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연화야, 나가자. 나가자꾸나. 내가 나가고 싶다. 이 은사의 말 들어줄 거지?”
청난은 뒤에 이어질 말이 혹여나 무서운 것일까 서둘러 그의 말을 잘랐다.
“응? 물론이야. 그런데 어디 가게?”
“네 제자들이 밤중에 토벌을 나간다 했었지. 우리도 함께 데리고 가 주겠니.”
연화는 눈동자와 함께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싫으니?”
“그럴 리가. 은사님이 함께라면 우리가 영광이지.”
청난과 백매는 연화의 방에서 사담을 나누다 달빛이 어둠을 밝힐 무렵이 돼서야 방을 나섰다. 정문에서 꽤나 떨어진 안쪽으로 이동하자 그곳에는 이미 연화문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는 이제야 열네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제자도 보였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게 있다면 이 사형을 부르거라.”
“사저를 부를 거예요.”
“이것들이. 나는 못 믿겠다 이거지?”
“그런 편이죠.”
연화문 제자들은 어린 나이와 요마 토벌이라는 무거운 목적에 비해 비교적 편안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또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바로는 어린 제자들은 탐색만 도울 뿐이었고, 무리마다 전투 인원과 탐색 인원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었다. 연화문에 대한 소문들로 인해 생긴 좋지 않은 감정들을 뒤로한다면, 이들은 꽤나 훌륭한 집단이었다.
“저 말라깽이가 그 ‘진청난’?”
“아닌 것 같지……?”
한 가지, 예의가 부족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수사들은 대체로 귀가 밝았으니 저들끼리 소곤소곤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지 알 터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단 몇 척도 떨어져 있지 않은 청난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연유가 무엇일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무인은 무인을 알아보는 법이지.’
지금의 육신이 무인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청난이 모를까. 한마디로 저들은 만만하니 대놓고 저러는 것이다. 심지어 백매가 주변을 살피러 자리를 비웠으니, 저들이 무슨 눈치를 보겠는가.
에휴, 청난이 짧게 한숨을 내쉬자, 그의 머리 위로 둥근 그늘이 생겨났다. 청난은 그 존재감에 따라 시선을 올려 어느새 돌아온 백매와 마주 보았다.
“너무 탓하진 말거라.”
백매의 걸음에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가 다가왔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비단 청난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청난을 입에 올리던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백매에 깜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백매가 그곳을 흘겨보니 그들은 다급하게 자리를 떠나 버렸다.
“사존께선 화나지도 않으세요?”
“의심이 많은 건 꼭 나쁜 것만은 아냐.”
“당사자가 듣는 걸 아는데도 굳이 입 밖에 꺼내는 건 의심이 아니라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까마귀가 하얗다고 한다면 하얗게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사존께서 흰 까마귀를 좋아하실 때 얘기죠. 당신께서 마냥 참아야 하는 걸 돕고 싶지 않아요.”
“그럼 속상하느냐?”
“음…….”
백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속상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올린 적이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입 밖으로만 안 올렸을까. 사실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도 몇 없었기에, 감정의 이름을 찾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럴 것 같아요.”
“그럼 오늘만 속상해하자꾸나. 아직 일이 안 끝났잖아.”
“사조온…….”
“하하하, 대신 끝나면 맛 좋은 월병을 사 주마.”
“좋아요. 하지만 제가 사 드릴게요. 사존께선 제 나이를 가끔 잊으시는 것 같아요.”
“네가 몇 살인지 나랑 무슨 상관이더냐?”
“저는 이젠 어리지 않은걸요.”
“나보다 늦게 태어났으니 나보단 어리지. 안 그러냐?”
“그… 그런가요?”
“응. 그렇지.”
백매는 청난의 말이 어쩐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백매보다 먼저 태어난 건 진청난이지, 청난은 태어난 지 이제 스무 해밖에 되지 않았다. 고로 궤변에 불과한 것이었다.
청난은 생각했다. 그가 보는 이는 ‘진청난’일 것이라고. 그렇지 않았다면 영민한 제자가 이런 단순한 것을 놓쳤겠는가.
청난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걷기 시작하니, 백매는 고민을 끊고 제 스승의 뒤를 쫓았다. 스승이 그리 말했으니, 더 생각해 봐야 무어가 달라지겠는가.
연화산은 한적하기만 하였다. 어쩌다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라도 그것은 지나가는 연화문 제자가 낸 것이지, 요마는 털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청난은 전혀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사귀의 흔적을 찾지 못할 거라는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 조용함이, 너무나 조용하기 때문에 불길하였다. 이렇게 한적한 거리는 아랑 마을을 나온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청난이 주변을 살피자, 점점 저에게 다가오는 흐릿한 인영 셋이 보였다. 그들이 꽤나 가까이 와서야 가운데에 있는 자가 연화임을 알 수 있었다.
‘안경을 바꿔야 할까. 그런데 아직 살아 계실까.’
청난이 안경을 구해 준 아비의 지기를 떠올리고 있을 때 연화가 말을 건넸다.
“사존, 백매. 연화산을 돌아보니 어때?”
“조용하네. 그런데 뒤에 계신 두 분은?”
청난의 말에 연화의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한 발짝 나와 포권을 취했다. 그들은 청난의 또래거나 한두 살 정도 더 많아 보였다.
‘누굴 닮은 것 같은데…….’
“내가 직접 가르치는 제자들이야. 백매 얘기를 들었는지 궁금해하길래 데려왔어.”
“내가 궁금하면 아무나 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
백매의 말에 두 제자들은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들의 태사존이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밀어 앞으로 내세운 탓에 그들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아침 식사를 뱉을 것처럼 불편해 보였다.
그들 중 오른쪽에 있는 자는 그나마 좀 나았다. 그는 피할 수 없으니 저돌적으로 나왔다.
“저, 저희는 불과 물의 쌍영근을 가졌습니다. 화 속성의 선술은 연화문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나, 수 속성의 선술은 배움의 길이 없어 기록을 보며 독학한 정도이지요.”
그는 갑자기 허리를 크게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늘의 신선이신 해류진군 백매선께서 몇 수 보여 주신다면 저희에겐 큰 자산이 될 겁니다!”
그는 마지막에는 아예 넙죽 엎드려 절까지 했다.
청난은 그를 보며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우선 든 것은 선대로서 후대에 가르침이 이어지게 하지 못한 죄책감이며, 또 다른 것은 기특함이었다. 청난은 예전부터 노력하는 이들을 참 좋아했다.
“매아가 훌륭한 선배라 다행이구나.”
청난은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입꼬리가 올라간 온화한 낯으로 백매를 돌아보았다.
백매는 그 제자들의 이야기를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듣고 있었다. 당연히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후배들을 도와줄 테지?”
하지만 사존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 조금만…….”
백매는 제자들에겐 여전히 무심한 낯이었지만 기꺼이 자리를 옮겨 검을 쥐었다. 혹여나 청난이 다칠까 멀리 간 탓에 청난은 그들의 움직임은커녕 목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단지 먼 곳에서 인영 셋이 움직이는구나, 그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대신 백매의 빈자리에는 연화가 여태 서 있었다. 그가 움직일 생각을 않는 것을 보아 백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을 모양이었다.
“날 호위해 주는 거니?”
“맞아. 내 성의를 알아봐 주니 기뻐. 싫지 않지?”
“너희가 내 곁에 있는데 왜 싫겠어.”
청난의 고개는 연화와 대화할 때는 연화를, 아닐 때에는 움직이는 막대기 세 개를 향하느라 매우 바빠졌다.
“꼬마 사존.”
“응?”
“찾고 있는 게 있지?”
청난의 고개가 연화에게 고정되었다. 청난은 바로 입을 열지 않고 탐색하듯 그의 눈동자를 마냥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달빛이 아주 밝노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빛에 투명하게 빛나는 그의 머리카락이 불타듯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청난이 그 불빛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막대기를 찾았다.
“응, 맞아.”
“찾고 있는 게 뭐야?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음… 말하자면 좀 길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아니, 말해도 괜찮을까. 누굴 믿고 누굴 믿지 않아야 할지 모른다는 말의 ‘누구’에는 연화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청난은 잠깐 고심했다.
‘연화는 백매와 삼백 년을 함께 보낸 지기이니 이 정도는 괜찮겠지?’
“누군가 우리 문파의 술법을 기반으로 비윤리적인 일을 벌이고 있어. 그 범인의 단서를 찾는 중이야.”
“어떻게 생겼는데?”
청난은 왼손 손등이 땅을 보게 둔 후 그 위로 오른손을 올렸다.
“수야문의 술법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범인이 자체적으로 만든 듯한 술법이 겹쳐져 있어. 여러 가지를 섞은 듯한 결과물로 보였어. 그렇게 만들어진 진법이라면 효능 또한 괴이하기 짝이 없을 거야. 혹시 그런 걸 본 적 있어?”
“아니, 본 적 없어. 사존이 보기에 그 술법은 어떤 것 같아?”
“음… 사실 그 응용력은 정말 놀라워. 만약 우리 문파의 제자였다면 족보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 테고, 아니라면 그는 정말 천재일 거야.”
“아쉽겠어. 뛰어난 제자를 두는 걸 좋아했잖아.”
“하지만 악인인 제자는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사절이야.”
“그렇구나. 아쉽네요. 그럼 사존은 오늘 그 단서가 나와 주면 좋겠다는 거지?”
“맞아. 지금까진 큰 단서를 얻지 못했거든.”
“응, 알았어.”
청난은 무얼 안 것이냐 물으려 하였는데, 어느새 그는 주변을 벗어나 다른 제자를 챙기고 있었다.
“사존.”
다시금 소리 없이 제게 온 막대기, 백매의 목소리에 청난의 생각이 끊겼다.
“어때? 아이들은 괜찮았어?”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