠깐 둘러보는가 싶더니 뒤돌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쉬어야겠다. 너희도 내리 달려오느라 피곤이 쌓였을 테지? 정리는 나중에 하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좋겠구나.”
“네, 사존. 그럼 식사는 하실 건가요?”
“어허, 쉬라고 한 지 일 초도 되지 않았건만 일할 생각이야. 오늘은 연화 공자가 있으니 그와 함께 먹는 게 좋겠구나.”
청난의 말을 들은 연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벽곡 수련을 마쳐서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화 공자께서는 아직이신가요?”
청난이야 이미 벽곡 수련을 끝낸 지 오래였고, 다른 문파에서는 백매 나이대면 대부분의 수사들이 벽곡 수련을 마치는 편이었다. 그러나 수야각은 다른 문파에 비해 벽곡 수련을 하는 수사의 수가 다소 적었다. 그 탓에 식당이 넓었고, 오 년 전 연화가 방문했을 때도 그 점을 가장 놀라워했었다. 주변 분위기가 이러한 데다가 백매는 청난과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하루 종일 기다릴 정도로 즐겼으니, 지금까지 벽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즉, 백매는 벽곡수련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영근을 가진 비슷한 나이의 수사가 이룬 경지를 본인은 하지 못했다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평소 이렇게 백매가 자신감 없어 할 때에는 청난이 나서 달래 주곤 하였었다.
하지만 정순함은 수사가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앎에도 차마 벽곡 수련을 시키지 않았던 것은 청난이었기 때문에 그를 변호할 낯이 되지 못했다.
부끄러워 말 못 하는 백매와, 그럴 입장이 되지 못해 입을 다문 청난 사이에 놓여 버린 연화는 뒤늦게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화 공자께서 심심하실 테니 말벗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연화의 말을 들은 청난은 안심하고 빈방으로 향했다.
“신경 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공자.”
백매는 청난이 먼 방문을 닫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먹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겠다니, 제가 체하는 걸 원하시나요?”
“하하, 화 공자가 이토록 앞뒤가 다르단 걸 사존께서는 아시나요?”
“제가 존경하는 분 앞에서 그럴 리 있겠나요. 오직 한 공자 앞에서만 이럽니다.”
“흐음, 존경만?”
백매는 연화를 노려보더니 곧 시무룩해지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사존께 불손한 마음을 품겠나요. 사존께선 드높은 분이신데…….”
“화 공자, 화내거나 시무룩하거나 하나만 해 주세요. 헷갈립니다.”
“어떻게 하나만 해요? 화난 건 한 공자한테고, 시무룩한 건……. 하아, 저도 들어가 쉬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공자.”
그렇게 백매마저 몸을 획 돌려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지려 하니 연화는 당황스러웠다.
“공자? 화 공자? 멀리 가지 마세요. 네?”
백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그가 청난의 옆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연화는 그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 그들이 들어간 방문을 지켜볼 뿐이었다.
◈
백매가 눈 뜬 곳은 거대한 파도가 머리 위를 탐내는 험악한 바다 한가운데 위였다. 기이하게도 백매는 놀라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전쟁터를 겪어 온 장수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사존께 받은 푸른 검날이 우웅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검 손잡이를 잡아 단숨에 뽑아 들어 바다를 갈랐다!
파도 사이에서 거대한 인어가 두 덩이로 분리되며 퍼엉! 소리와 함께 바다 아래로 잠겼다. 그것의 피가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백매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 탓에 온몸이 붉게 물들어 축축해졌다.
와아아아아!
탄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역선으로 보이는 거대한 선상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 양손을 움켜쥐며 기도하는 사람, 심지어 넙죽 엎드린 사람마저 있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신선!”
“해상선인!”
백매는 그들이 부르는 이가 자신임을 알 수 있었다.
저벅저벅 계단을 밟듯 공중에서 내려왔다. 내디딜 때마다 등을 덮고 있는 망토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들은 저를 찬양하고 있었고, 모든 것은 영광스러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중요한 것을 잃은 너무나 슬픈 기분이 들었다.
‘맞아, 그분께서 계시지 않아.’
백매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명을 찾았다.
고아한 사람, 드높은 사람, 누구보다 돋보이고, 아름다운 그 사람. 그분.
그러다 문득 이상한 낌새에 느꼈다.
거침없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곧 우뚝 선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가 지나친 모든 곳마다 피가 즐비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던 자들은 핏속에서 그를 찬양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방해되는 인간들을 밀며 ‘그’를 찾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은 오직 온몸에 치장된 장신구의 찰랑거림뿐이었다.
“사존, 사존! 어딨어요? 어딨어, 청난! 청난!”
백매는 무서웠고, 불안했다. 결국 입 끝에서 터져 나온 이름을 뱉자,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얼굴 자체가 없었다. 찰흙으로 조형물을 빚으며 얼굴 부분은 시작조차 하지 않은 듯, 그 무엇도 없는 얼굴에 파여 있는 홈은 단 한마디를 뱉었다.
“그게 누구죠?”
“으악!”
악몽에서 깬 백매는 벌떡 일어나느라 위에 있던 촛대에 머리를 부딪히고야 말았다.
그는 거대한 파도도, 휘황찬란한 옷 장식도 없는, 그저 평범한 수사 화백매였다. 정수리를 매만졌으나 다행히도 둥근 혹은 만져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해는 어느덧 저물었고, 둥근 달이 희미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달을 보니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민간에 흔히 퍼져 있는 달에 사는 신선에 관한 이야기.
그가 바로 천명선인이다. 그가 적는 천명부에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것을 원하는 자가 너무 많아 천명선인은 속세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달에 거처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아침에 사존께서 말씀하신 천명궁이었다.
‘천명궁에서 가장 가깝다고 했지……. 지금 보니 달이 좀 크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꿈에서 시야도 높았던 것 같고…….’
백매는 생각을 이어 가던 차에 스스로의 회상에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존이 없다니, 무슨 그런 불길한 꿈이 있는가.
‘그게 미래일 리 없지. 개꿈을 꾼 걸 거야. 피곤하면 개꿈을 꾼다던데, 내가 피곤했나 보네. 탕에 몸이라도 담가야지.’
백매는 더러워진 옷을 훌러덩 벗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폭포 소리를 들었으니 노천탕이 있을 터였다. 백매는 깨끗한 천 자락을 허리 밑에 둘렀다. 예상대로 복도 끝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경쾌한 물소리가 귓가를 때려 왔다.
문을 열고 나오니 거대한 노천탕이 보였다. 시끄러운 폭포 소리의 근원지였다. 피어오른 김 탓에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진 않았지만, 폭포 아래에서 정신 수양이라도 하면 악몽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매가 거침없이 노천탕에 발을 담갔다. 얕은 곳의 수면은 고작해야 백매의 허벅지의 반도 올라오지 않았다. 물 안으로 들어오니 바깥에서보다 보이는 것이 많았다. 이 노천탕이 생각만큼 드넓지 않다는 것과, 바위가 제법 많으니 조심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먼저 와 있다는 것.
“……!”
먼저 온 손님도 백매를 발견한 것인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물살의 부력 따윈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그의 걸음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거침없었다. 곧 그자에게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 씻으러 왔느냐.”
그는 청난이었다.
청난은 어느새 백매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묶었던 긴 머리카락을 풀어 늘어트리고 물기를 머금은 단겹의 소복을 입고서. 그가 입은 옷은 굉장히 얇았던 데다가 물에 흠뻑 젖었으니, 청난의 몸이 고스란히 보였다.
“사, 사, 사존, 사존, 옷, 옷을 입으세요. 아니, 제자가 가, 가져오겠습니다!”
백매가 화들짝 놀라며 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땅의 사람이고, 이곳은 물속이니 그의 몸은 생각만큼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는 그만 발이 뒤엉키고 말았다.
몸이 기울어지며 가슴이 물에 젖기 전에 청난이 그를 당겨 안았다. 그 덕분에 백매는 물에 빠지진 않았으나, 청난을 적시던 물기가 그에게 옮아 왔다. 맨몸이었던 백매의 상체로 청난이 둘렀던 얇은 천 자락 너머의 살갗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