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왜? 기대하던 만큼은 안 되었던 거니?”
“아, 아니에요. 둘 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이 시대에도 훌륭한 수사가 배출될 거란 기대감이 들게 했죠.”
“그런데 반응이 왜 그렇게 떨떠름한 거니?”
“그게… 그냥 좀 꺼림칙해서요.”
“무엇이?”
“그걸 잘 모르겠어요……. 좀… 그렇죠? 그… 사존께선 제자의 말을 잊어 주세요. 말실수일 뿐이에요.”
백매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청난의 눈길을 피해 그 시선을 땅으로 파묻었다. 청난은 그 시선을 쫓아 몸을 움직여 끝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응, 염두에 두마.”
청난이 숙인 허리를 펴고 몇 걸음 걸었다. 그는 등 뒤에서 자신의 제자가 감명받은 눈빛으로 저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역시 헛소문이었을까…….”
청난의 눈에는 파릇파릇하게 자란 무성한 잡초와 떨어진 도토리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경험 부족한 수사만이 보였다. 이는 피로 물든 소문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동굴이나 바위틈처럼 은밀한 장소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물론 눈에 띈다면 은밀한 곳이겠냐마는, 감각이 뛰어난 수사와 심지어 신선까지 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없거나, 있어도 그 힘이 아주 미약하여 감히 뭔가를 숨길 수도 없을 것이다.
청난이 슬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에, 숲을 울리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요마다!
-요마가 나타났다!
청난이 듣기에도 그 소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청난은 백매를 부르는 대신 그곳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청난의 힘없는 뜀박질로도 충분히 소리의 근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청난이 갔을 때는 이미 다른 제자들이 달려와 그곳을 에워싸고 있었다. 가까스로 그들 사이로 파고든 청난은 그 가운데에 모여 있는 사슴 혹은 거대한 쥐를 닮은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야?”
“저런 건 처음 봐. 들어 본 적도 없어!”
“괴, 괴물 아냐……?”
“…….”
수사가 요마를 보고 괴물이라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는 꼴을 보니 청난은 다시금 답답해졌다.
그들이 놀라워하는 요마는 분명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긴 하였다. 반은 사슴, 반은 쥐였으니. 그것은 단순히 상체와 하체가 다른 게 아니었다. 정확히 두상의 좌측은 사슴이었고, 우측은 쥐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그의 미적 감각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누구든 처음이 있고, 어리숙했던 때가 있는 법이다. 그들을 돕고 가르치는 곳이 사문이다. 비록 내 아이들은 아니지만, 선대는 후대를 가르칠 의무가 있는 법이었다.
청난의 옆에는 어느덧 백매가 서 있었다. 청난은 발소리는 듣지 못하였지만, 장신구가 찰랑거린 덕분에 존재를 알 수 있었다.
“매아, 법력은 쓰지 말거라. 연화 너도.”
연화는 근처에 있진 않았지만, 신선이니 분명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청난의 머리 위에 돋아난 나뭇가지에 연화가 앉았다.
“어째서?”
“너희가 법력을 쓴다면 네 제자들이 어떻게 배우겠어. 저것은 그리 악독해 보이지 않으니 이럴 때 간접 경험을 쌓게 하는 거지.”
청난이 어깨를 으쓱이며 턱 끝으로 모여 있는 연화문 제자들을 가리켰다. 연화는 나무 위에서 휙 내려왔다. 그 탓에 그의 발밑에 자라던 기다란 풀잎이 고개를 뉘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스승의 마음이네.”
“천직이었지.”
“좋아, 그렇게 할게. 검으로만 제압하라는 거지?”
“응, 맞아.”
연화는 자신의 허리에 매여져 있는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평소 그의 옷차림이나 분위기가 너무나 검소한 탓에 방금 전까지 그 또한 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
그의 검집은 그만큼이나 수수하였는데, 청난은 오래전 저 속의 검날이 비추었던 은은하고도 아름다웠던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다. 곧 다시 볼 그것을 기대하며 그의 손 위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허나 연화는 자루를 잡았을 뿐 뽑지 않았고, 곧 그것마저 놓아 버렸다.
“응? 무슨 문제 있느냐?”
“그건 아니야.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청난은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며 곧 나올 그의 음성을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사존이 해 보는 건 어때?”
“응? 내가?”
“응. 사존이 저걸 없애는 거야. 그럼 다들 사존을 다시 볼걸? 수야각의 위세도 살릴 수 있잖아.”
청난은 쭉 뻗은 연화의 손끝을 따라가 다시금 그 괴이한 반반요마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직도 주변을 감싼 어린 수사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것의 다리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청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절하였다.
“내 능력은 내가 잘 알아. 오히려 우습게만 보일걸.”
“누가 그래? 사존은 조금 연약하고, 근력이 없고 영력도 없을 뿐인걸.”
“……솔직하네…….”
청난이 옆을 힐끗 바라보니 백매의 눈동자가 사방으로 춤추고 있었다. 어떻게 변호할지 고민하고 있는 걸까.
연화는 방금 전의 청난을 따라 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젠 솔직해도 되잖아.”
“그렇지. 그런데 어쨌든 내가 요마를 상대하기엔 너무나 부족해.”
“무엇이 부족한데?”
“네가 말했잖아. 근력, 체력, 영력까지. 그다지 좋은 편은 못 되지.”
청난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자신이 부족하단 것을 이렇게 직접 말하게 하다니, 현실이 코앞으로 부쩍 다가온 것 같아 답답했다.
‘요새 백매와 지내다 보니 그의 힘이 내 것이라 착각이라도 하고 있던 건가. 새삼스럽게.’
청난의 얇고 긴 속눈썹이 사선으로 내려앉으며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때문에 청난은 청초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였다.
백매는 그에게 손을 내밀려고 하였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 하지만…….’
백매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기대감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그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컸다. 햇살이 뜨겁다면 손바닥으로라도 그 열기를 가려 주고, 비가 온다면 제 옷으로라도 막아 주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청난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연화의 목소리가 더욱 빨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다른 건 몰라도 영력 부분은 내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네.”
네가 어떻게? 청난이 그리 묻기도 전에 연화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청난의 눈앞에 건네었다.
그건 쥘부채였다. 살도, 선면도 어떤 색으로도 물들지 않았다. 하얀 것도 아니었다. 흰 물도 들이지 않아 정돈되지 않은 누리끼리한 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2전쯤 주면 살 수 있는 평범한 부채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든 순간, 청난은, 하마터면 그것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건……!”
부채가 청난의 손에서 웅웅대었다. 단순히 진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뛰쳐나갈 것 같은 기백에 청난은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통제하기 어렵겠네.”
청난이 부채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부채에 잠겨 있던 청량한 기운이 단숨에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 탓에 이곳에 있던 모든 수사, 심지어 요마의 시선까지 모조리 청난에게 향했다. 청난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도, 생각도 없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내가 만들었어.”
“네가? 왜? 네게 어울리는 법기가 아닌데. 수야각에 전해져 온 거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겠어.”
“그냥, 사존이 그리워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백매가 연화와 청난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청난을 등진 채 연화와 마주 보았다.
“네가 왜 사존이 그리워?”
“난 그러면 안 돼?”
“당연하지. 넌 양심도 없어? 네가 한 짓이 기억 안 나기라도 해? 그럴 리 없지. 네가 인간도 아니고. 뻔뻔한 것도 정도껏 해.”
“알았어. 그런데 날 신경 쓸 때가 아닐걸?”
백매가 다급하게 뒤를 돌아 청난을 살폈다. 당연하게도 그는 몇 초 전과 다를 바 없이 무사하였다. 다만, 그의 시선은 부채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의 입 끝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백매는 그 미소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사존……?”
백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청난은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를 제치고 앞서 걸어가기까지 하였다. 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동시에 나긋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탓에 요마를 둘러싸고 있던 연화문의 제자들은 그를 보호하라는 명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청난이 요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겁을 먹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동시에 앞발로 땅을 미는 것이 어디론가 달려 나갈 준비를 하는 성싶었다. 그럼에도 청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의 제자가 뒤에서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추호도 모를 것이다.
청난이 부채를 수평으로 들었다. 선술은 부채의 넓은 면적을 이용하는 무술이니, 그것은 그 이점을 버린 행동이었다.
모두의 걱정 속에서, 청난은 발을 길게 빼고는 흙을 가르며 둥글게 원을 그렸다. 그의 몸이 회전하면서 소매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 모습은 한 획으로 단숨에 그려 낸 풍경화를 생각나게 하였다. 청난의 손을 따라 선면의 가느다란 끝 선이 공간을 그으며 지나갔다.
그 궤적은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생긴 물결처럼, 점차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요마에게 닿은 순간.
휘리릭!
바람을 가르는 강렬한 소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