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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88)화 (88/111)

#88

청난의 발걸음은 연화문의 대문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이곳까지 걸으면서 아무런 생기도 소리도 느끼고 듣지 못하였다.

청난은 자신이 이토록 무덤덤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동시에 뒤늦게 찾아올 감정이 두렵기도 하였다.

연화문은 많은 문도들로 가득했었다. 그런 그들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었고, 그렇게 오랜 역사의 문파의 기록이 끊어질 위기에 봉착했다. 그것은 개인이 겪기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에 오히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 산문을 내려갔다가 내일 다시 올라오면 어제와 같은 풍경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청난은 대문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렇게 연화문을 벗어나서야 뒤에서 굳건히 서 있던 백매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백매가 그를 안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발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갔다. 청난의 귀에 나뭇잎 소리, 짐승 소리가 채워졌다. 청난은 일부러 그것에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이미 밤이 무르익은 지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기에, 당연하게도 산문 아래의 마을도 서늘하기만 하였다.

“오늘은 노숙을 해야겠구나.”

“문을 두드리면 사람이 나올지도 몰라요. 제자가 찾아보고 올게요.”

“응, 부탁할게.”

청난이 건물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백매는 그에게 덮어 주었던 피풍의의 매듭을 고쳐 묶어 준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백매가 떠나고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났다.

차분하던 청난의 손이 돌연 공중을 가르더니 죄 없는 벽을 타격하였다.

휙- 파악!

하지만 그 죄 없는 벽은 청난의 손보다 강인했던 탓에 피를 본 것은 되레 청난이었다. 손에 담긴 힘이 크지 않았으니 상처도 그리 깊지 않았다. 상처의 틈에서 새어 나온 피가 청난의 손을 따라 소매를 조금 적셨을 뿐이었다.

청난은 자신의 흰 소매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아, 백매가 걱정할 텐데.’

뒤늦은 후회였다. 아니, 아마 시간을 돌려도 똑같이 할 것이다.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으니까. 성인군자도 사람이고, 그는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어찌 참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화가 났다.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앗아 갔다. 더구나 그것은 헛된 죽음이 되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사형제고, 또 누군가의 제자들이었다. 청난은 자신을 찾아와 수련을 청하던 어린 제자들이 떠올랐다.

만약 청난이 다시 태어난 이후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수야각에 한 번이라도 찾아가 자신의 지식을 전했더라면, 그럼 그 아이들이 입문한 곳은 수야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을 뺏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청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탓에 겨우 멎었던 상처가 다시금 벌어지며 얇은 핏줄기를 내비쳤다.

이런 후회를 하는 건 청난답지 않았다.

그야 지금까진 잘못된 선택을 하여도 뒷받침해 줄 이들이 있었으니까.

“으읏…….”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찾아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목조차 가누기 어려웠다. 그 탓일까 청난의 시야가 요동쳤다. 오른쪽이 왼쪽 같고, 왼쪽이 오른쪽 같았다. 그것은 갈수록 심해지더니, 그의 눈동자 안에서 하늘과 땅이 뒤바뀌었다.

털썩.

청난의 가벼운 몸이 바닥으로 기울어졌다.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청난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화백매가 수야각에 입문한 지 십년이 된 해에 유회평이 은거하여 청난이 수야각주의 자리를 이었으며, 백매가 수야각의 소각주로 임명되었다. 거기에 연화문에서 승부욕을 느낀 것인지 한연화까지 연달아 연화문의 소문주가 되었다. 그 탓에 세 사람은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마른하늘 아래에 갑작스러운 벼락이 내리쳤다.

처음에 사람들은 잘못 본 것이거나, 요물의 장난질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니 재앙의 증조라 여기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황실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서둘러 제사를 지냈다. 다급해진 것은 수선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아무도 감히 입을 놀리지는 못하였으나, 온갖 기록들을 파헤쳐 그들의 짐작을 뒷받침할 증거를 수집했다.

그렇게 알려진 거의 모든 신들이 황실의 제사상을 받을 무렵이 되자, 수선계의 문파들이 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은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근 시일에 신선이 탄생할 것이오.’

청난이 약 백 년 만에 태어난 천영근이라는 것은 마지막 비승이 백 년도 더 된 일이라는 것이다. 청난의 영근이 밝혀졌을 때, 수선계는 이번 세대에 신선이 날 것이라며 기대감에 휩싸였었건만, 정작 이렇게 한 인사가 유명세를 펼치며 신선의 길목에 서자 그때와 같은 좋은 분위기가 감돌진 않았다.

누군가 신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상상도 못 할 거룩한 것이었고, 세속적이게도 그가 누구냐에 따라 문파에 오가는 액수의 단위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선계 안에서 서로 눈치를 보는 건 당연했다. 이 천겁의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천금의 기회에 비해서 양심의 무게는 다소 가벼운 모양이었다.

마른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은 천겁이라 하여, 그것은 인간은 이겨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겨 낸 자는 신선이 되나, 그렇지 못한 자는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청난을 비롯한 대부분의 수야각 제자들은 청난이 겁을 이겨 내지 못할 것이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직 백매만이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그들은 혹여나 겁에 말려들 이들을 걱정하였다. 때문에 수야각은 천겁의 주인이라 판단되는 진청난과, 마찬가지로 천영근을 가진 화백매를 당분간 교외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청난은 당장 떠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주먹보다 조금 더 큰 가죽 주머니를 들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법기로 그 내부는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굉장히 넓어 웬만한 것은 모조리 들어갔다.

청난은 우선 옷가지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가 한 벌의 옷을 넣으면, 백매는 수 가지의 물건을 가져와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이러다 방을 통째로 가져가겠구나.”

“아, 그래도 됩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안 된다.”

백매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사존께서 불편하실까 염려됩니다.”

“누가 들으면 나 혼자 떠나는 줄 알겠구나.”

“그렇지 않아서 기쁩니다. 하지만 놀랐어요. 제가 함께 가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 겁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에요.”

“네 것일 수도 있지.”

청난은 날이 갈수록 제 기분을 달래는 기술이 늘어나는 제자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웃음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의외라 생각했다. 연화문에서 한 공자를 보낼 줄은 몰랐어. 우리를 탐탁잖게 보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청난과 백매가 교외에 가기로 결정된 다음 날, 뜻밖에도 연화문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연화문에서도 같은 사항을 걱정하였으니, 자신들의 소문주가 동행해도 되냐는 말이었다. 수야각에서는 거절할 이유도, 명분이 없었으니 수락하였다. 그러자 한연화는 정말로 자신의 짐을 들고 수야각에 찾아왔다.

“제자가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그를 너무 밀어내지는 말고. 한 공자는 좋은 사람이니.”

“네. 그렇게 할게요.”

실제로 백매는 청난을 제외하면 한연화를 가장 편하게 대했다. 그는 수야각의 제자가 될 수 없었기에 자신 몫의 애정을 가로챌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준비를 모두 마친 청난은 업무를 인계하기 위한 마지막 회의에 들어갔다. 백매는 평소처럼 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나무 아래에서 운기조식을 하며 그를 기다렸다. 백매가 눈을 감고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연의 영기를 느끼던 중, 그의 귓가에 찰랑하는 금속 소리가 명확히 들려왔다.

백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한 공자.”

“사존께서는 여태 일하시는 중이신가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다른 자들이 오해합니다.”

“여긴 화 공자밖에 없어 다행이죠.”

백매는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백매는 다른 이를 대할 땐 눈 끝을 내리며 유한 표정을 지었는데, 유독 연화와 단둘이 있을 때면 무심한 표정을 낱낱이 드러냈다.

“연화문주는 어떻게 설득한 거죠?”

“사실……. 음, 보내 주지 않는다면 굶겠다고 했어요.”

“어린애.”

“저희가 겨우 한 살 차이란 건 알고 계신지요?”

연화는 싱글싱글 웃으며 백매가 기댄 나무의 반대편에 가 앉았다.

그리고 백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입꼬리가 내려앉으며 그의 표정에는 순식간에 암울함이 내려앉았다.

십 년 전과 달라진 것 중 하나는 바로 연화와 백매가 어검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청난의 가느다란 칼날은 세 명을 지탱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검술 또한 실력에 좌우되는 만큼 그들의 어검 속도가 매우 빠른 덕분에, 날이 저물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장소에 선 연화는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이곳은…….”

“사람을 피해 온 것인데 아무것도 없는 게 그리 이상한 것이냐?”

“하지만 사존, 며칠을 묵을지 모르는데, 너무 허전하지 않나요? 갑작스러운 상황도 아니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것인데…….”

연화의 의아함은 당연했다. 그야 반나절 내리 날아서 온 곳이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라면 누구든 의아해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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