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제자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삼백 년 전의 명성은 유명무실해진 게 아니었던가. 그저 오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엔 특별한 게 없을 진 선사가 몸을 한 바퀴 돌자 그 거대한 요마가 한 번에 둘로 갈라지며 죽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요마를 죽였을 뿐, 주변 전경은 그 무엇도 훼손시키지 않았다. 수사라면 순수한 영력의 힘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조절 능력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다.
갑자기 나타나, 단기간에 수많은 유언비어를 낳았으며, 그의 존재에 대해 여러 사람 입에서 진실과 거짓을 논하게 한 수사 진청난. 이제부로 그에 대한 의심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여전히 의심하는 자들은 있겠지만, 애초에 청난은 그 점에 대해서는 일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배울 것 많은 선배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만의 손해일 뿐이었다.
“사존, 정말 굉장…….”
어느덧 불쑥 다가온 백매가 그새 준비한 칭찬 일색을 늘어놓으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백매는 말을 하다 말고 청난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청난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백매에게 잡힌 자신의 손목을 보던 청난은 반대쪽 손으로 그의 손등을 감싸 잡았다. 그러더니 껍데기를 벗겨 내듯 손가락 하나하나를 펴게 하여 그의 손을 밀어 내었다.
백매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죄, 죄송해요.”
“괜찮다.”
청난은 평소와 달리 작은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백매의 손은 거두어졌지만, 두 눈동자는 여전히 청난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존, 어때?”
염려에 표정이 망가진 백매와 달리 연화의 목소리는 산뜻하기만 하였다. 청난은 부채를 두어 번 부쳤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고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또한 담백하였다.
“이거 참 물건이구나.”
“그렇지?”
“정말 좋아. 아주 맘에 들어. 이거 나 주겠니?”
“흐음-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
“응.”
백매는 그 둘의 대화를 마냥 볼 수밖에 없었다. 저의 사존을 부르고 싶었지만, 제게 시선을 돌린 그의 입 끝이 내리 앉을까 두려웠다. 그러면서 왜냐 묻는다면 딱히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없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청난은 쥘부채를 접었다가 다시 펴 보았으며, 또한 한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 보기도 하였다. 그런 모습이 마치 첫 장난감을 얻은 어린아이를 연상하게 하였다.
백매는 그 부채와 청난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시선을 연화에게로 돌렸다.
“한연화, 이거 뭐야?”
“뭐긴, 내가 만든 법기지.”
“그것뿐이야?”
“그럼 뭐가 더 있을까 봐? 조금 힘이 넘칠 뿐이야. 너네 술법에 맞추기까지 했어. 아마 사존은 맞춤형 명검을 든 기분일걸? 그렇지?”
“응, 맞아.”
청난이 흔쾌히 대답하였다. 연화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백매는 꺼림칙한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한연화는 어차피 더 말해 주지도 않겠지.’
백매는 연화를 향한 시선을 빠르게 거두었다.
“사존.”
“오냐.”
청난은 여전히 백매를 바라보지 않았다. 백매는 개의치 않고 그 자리에서 다리를 구부렸다. 오른쪽 무릎이 땅에 닿자 청난은 그제야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왼쪽 무릎마저 땅에 닿았다.
그들이 앞에 두고 있는 요마의 시체는 애당초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던 형태였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백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청난은 당황하여 그의 팔을 잡아 들어 올렸다.
“왜, 왜 이러느냐?”
“제자가 부탁이 있사온데, 사존께서 싫어하실 것 같아 이렇게 청을 올립니다.”
“알았다. 내 뭐든 들어줄 테니 우선 일어나거라. 신선의 이름을 내걸고 무어 하는 짓이냐.”
청난의 손길은 여전히 온화하였다. 백매는 그에 기꺼이 일어섰다. 백매는 청난보다 키가 컸기에 자연히 청난을 내려다보았다. 백매의 눈동자가 맑고 투명한 탓에 그는 그저 덩치 큰 아이 같았다.
“말하렴. 이 스승이 무얼 도와줄까.”
쥘부채에서 눈을 떼고 백매를 향한 청난은 늘상 보던 다정한 그 사람이었다.
“제가… 제가 감히 사존의 것을 탐하고자 합니다.”
“내걸? 무엇을 줄까? 이 스승은 가진 게 너 하나뿐인데.”
백매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청난은 어쩐지 그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고, 달래 주고 싶었기에 발돋움을 하며 그와 시선을 마주 보았다. 또, 손을 올려 그의 볼을 감싸 안았다.
백매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 체온에 고개를 맡겼다.
“방금 받으신 그 법기를 제자에게 빌려주세요. 제자가 살펴보고 금방 돌려드릴게요. 아니… 사실 안 그럴지도 몰라요. 저는, 저는 사존이 너무 걱정되어서…….”
“네 말은, 이걸 네가 살펴보고 내게 위험할 것 같으면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이냐?”
백매는 눈동자를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굴리며 고심했다. 청난은 화난 것 같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웃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가겠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죄를 지은 것 같아 백매는 기세가 약해졌다.
청난은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매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두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그럼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 어쩌겠다고?”
“사존의… 법기를… 제자가 살펴보고…….”
“살펴보고?”
“드리겠습니다…….”
“만약 위험하면?”
“위험하면… 제자는…….”
“‘돌려주지 않겠습니다.’”
“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응. 좋아. 하고 싶은 말은 떳떳하게 다 해야지.”
“하지만 저는… 저는 사존께만 이러는걸요.”
백매의 목이 거북이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귀가 다소 붉어진 것도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청난은 십 년 전 그의 고백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날 특별하게 여기면 안 돼.’
청난은 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 주제를 이어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청난은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려 했다. 바로 쥘부채로.
청난은 제 손에 있는 부채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참 신기했다. 보고 있을 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잠깐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연화문은 현혹술이 뛰어난 곳이니, 연화가 법기를 만들며 그와 같은 속성을 첨가하였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무기를 애정하는 것은 효율 면에서도 좋으니. 그러니 그 점에 관해서는 별로 상관없었다. 스스로의 자제력을 믿기도 하였다.
청난은 방금 전 느꼈던 감각이 다시 떠올랐다. 제 손길에 따라 울렁이는 영력은 오랜 것을 추억하게 하였고, 마치 오랜 병상에서 일어난 개운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청난은 어쩔 수 없는 무인의 영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더더욱 유혹적이었다.
청난은 백매의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을 떼고는 양손으로 부채를 접어 쥐었다. 그러곤 곱게 모은 백매의 양손 위에 올려 주는가 싶더니, 이내 곧 다시 거두었다.
“사존…….”
“그런 표정 말아라. 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야. 아직 연화가 내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의 주인인 연화의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인 것 같구나.”
“아, 나?”
연화는 이 재미난 광경에서 저의 이름이 거론되자 깔깔 웃었다.
“좋아, 좋아. 나한테 물어봐, 화백매.”
백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더니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며 짜증으로 물들었다.
“나 줘.”
“그건 별로야. 하지만 사존이 원한다면 너한테 빌려줄게.”
“좋아, 착하구나, 연화.”
백매는 그 모습이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일방적으로 한연화의 행동이 싫은 것이었다.
청난은 표정으로 티격태격하고 있는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흔쾌히 자신의 부채를 백매에게 건네주었다.
청난은 마치 큰 벽을 앞에 두고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는데, 부채를 놓으니 너무나 편안해졌다. 확실히 그것은 조금 과했다.
백매는 그것을 쥐고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다. 영력 감응력이 현저히 낮은 청난은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건 알 수 있었다. 백매의 두 눈썹이 가까워진 탓이었다.
“한연화!”
연화를 부르는 백매의 음성에는 노기가 역력했다. 백매가 쥘부채를 던지듯 연화의 가슴 앞에 밀어 건네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걸 사존께 드린 거야!”
“무슨 생각이라니, 선물이지.”
연화는 얌전히 부채를 받아 들곤 다시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백매가 가진 주머니처럼 그의 품속도 또 다른 공간으로 연결된 것인지 쥘부채를 넣었음에도 조금도 울퉁불퉁하지 않았다.
“이건 사존께 독이 될 수도 있었어.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당연하지. 내가 만들었는데 몰랐겠어?”
“한연화! 네가 이런 버러지 자식인 걸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진정해 친우. 난 그저 사존을 위해 드린 선물이라니까. 악의는 없어.”
“음, 얘들아. 기왕이면 당사자도 끼워 주면 좋지 않겠어?”
청난은 두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실 백매는 자신의 안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니, 나중에 따로 물어보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저 둘의 싸움을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으니, 불필요하여도 참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매는 금세 시선을 청난에게로 돌렸다. 당연히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바뀌었으나,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이 법기는 인간이 쓰기엔 너무나 과해요. 인간들의 영력이 아닌, 신선이 가지고 있는 법력을 연료로 사용하거든요. 장기간 법력을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아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난 썼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