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백매는 연화에게 왜 아직 여기 있냐며 따지고 들려 하였지만 청난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그는 하고 싶던 말을 목 아래로 잠재웠다. 움찔거리는 백매의 눈썹을 보며 익살스럽게 입꼬리를 잡아당긴 연화가 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아냐.”
“흐음… 그렇구나.”
청난은 말끝을 늘이며 대답을 곱씹는 듯하더니, 고개를 두 번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화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안 물어봐?”
“응, 네가 말하고 싶으면 말해 주렴.”
“그럼 안 말할래.”
“좋아.”
연화의 비승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끝맺었다. 청난은 묻지 않았지만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백매는 청난을 오래 봐 온 덕에 표정만 보아도 그가 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난은 또다시 새어 나간 이야기의 흐름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눈앞에 시체들이 즐비해 있으니 잊기도 어려웠다.
“이자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 무얼 하려는 걸까.”
“왜 굳이 그런 걸 만들겠어? 스스로가 영근을 갖고 싶어 하는 게 아니겠어? 그러니 이렇게 꼼꼼한 것이겠지. 자기가 써야 하니까.”
“그럴까? 영근을 더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영근은 그 종류가 적을수록 순정해. 또, 순정할수록 영력이 고강해지지. 굳이 여러 개를 갖고 싶어 하는 자는 없을 거야.”
“어떻게 장담해?”
“음…….”
청난은 연화가 제 말이면 무조건 반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의 부채를 받지 않아 심통이라도 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샘이 많았지만 그에 비해 가질 수 있던 것은 몇 없었다. 그 결핍이 괴이하게 이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돌아가면 그와 대화를 해야 할까?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가르쳐? 이젠 그가 나보다 더 산 세월이 많은데.’
연화는 이제 인간을 초월한 신선이니, 자신이 돕겠다며 건네는 말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도 몰랐다. 심하면 그에 대한 신앙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지. 그러니 청난은 자연히 그의 기분이 풀리길 바랐다.
그때, 거친 발소리가 빠르게 저를 향해 다가왔다. 청난은 고개를 들며 바로 피할 준비를 하려 했는데, 백매가 그저 그곳을 바라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아 안전하다고 생각해 다시 자세를 다잡았다.
“허억, 허억 헉, 헉.”
그 발걸음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곧 사람의 형태로 눈에 보이게 되었다. 그는 못 볼 거라도 본 양 혼비백산하여, 오른발로 뛰는 건지, 오른팔로 뛰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무가내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연화의 앞에 멈추어 거의 엎어질 듯 허리를 굽히며 외쳤다.
“사, 사, 사람입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살아 있느냐?”
“헉, 헉, 헉, 어헉, 그, 허억… 네. 허억… 네……!”
그 청년은 숨을 먹어 가며 가까스로 짧은 단어를 내뱉었다. 그는 눈치가 좋은 것인지 습관인지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고, 청난은 그곳으로 당장 뛰어갔다.
그러나 청난이 미처 생각 못 한 게 있었다. 수사가 헥헥거리며 뛰어올 거리,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도 청난이 인지할 정도로 시간이 걸린 거리는 절대 가깝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결국 기세 좋게 뛰어가던 청난은 중간에서 제 두 무릎을 부여잡으며 두 아이들을 기다려야 했다. 청난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숨을 두어 번 허덕이니 어느새 백매의 손길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래……. 고맙구나.”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백매는 청난을 안을 생각으로 양손을 벌렸다. 청난은 그의 품 안에 들어가려고 했다. 보는 눈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헥헥대는 꼴을 보이는 것보단 제자의 부축을 받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물론 부축이라기엔 과하지만.
하지만 그를 저지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쏘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와 발걸음이 따라붙었다.
“안 그래도 돼. 다 왔거든. 보기보단 체력이 좋구나?”
“네 눈엔 정말 약골로 보였나 보구나.”
연화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을 보였다. 물론 청난은 그것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느낌만으로 짐작해야 했다.
그들이 몇 걸음 더 가자 선두에 있던 백매의 발이 멈추어 섰다. 이번에도 등불이 타올랐지만, 이곳을 가득 메운 검은 안개 탓에 여전히 주변이 분간되지 않았다.
‘아까 그 부채질 한 번이면 날아갈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다시 받을 수도 없었다. 저에게 안 좋다고도 하고, 무엇보다 백매가 걱정할 테니까. 청난은 속으로 입맛만 다시었다.
결국 청난은 이번에도 백매의 눈을 빌렸다.
“잘 안 보이는구나. 뭐가 보이느냐?”
“진법이에요. 이번엔 흔적이 아니에요. 아직도 술법의 힘이 작용하고 있어요. 잠시만 물러나세요.”
백매는 물러나라 했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자신이 청난의 앞을 막아 주었다. 청난은 그 보이지 않는 등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곧 강한 돌풍이 부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눈앞이 트였다. 청난의 느린 눈으로는 연기의 끄트머리만 간신히 볼 수 있었고,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문을 잃었다. 그들이 벽이라 생각했던 것은 술법이 만들어 낸 차단막이었고, 그것은 반투명하여 그 안이 훤히 보였다. 그곳에는, 예상한 대로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거기 들리십니까?”
“연화문입니다! 의식이 있다면 손을 들어 주세요!”
마치 시체처럼 층층이 쌓인 인영들은 감히 그들의 생사를 가늠할 수도 없게 하였다. 이들 또한 사람이기에, 동족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기에, 혹여 있을 생존자를 찾기 위해 깨지지 않을 걸 알고도 막을 두드리거나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속에서 침착한 건 두 명의 인간이 아닌 존재들뿐이었다.
청난은 손끝에서부터 싸늘하게 식어 가는 감각을 느꼈다.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였으며, 그다음으로 느낀 건 연민이었다. 그때서야 저들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청난은 성큼 걸어가 술법의 경계선 앞에 섰다.
진법은 연결과 연결의 짜임으로, 그 법칙을 안다면 해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술사 본인이 아니면 그 법칙을 알기 어려웠다. 전생의 청난은 그 분야에 있어 으뜸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수련을 하지 않은 속인에 불과했으니 더더욱 어려웠다.
청난이 그저 술법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그 뒷모습은 백매의 마음을 아리게 하였다. 백매가 무력으로 그것을 파하고자 검파에 손을 올리며 당장이라도 뽑을 듯하였을 때, 연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 내가 풀게.”
성큼성큼 걸어온 연화의 손짓 한 번에 복잡했던 술법이 사라졌다. 부서진 게 아니었다.
‘연화가 이렇게 잘 알고 있다고……?’
아무리 천재여도 배우지 못한 부분에서도 이토록 뛰어날 수 있는가? 청난이 연화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연화는 눈매를 둥글게 말아 올리며 미소로 화답했다.
“뭐 해? 안 들어갈 거야?”
“아, 아니야. 가자.”
연화가 그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자 그 뒤로 청난과 백매가, 그리고 연화문의 제자들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억…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
밖에서 보는 것과 막상 안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건 천지 차이로 달랐다. 그 처참한 현장에 많은 이들이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발걸음을 서둘러 현장을 정리했다. 다행히 생존자가 꽤나 있는지 사방에서 외침이 오갔다.
청난은 마음 같아서는 그들과 함께 돕고 싶었지만, 자신은 방해만 될 거라는 현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탓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제 손만 주물러야 했다.
“사존, 잠시 쉬세요.”
“아니다, 됐다.”
청난은 백매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구조 작업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청난이 백매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희야말로 피곤하지 않으냐. 너랑 연화 둘은 쉬고 있거라.”
청난이 그 둘이 신선임을 잊을 정도로 집중하지 못하자 백매는 그가 염려스러웠다. 청난은 이미 무리하다 쓰러진 전적이 있지 않은가. 백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저의 사존에게 휴식을 권하려 흔들리는 손을 잡으려 하였는데, 때마침 청난이 바로 움직이는 바람에 허공만 움켜쥐었다.
“사, 사존? 어디 가세요?”
“저기! 저기 누가 있잖느냐!”
당연히 누가 있다. 사방에 널린 게 ‘누군가’이지 않은가. 백매는 영문도 모르고 그의 뒤를 쫓았다.
청난이 고약한 썩은 내를 가로지르고 거대한 바위에 숨겨진 뒤쪽으로 곧장 이동했다. 그곳에는 어떤 여인이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청난은 그녀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여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청난은 그녀가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해 걸음을 물렸다.
“저희는 수야… 아니, 연화문의 수사들입니다. 겁먹지 마세요. 여러분을 구조하러 왔을 뿐입니다. 제 말 이해하시나요?”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청난의 올곧은 시선에 그의 수려한 외모가 더해지면 선한 인상을 주기 마련이었고, 그로 인해 상대는 안심하는 편이었다. 청난은 자신의 외모가 가진 힘을 잘 알았고 적당히 써먹을 줄도 알았다. 그는 과하게 눈썹을 휘며 온몸으로 짐짓 그녀를 걱정한다는 태도를 보여 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인?”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 그 자체였다. 청난이 몸을 오뚝이처럼 앞뒤, 양옆으로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