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청난은 이 순간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저와 묻고 답하던 아이가 가루가 될 리 없지 않은가.
“아가!”
청난의 부름에 소년이 뒤를 돌아본 순간, 그의 벌어진 입술이, 코가, 그리고 눈망울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풀썩.
소년을 감싸고 있던 옷가지가 땅에 떨어지며 청난에게 현실감을 돌려주었다.
청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것은 청난이 떠나보내는 첫 이별이었다.
“사존.”
어느새 다가온 백매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청난은 마침 다리에 힘이 풀리려던 차였기에 그의 몸에 자신을 기대었다. 백매는 그가 충격을 받아 마음이 상했을까 걱정되었다. 이분의 정이 많은 성격은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기에.
하지만 청난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짊어진 것들이 많았기에 감정을 견디는 일에 익숙했다. 이토록 큰 것을 감내한 적은 없었지만, 다행히 슬픔만큼이나 찾아온 분노가 그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는 손을 기울이며 그 위에 남은 잔재를 흘려보냈다.
“들어가자꾸나.”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아 보이더냐?”
“음…….”
백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청난은 그의 머리카락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뻑뻑함이 없어 마치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근 것 같았다. 그가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의 청난이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겠지.
‘괜찮다. 스승은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 말거라.’
하지만 지금의 청난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에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조금 지치는구나. 돌아가면 한 달은 잠만 자고 싶어.”
백매는 스승의 대답이 그나마 반가웠다. 무리하는 그를 보며 마음 졸인 나날이 몇 달이었는가. 수백 년을 살면서 그와 함께 지낸 몇 달만큼 두려움에 살던 날도 없었다.
청난은 백매보다 반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백매는 그의 등보다 흔들리는 손에 눈길이 갔다. 이제는 저 손에 머리를 기대기엔 너무 자라 버렸다. 조금만 더 늦게 자랄걸. 삼백 년째 같은 후회 중이었다. 백매는 시선을 청난의 얼굴로 돌렸다.
“그럼… 제가 가끔 찾아뵈어도 될까요? 휴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청난이 시선을 돌려 백매와 마주 보았다. 피곤함이 역력한 눈빛으로 살며시 웃는 청난의 미소는 퍽 처연해 보였다.
“굳이 그러지 말거라. 그냥 내 옆에 있어 다오.”
백매는 힘없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여려져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이유가 없기도 하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좋아.”
청난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었다. 어느새 그들은 발걸음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연화문주의 처소는 깊었기에, 열어 둔 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만으론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굳이 보고 싶지도 않았기에 옅은 빛에 의지해 걸었지만, 어느 정도 들어오니 그마저 닿지 않았다.
‘후…….’
청난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매아야.”
“네, 사존.”
백매는 청난이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의 손끝에 모여든 빛은 곧 건물 안을 밝게 비추었다.
그 덕분에 청난은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래, 또는 가루. 마치 사막을 옮겨 놓은 것처럼 사방이 그것으로 가득 찼다. 방금 전 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 무엇일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이 묻힌 것일까.
청난의 얼굴이 구겨졌다.
긴 옷자락을 잡아 들며 사뿐히 걸어 보려 하였지만, 조금 밟으나 많이 밟으나 어쨌든 유해를 밟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을 이미 보았댔지.”
“네, 맞아요.”
“그렇구나.”
청난의 말은 그렇게 끊겼다. 바닥이 불편하여 걷는 데에 집중하느라 그러는 척하지만, 백매는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탓이란 걸 알았다. 때문에 그가 이대로 아닌 척할 수 있도록 애써 부축하지 않았다.
짧지 않은 복도를 지나자 그제야 몇 개의 문이 보였다. 그 앞에 선 청난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문을 젖혔다. 아마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큰 소음이 났겠지만, 이 문틈에도 가루가 가득 끼어 있어서 드르륵드르륵 불쾌한 소리만 날 뿐이었다.
청난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아, 화나셨다.’
백매가 아까처럼 문을 대신 열어 주었다. 아까의 문은 홈이 난 곳이 짧아 청난과 손을 겹쳐야 했지만 이 문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른 문을 열었다고 하여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방 안을 채운 것은 오직 흩날리는 작은 입자들, 그리고 누군가 입고 있던 듯한 옷가지뿐이었다.
사용하고 남겨진 술진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기어코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하였나 보구나.”
빠득.
청난이 이를 갈았다. 결국 청난의 분노가 표정에 드러났다. 화나면 얼굴이 붉어진다고? 그것도 어느 정도일 때나 그러했다. 지금 청난의 모습엔 평소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사람도 죽일 듯한 싸늘함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청난이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갔다.
“이 실험이 성공한 듯 보이느냐?”
문가에 서 있던 백매는 뒤늦게 그의 뒤에 붙어 섰다.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자가 생각하기엔 실패한 것 같아요.”
“그렇지. 그가 원한 건 풍화 따위가 아니었을 테니.”
지금까지 그들이 발견한 것들은 융합, 또는 손상을 입고도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의 흔적이었다. 청난은 이제껏 보고 겪은 것을 분석하여 범인, 즉 사귀는 영근 이식 실험을 하는 것이라 추론하였다.
‘그리고 방금 전 확신을 가졌지.’
영근이 없던 이가 이식받음으로써 하루아침에 수선자가 될 수 있던 것이다. 다만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이겠지. 그 아이도, 이곳에 있던 자들도.
그렇게 연화문주의 처소를 모두 돌아보았다. 어딜 가든 비슷한 광경이었고, 그 결과 청난은 이곳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본 곳은 과거 청난이 이 처소에 들어왔었던 주된 이유였던 접견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인연들과 내일을, 미래를 염려하며 거래를 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젠 이곳도 무인총에 불과할 뿐이었다.
“한연화를 찾아 주겠니.”
“네.”
백매는 조금의 지체 없이 대답하고는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사존께서는 그가 범인이라 생각하시나요?”
“……적어도 새로운 단서는 얻겠지.”
후, 청난은 짧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올 때와 달리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청난의 거침없는 발걸음은 연화문주의 처소를 벗어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연화문 안에는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당초 폐가였던 것처럼.
청난은 한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는 방금 빤 듯 축축한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예 있느냐.”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수사는 잠귀가 밝은 편인데도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 없었다.
“실례하마.”
청난은 신을 벗지도 않고 터벅터벅 들어갔다.
백매는 아무렇게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도복을 볼 수 있었다. ‘해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매가 가볍게 손짓하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도복을 날려 버렸다. 백매는 그제야 청난을 따라 문지방을 넘어갔다.
청난은 문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백매는 그의 옆에 서자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썩은 고기 냄새가 잔뜩 나고 있었다.
청난은 한 손으로는 코를, 다른 손으론 백매의 손을 움켜잡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백매는 이번에는 굳이 냄새를 날리지 않았다.
청난이 한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은 날벌레들이 문을 넘어 튀어나왔다.
“으윽!”
청난이 정신없이 손을 휘저었다. 매서운 겨울바람과 청난의 가벼운 손바람에 휩쓸린 날벌레들은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겨우 탈출하였고, 청난은 그제야 방 안을 볼 수 있었다. 그 바람은 백매가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타고 넘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창문은 밝은 달빛마저 불러들여 침상을 비추었다.
연화문주의 처소에서 본 것과 다른 풍경이었다. 이곳 또한 살아 있는 생물이 없었다. 하지만 형체는 남아 있었다. 삐쩍 마른 시체 같은 모양새로 말이다.
백매가 제 스승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의사 표현을 하기에도 지친 것인지 그저 이마 사이를 움찔거릴 뿐이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곳에 있던 자들의 것을 뺏은 모양이구나.”
“수계 영근을 가진 자들에게서 추출해 그렇지 않은 자에게 이식한 모양이에요. 둘 다 버티지 못한 거죠. 추출되는 자의 생사를 상관할 이유가 없으니 막무가내로 가로챈 걸지도 모르고요. 사존, 계속 더 보실 건가요?”
백매는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길 바랐다.
사실 백매는 인간의 죽음에 무감각한 편이었다. 인간이었을 때 타인에게 무덤덤하였던 것의 연장선이기도 하였지만, 적어도 네 세대를 살았으니 그동안 본 죽음이 수없이 많기도 하였다. 인간이 신을 가장 간절히 바랄 때는 목숨이 달렸을 때가 아니던가.
하지만 청난은 인간이었다. 그것도 매우 정이 많은. 백매는 그가 지금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청난은 고개를 저었다. 백매가 그의 양어깨를 감싸 안았다.
“피곤하시죠? 제자가 모실 테니 주무시는 건 어떠세요?”
“아니. 여기서 잠든다면 악몽을 꾸지 않겠느냐. 나가자꾸나.”
청난은 그의 품을 벗어나 들어왔던 문으로 향했다. 백매는 그가 얇은 선 위를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