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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85)화 (85/111)

#85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가. 그것은 시각이나 학문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청난은 어쩐지 백매를 전처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청난은 혼란스러웠고, 이 혼란 속에서도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매아는 언제 오지.’

그와 단 차를 마시며 오늘 본 달빛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다 은근하게 지금 떠오른 이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는 제 고민을 풀어 줄 것 같았다.

청난의 속눈썹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왔다. 하필 달빛이 아름다운 날이었기에, 그 모습은 꽤나 슬픔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소년은 당황하여 주절주절 아무런 말이나 뱉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죠! 그렇죠? 하하하. 저희 부모님도 태사숙에 비해선 어리시니까 태사숙께서 더 잘 아시겠죠? 그, 그리고 저는 어리잖아요? 그래서 그런 건 잘 몰라요. 잘못 기억하는 걸 수도 있고요. 그러니 제 말 같은 건 귀담아듣지 마세요. 네? 하하…….”

청난은 이미 고민에 빠져 표정이 바뀔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년은 이 방법은 적절한 것이 아닌 것 같아 아예 주제를 바꾸었다. 그가 좋아할 만한 주제로.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 주제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백매선께서는 다시 들어오신대요?”

“……글쎄다. 잘 모르겠구나.”

“왜 갑자기 나가신 거예요?”

“……글쎄, 스승도 모르겠구나.”

어째 이 아이는 대답하기 힘든 질문만 골라 하는 것일까. 소년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다시피 하였지만, 그럼에도 상관없던 것인지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등불은 켜지 않을게요. 상선께서는 불이 없으셔도 되실 테니까요. 아직 축시이니 좀 더 주무세요.”

“그래, 푹 쉬거라.”

시종 소년이 부지런하게 문을 닫으니 청난의 시야는 다시금 어둠에 휩싸였다. 잠을 방해할 소음도 빛도 없었으나, 청난은 전처럼 바로 잠들 수 없었다.

‘제자를 곁에 두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청난의 머릿속은 방금 전 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탓에 단 한 번도 제자를 떠나보낸 적이 없었다. 목숨을 잃는 것뿐 아니라, 하산하거나 혹은 한 사람의 수사로서 제 품을 벗어나는 것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첫째인 백매는 그러기에 충분한 인재였으나 그러지 않았고, 둘째 제자부터는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청난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아이들이 지금 제 곁에 있었다면, 그들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아니, 아닐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자신의 길을 가라 부추기지 않았을까? 청난은 인재를 이끄는 스승이 되고 싶었지, 제 시중을 드는 아이들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백매가 떠나는 건 서운한 걸까. 청난은 아예 일어나 침상 머리에 등을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그를 떠올려 보았다.

그가 저를 불렀을 때를, 축 처져 있거나, 제 손을 잡고 싶어 꼼지락대던 때를. 그럴 때면 청난이 먼저 손을 뻗어 잡았었다. 청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시간을 되돌아가니, 선계에서 제 앞에 나섰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큰 뒷모습이.

저를 돌아보던 그의 옆모습이, 그의…….

청난은 이불을 제 머리 위로 휙 올려 덮었다.

“미, 미쳤는가. 진청난… 어찌 제자를 두고 그런 망측한 생각을 해? 아니야, 아니다. 그럴 리 없지. 제자다. 제자야. 그저 어릴 때부터 봐 온 제자다.”

청난은 염불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열 살일 때부터 제가 키우기 시작했다. 그 눈 속에 묻혀 있던 시절부터! 그때도 참 귀여웠지…….

“…….”

팍!

청난이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저는 그에게 그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되었고, 그 또한 그럴 것이다. 그것이 맞다.

그가 내게 가진 감정은 부모를 향한 것이고, 저 또한 자식을 향한 것일 터이다. 그래야 했다. 그것이 맞다.

“하아…….”

청난은 속이 답답해졌다. 스스로를 말아 놓은 이불을 치워 버리고 침상 아래로 내려갔다. 여전히 방 안은 어두컴컴했던 탓에 청난은 벽을 짚어 가며 문을 찾아가야 했다.

문을 여니 여전히 달빛이 아름다웠다. 참 때도 안 좋다. 왜 이런 날 저렇게 황홀한 달이 떠올라서 제 감정을 휘젓는 것일까.

청난은 시종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신을 신었다. 바람을 쐬면서 마음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연화문은 전생에도 여러 차례 왔었지만 이렇게 안쪽까지 들어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은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화려해진 정도일까. 그렇겠지. 돈이 많아졌을 테니. 또한 달라진 게 있다면 연못에 연꽃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냥 생긴 정도가 아니라 꽤나 많아 연못을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이는 연화를 위한 것이겠지. 연화는 연꽃을 좋아해 스스로 이름도 바꿀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너무 과하지 않나…….’

이쯤 되면 연못이라기보단 연꽃밭에 가까웠다. 청난은 문득 저 아래에 숨겨진 연못 물이 어떨지 궁금해져 다리를 굽혀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청난이 연꽃 한 송이에 손을 가져가던 찰나에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난은 손을 멈추고 그 방향에 귀를 기울였다.

“끄으응… 거기, 거기 좀 더 잘 들어 봐.”

“열심히 들고 있어. 어쩔 수 없단 말이야. 사형의 물건이 이리 많을 줄 알았겠어?”

야밤에 누가 도둑질이라도 하는 걸까. 청난은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범인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두 아이들이 하나의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각종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얼마나 자잘하고 많던지, 그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듯한 물건이 하나씩 떨어져 있었다.

청난의 발아래에도 옷가지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청난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연화문복이었다. 새것은 아니었고, 누군가 쓴 듯한 사용감이 있었다. 청난은 그것을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예서 무얼 하느냐?”

두 아이는 그제야 누군가 왔음을 알고 한 번에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소문 무성한 삼백 년 전 수사의 환생인 진청난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흠칫 놀라 다급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 탓에 그는 상자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그것의 무게는 다른 아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상자는 바닥을 뒹굴며 속 안에 든 것을 우르르 뱉었다.

“…….”

“…….”

정적 끝에 포권을 취했던 아이가 소리를 높였다.

“그, 금방 치우겠습니다!”

“괜찮다, 괜찮아. 내가 도와주마. 그보다 다들 깰 테니 좀 더 조용히 하는 게 좋겠구나.”

“죄, 죄송합니다……. 그, 그게…….”

“괜찮아. 그보다 물건들이 더러워져 곤란해지겠구나.”

청난이 허리를 숙여 하나둘 물건을 집어 들자, 얼떨떨하며 바라보던 아이들도 허겁지겁 무릎을 바닥에 대고 함께 집어 들었다.

쏟아진 것들은 도복과 나삼 같은 옷가지뿐 아니라, 검과 장신구, 그리고 베개까지 다양하였다. 그것들은 모두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였다. 누가 방을 옮기기라도 하는 걸까. 쏟아진 것들을 모두 주워 담자 청난이 물었다.

“이것들을 어디로 가져가는 것이냐?”

“아, 창고로 가져갑니다!”

“창고에? 주인이 있는 물건들 같은데…….”

“맞아요. 하지만 이젠 없어요. 상 사형이 도망갔거든요.”

“도망가?”

청난은 자신이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났으니 말의 뜻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연화문 안에서만 쓰는 은어일 거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의문에 못을 박았다.

“네, 상선께서 계시면서 수련 강도가 좀 더 세졌나 봐요. 그래서 도망가는 사형들이 많아요. 특히 요즘은 더 늘었지?”

“응, 맞아. 서관에 자주 오시던 강 사형도 수행 단계를 크게 증진하셨다며 장로님과 면담까지 하더니 그날 밤에 바로 사라지셨잖아. 엄청나게 어려운 가르침을 받아야 해서 겁먹으신 게 분명해.”

“맞아, 맞아. 얼마나 부끄러운지 연락 한번 없으시잖아.”

하산도 아니고 야반도주라니…….

청난은 황당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떤 수사가 야반도주를 하는가? 더구나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청난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였다.

아무리 잘못된 가르침이 전해진다 하여도, 삼백 년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선대들의 늠름한 뒷모습을 보고, 그들의 전설을 들으며 자랐을 무인들이 수련이 무서워 도주를 한다니. 하나둘이면 예외적이라 하겠으나, 그 수가 많다면 다른 원인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쩐지 이 시대 제일 문파치고는 문하생이 적다 싶었더니, 다들 ‘도망’친 탓인가 보구나.’

지금껏 도망친 수가 몇이나 될까. 청난의 눈빛에 싸늘함이 깃들었다.

아이들은 그가 풍기는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그가 가만히 있으니 곤란한 부분이 있겠거니 싶었다.

“태사숙, 길을 잃으신 건가요? 저희가 안내해 드릴게요.”

“맞아요. 저희 길 잘 알아요.”

“아니다, 괜찮아. 밤 산책을 하고 있었을 뿐이란다. 너희는 야심한 밤에도 고생이 많구나. 어여 들어가 자거라.”

“헤헤, 뭘요. 이게 다 사문을 위한 일이죠! 지금 일하고 아침엔 수련을 해서 태사숙처럼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수사가 되고 싶어요.”

“흐으음… 내 이름이 어떻게 남았느냐?”

청난은 아이들을 어서 돌려보내고 주변을 살필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릇 무인이란 후대의 평이 궁금하기 마련이었다. 어찌 청난이라고 그러지 않겠는가.

“‘용맹하고, 협의가 넘치며 그 기개만으로 삼만 대군을 쓰러트린다!’라고요.”

청난은 두 눈을 끔벅였다. 사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자들의 무용담에는 언제나 따라붙는 것이 ‘용맹’, ‘협의’였다. 그런데 기개로 물리친 대군이 삼만이라는 저 정확한 숫자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반신이라고 불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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