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청난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연화선을 동경하는 건 좋아. 정말 좋지. 하지만 그의 힘을 동경하진 말아라. 영광을 동경하도록 해. 먼 옛날에는 쌍영근임에도 천영근에 비할 명성을 가진 수사들이 여럿 있었다고 하는구나. 너희가 원한다면 내가 너흴 도와주마. 어때?”
아이들은 다시금 서로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해성이 흔쾌하게 말하였다.
“이 사형이 비밀을 지켜 주마.”
“당연하지. 사제들이 걸리면 우리도 같이 걸릴 테니까.”
“하하하. 혼나면 내가 도와주마. 설마 손님을 앞에 두고 너흴 다그치겠느냐?”
“좋습니다. 약속하셨어요, 태사숙.”
청난과 두 사형이 하하 호호 장난을 주고받는 모습은 어린아이들의 긴장을 덜어 주었다. 그중 청난에게 발끈하던 아이는 두 눈을 질끈 감다가 손을 들었다.
“그… 그 비밀 꼭 지켜 주셔야 해요! 저희 사존께서 아신다면 제 다리를 부러트리시고 말 거예요…….”
“좋아.”
청난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또 다른 아이가 손을 들었다.
“저도요! 제 사존께서는 밥을 굶기실 거예요. 절대 아시면 안 돼요!”
“저도요! 저도요! 전에는 객께 도움을 받았다고 일 주나 수련에 나가지 못하게 하셨어요.”
“좋아, 좋아. 알았다. 내가 너흴 지켜 주마. 아가야, 나가서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 전해 주겠니.”
“네!”
청난이 시종을 돌아보며 부탁하자, 그는 당차게 대답하고는 곧장 뛰어나갔다. 그는 배움의 열기에 취하여, 청난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라는 연화문주의 명은 이미 한참을 뛰어나가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시종 소년이 헐레벌떡 돌아왔을 때는 일곱 제자는 물론이고, 방 안에 있어야 할 청난까지 온데간데없었다. 연화문주의 호통을 떠올리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소년의 귓가로 안채에서부터 흘러나온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다급하게 그곳으로 뛰어가 광경을 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잘 다녀왔어?”
청난이 자신의 옆을 토닥이며 그를 찾았다. 소년은 지치기도 지쳤기에 그의 호의를 받아들여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 시선의 맞은편에는 일곱 명의 소년 수사들이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네에……. 태사숙 곁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제 비밀도 지켜 주시면 안 되나요?”
“좋아, 그렇게 하마. 혹시라도 누가 보았다면 내가 혼을 내며 시켰다고 하거라.”
“네!”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근처에 놓인 아무 책을 집어다 청난에게 바람을 부쳐 주었다. 청난은 그늘 아래에 있었지만, 마침 뜨거운 바람이 불편하던 찰나였다. 청난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수련 중인 아이들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잠깐 고개를 돌려 시종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속성을 가졌느냐?”
“저는 수사가 아니에요. 지금의 전 수사가 될 수 없대요. 그래서 잡일을 도우며 수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냐.”
소년은 예습이라도 하려는 건지 눈을 밝히며 수련 중인 사형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청난 또한 허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청난의 머릿속에는 지울 수 없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가 말했듯, 수선할 수 있는지는 태어날 때 정해지는 법이다. 지금 수사가 될 수 없다면, 몇 년이 지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혹시 연화문이 거짓부렁으로 어린아이들을 부리는 걸까. 걱정이 일었다.
‘연화에게 물어볼 게 늘었네.’
“피해자들은 어떠하느냐.”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을 건넸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비밀스러운 접견처럼 보일 법도 하였다. 물론 한쪽이 어린아이였으니, 잘해야 자객놀이 정도로 보일 테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해류진군께서 안고 오신 그 공자도요. 의원께서 특히 그 공자께 신경을 쏟고 있는데도 차도가 없다고 하셨어요. 마치 태사숙 같대요. 열흘간 누워 계셨었잖아요. 그때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대요.”
“그렇구나.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리고 그 현장 조사가 곧 끝날 거라고 하셨어요. 문주께서 태사숙께도 보고서를 전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너무 오래 쉬는 게 아닌가 하였는데, 다행이야.”
소년은 청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느냐?”
“태사숙께선 쉬고 싶지 않으세요? 아무리 요마가 기승을 부린대도 십 년이나 이랬잖아요? 저는 평화롭던 시절은 이제 기억도 안 나는걸요. 태사숙께서 하루 이틀 더 쉬셔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다 몸이 상하실까 걱정돼요.”
“음… 네가 보기에도 그리 걱정되느냐? 열흘 동안이나 자고 일어났는데도?”
“물론이죠. 열흘이나 누워 있던 분이 막 돌아다니시는데 왜 걱정이 안 되겠어요.”
‘막 돌아다니진 않았는데…….’
청난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취미가 없었으니 적당히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럼 매아도 걱정할까?”
“해류진군 백매선을 말씀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분은 태사숙의 수제자니까요. 태사숙이 깨어나시기 전까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을 지키셨어요. 늘 태사숙의 몸 위에 기대어 계셨죠. 이렇게요.”
시종 소년은 청난에게 가까이 붙더니 그의 가슴께에 몸을 바짝 붙였다. 청난의 옷이 그의 귀를 납작하게 눌렀다. 소년은 마저 말을 잇기 위해 금방 몸을 떼어 냈다.
“정말 슬퍼 보이셨어요. 태사숙의 붕대를 갈아 드리러 오는 제 발소리도 못 들으셨다니까요?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셨던 걸까요?”
소년이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청난은 방금 전 소년이 몸을 기댄 곳에 손을 짚었다. 그곳 아래에서는 그의 심장이 맹렬히 뛰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욱 거센 것 같았다.
두근두근. 청난은 자신의 심장 소리에 온 귀를 집중했다. 그 사이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난이 한참을 그러고 있자 소년이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태사숙, 어디 안 좋으세요?”
시종의 말에 수련 중이던 일곱 쌍의 눈동자까지 청난을 향해 돌아봤다. 청난은 깜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다. 성아, 결을 그렇게 맺으면 안 된다.”
청난이 일어나 제자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는 해성의 자세를 고쳐 주면서 다른 아이들을 일일이 돌아본 후에야 다시 그늘 아래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기에 시종 소년은 다시금 손을 놀렸다. 소년은 입 또한 재가동시켰다.
“백매선이 보고 싶으신 거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청난은 당황하였다. 청난은 소매 끝으로 땀을 닦으며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겠느냐.”
소년은 청난의 표정을 뚫어져라 살피더니 곧 활짝 웃었다.
“어서 오시면 좋겠네요! 그땐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게요. 두 분끼리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도록요.”
“고… 맙구나……?”
청난이 얼떨결에 대답하자 시종은 신이 나서 청난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제자들은 늦은 밤이 돼서야 각자의 침소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 즈음에 청난이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냐 물었었는데, 그들의 사존, 사숙들은 업무가 바빠 그들을 신경 쓰지 못하고, 그 탓에 제자들은 독학한 지 한 달 정도 되었다고 하였다. 덕분에 청난의 마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청난은 피로해진 몸을 추스르며 머리 끈을 풀어 내었다. 그는 한 장의 나삼만을 입고 있었다. 그가 침상 위에 오르자 시종이 다가왔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오냐.”
시종 소년의 입바람에 등불이 꺼지며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바깥에서 흘러온 은은한 달빛이 눈앞에 건들거렸다. 소년이 총총대는 걸음으로 지나가며 부드럽게 창살문을 닫자 그나마의 불빛도 꺼져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 왔다.
‘내일은 매아가 올까.’
청난이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며 두 눈꺼풀을 닫아 내자, 잠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흐으윽… 하으… 헉!”
컴컴한 방 안을 채우던 힘겨운 신음 소리는 청난의 두 눈이 떠짐과 함께 사라졌다. 청난이 여태 진정되지 못한 숨을 달래고 있자, 그의 머리 위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존, 악몽을 꾸셨나요?”
청난은 문틈으로 스며 들어온 달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매는 걱정스러운 낯을 하며 무릎을 굽혀 청난의 눈높이로 내려앉아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가 나간 지 나흘이 지났는데, 모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그가 없던 나흘이 꿈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게 하였다.
청난은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양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 잡았다. 청난은 말없이 그와 시선을 마주하더니, 곧 그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을 쭉 당겼다.
“으즌?”
“매아 왔느냐.”
“그으읍느드.”
백매는 청난의 갑작스러운 괴롭힘에도 아무런 불만도 가지지 않았다. 청난은 두 손을 떼었지만 텅 빈 손을 거두는 대신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어 그의 목덜미 뒤에서 맞잡았다.
“늦었구나.”
청난이 갑자기 포옹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백매는 현실을 깨닫는 데에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그는 느껴지는 따뜻함에 또다시 얼떨떨해졌다. 백매가 목석같음에도 청난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 안아도 되는… 거겠지?’
백매는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해 놓은 것이 없었기에 그의 양팔은 공중을 헤매기만 하였다. 청난은 제자의 고민을 짧게 끝내 주었다. 그의 두 팔이 풀어지며 그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백매의 눈빛에 짧은 후회가 감돌았다.
“무슨 꿈을 꾸셨기에 제자의 품을 찾으셨나요. 제자에게 털어놓아 보세요. 도움이 되어 드릴 순 없어도 헛헛함은 더실 수 있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