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음…….”
청난의 두 입술이 벌어지더니, 아무 소리 없이 다시 맞물렸다. 그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소리를 내었다. 백매는 그의 대답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아니, 전혀 기억나지 않아. 누굴 만난 것 같으면서, 아무것도 없던 듯하다. 이리 생각하니 개꿈이었겠구나. 이 노부를 누가 찾아올까. 그리고 널 안은 것은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 아니야.”
“그럼 잠자리가 불편하셨는지요?”
“애야, 네가 반가워 그런 게 아니겠더냐. 내가 널 안는 것이 부적절하느냐?”
“아, 제자의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되느냐, 안 되느냐?”
“물론… 됩니다. 제자의 품은 물론, 모든 것이 사존의 것인걸요.”
백매가 시선을 돌리었다. 청난은 평소처럼 부끄러워 그렇다고 생각하였는데, 그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았다.
“무얼 그리 머뭇거리느냐? 이번엔 네가 털어놓을 차례구나. 이 스승에게 뭐든 말하려무나.”
“그것이… 제자가 감히 청하옵니다.”
백매가 양손을 모아 거의 절하듯 허리를 숙였다. 그는 많은 것에 과하게 소극적이었으니, 청난은 그저 그를 달랠 생각만 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퍽 충격적이었다.
“부디, 제자를 헷갈리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똑똑하지 못해서 사존의 진심을 오해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
청난은 무언가가 머리 위로 쿵 떨어진 것 같았다.
그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결과, 마치 구멍 난 둑에서 물이 흐르듯이 청난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구멍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널… 헷갈리게 했다고……?”
백매는 그 말에 마땅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한 것 같았기에 그저 벌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때문에 청난은 자신이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내가 헷갈리게 해? 무엇을? 이 아이는 대체 무엇으로 오해한 거지?’
청난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의문에 의문이 이어지느라 바빴고, 백매는 반성하느라 바빴으니 그들 사이에는 정적만이 이어졌다. 백매가 무르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였을 때, 청난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이 또한 청난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오고 만 것이었다.
“무엇이라 오해하였는데?”
청난의 파도치는 눈동자가 백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침 백매 또한 청난을 바라보았기에 두 시선은 마주칠 수 있었다.
백매의 눈동자는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탓일까, 청난은 마치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본 것 같아 순간적으로 황홀감이 고개를 드리웠다. 그에 비해 백매는 청난의 눈동자를 감상할 틈이 없었다.
백매는 어깨를 들썩이며 깜짝 놀라 숨을 멈추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제자가 그만 망언을……! 자, 자, 잠시 산책하고 오겠습니다!”
백매가 청난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쌩하니 나가 버리고 말 줄은 청난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청난은 얼떨떨하였으나, 혼자 남겨진 덕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였는지 곰곰이 되짚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청난은 제자리에서 눈을 깜박이며 그가 떠나고 남은 빈자리를 눈에 새겼다. 치고 올라온 다른 감정 때문에 그를 쫓아갈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어……. 왜 서운하지?”
불현듯 찾아온 감정에 청난은 당황하였다. 청난은 비어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쥐었다 폈다 하였다.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내 곁에서 뛰쳐나간 건 처음이던가…….’
늘 자신의 곁에 붙어 있고 싶어 하였으니, 다시 태어나기 전까진 고개를 돌리면 그 아이가 있는 것이 당연했었다. 어느새 그의 존재에 또다시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애가 너무 자라 버렸나…….’
자식이 출가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다더라. 수선을 하지 않는 친척에게 그런 부모의 감정에 대해 몇 번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공감하진 못하였다. 제자와 자식의 차이 탓인가.
백매가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 소년이 문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가, 아직 안 자고 있었느냐?”
“태사숙을 보필하는 것이 제 일인걸요. 소리가 나 와 봤어요.”
시종은 크게 하품을 하며 청난의 침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뜨긴 한 건가 싶을 정도로 감겨 있었다. 분명 자신과 백매가 이 아이를 깨운 것일 거다. 시종 소년은 침상을 더듬거리더니 청난의 손을 발견하자 그것을 꼭 쥐어 엄지로 꾸욱 꾸욱 눌러 대었다.
“저리신가요? 제자가 안마해 드릴게요.”
자신의 업무에 성실히 임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청난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 몇 초도 되지 않아 방금 전 일이 떠올라 입꼬리가 축 처졌다.
“아가는 부모님이 계시느냐?”
“네. 산 아래 계세요. 그래서 이따금 허락을 받고 내려가 하룻밤을 보내다 와요.”
“네가 연화문에 올 때 뭐라지 않으시던?”
“음…….”
소년이 지난날을 떠올리자 어느새 손이 멈추었다. 소년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턱을 긁으며 대답하였다.
“처음엔 말리셨어요. 위험하다고요. 제가 연화문에 오기 전에 근처 마을에 피해가 컸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수사가 되어 나쁜 요마를 다 없애 줄게!’ 그랬더니 허락해 주셨어요! 음…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마지막 날에 조금 슬퍼 보이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다들 좋아하세요. 마을 사람들에게 제 자랑도 엄청 하셨대요!”
손이 자유로워진 소년은 그때의 일을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난은 마음 한편에서부터 피어나는 감정을 잊을 정도로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렇게 일 각 정도 지났을까. 소년이 옆집에 사는 바둑이가 두 마리 새끼를 낳은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그는 문장을 마무리 짓지도 않은 채 말을 툭 끊고는 청난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청난은 그 귀여운 모습에 고개를 기울이면 나긋하게 물었다.
“그래서, 바둑이 새끼는 이름이 무어지?”
“태사숙, 방금 하신 이야기는 해류진군 때문인가요? 제가 집을 나온 얘기요.”
그의 말은 뜬금없는 것 같았고, 또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도 같았다. 소년의 연극을 즐겁게 감상했더니 그사이 마음이 가뿐해진 청난은 여느 때 같은 여유로운 낯으로 살풋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낯은 어떤 표정보다 청난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어서, 그의 미모를 한껏 돋보이게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두운 밤중이고, 이 소년은 미색엔 문외한이었으니 그저 청난과의 이야기를 즐길 뿐이었다.
“그렇단다. 어찌 알았느냐.”
“태사숙께서는 해류진군에 관해서는 조심스러워지시니까요.”
“내가 그랬어?”
“네! 그분의 소식을 물어보실 때마다 고민하시잖아요. 제자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씩씩한 소년과 달리 청난은 퍽 당혹스러웠다. 그 말을 들으니 그랬던 것 같다.
“그거야…….”
그거야… 왜 그랬지? 청난은 지난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재활을 위해 늘 비슷한 일과를 보냈다. 일어나면 차를 마시고, 옆에서 재잘거리는 소년과 대화하다가 묻는다. ‘백매는 왔느냐?’ 그리고 연화문의 장로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와 또 차를 마셨다. 그리고 또 물었지. ‘백매에겐 소식이 없느냐?’ 그러다 밤이 되면 ‘푹 쉬거라. 매아가 들어오면 깨워 주겠니?’
“…….”
왜 그랬지? 청난은 과거 자신의 의중을 짐작하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이 순간을 기다린 양 소년이 번쩍 손을 들어 청난의 시선을 끌었다.
“바로 지금처럼요.”
“이건 매아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럼 무얼 생각하셨나요?”
왜 백매를 생각했었는지 고민했지.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려던 청난은 이 또한 결론적으론 백매 생각임을 깨달았다. 민망함이 치고 올라와 청난의 낯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매아 생각을 했구나…….”
“제 말이 맞죠?”
소년은 대단한 업적을 세운 듯 코를 천장까지 우뚝 세웠다. 그동안 청난은 표정을 갈무리하였다. 당황스러웠던 백매와의 대화부터부터 소년과의 놀이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새 잠잘 생각은 달아나고 말았다. 마침 달빛도 밝았으니, 청난은 반쯤 열렸던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혀 온몸으로 은은한 빛을 받아 내었다.
“그렇단다. 어찌 알았느냐?”
“태사숙께서 그리 중히 여길 만한 사람은 백매선뿐이니까요.”
소년은 손가락을 꼼지락대었다. 청난은 이런 어린아이들의 표정은 꽤나 봐 왔다.
“하고 싶은 말은 하려무나. 절대 널 탓하지 않아.”
소년이 입술을 조물조물거리며 청난의 눈치를 보았다.
“그… 저, 해류진군은 태사숙보다 오래 사셨잖아요. 몸집도 더 크시고, 더 많은 걸 경험하셨겠죠? 신선이시니 분명 강하시고요!”
“…….”
“제 부모님께서 그러셨어요. 부모는 아이를 보낼 때를 아는 법이라고, 알면서도 놓지 않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고요. 하지만 제가 본 태사숙은 전혀 이기적이지 않으셨어요. 태사숙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런데도 저희보다 해류진군을… 아,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저는… 태사숙께서 해류진군을 그저 제자로만 보시는 건 아니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난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생전 처음이었다. 사실, 지금까진 그에게 이런 솔직한 말을 할 사람이 없기도 하였다. 청난이 조금 더 눈치가 좋았다면, 지금까지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이 머뭇거리며 차마 못 했던 말들을 진작에 알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였다.
청난은 그제야 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단순한 솔바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