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그들을 나무라지 말거라. 그들의 실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이것이 때와 맞지 않는 환영이니 불편한 것뿐이야. 우릴 생각해 주는 건 기특하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구나. 산해진미와 아름다운 음색, 눈을 황홀케 하는 무용이 없다 하여도 우리가 널 대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데, 왜 애써 우리의 기분을 맞추느라 네 사람을 힘들게 하느냐.”
연화가 고개를 돌려 청난을 마주 보았다. 청난은 그에게서 날카로운 기백을 느꼈고, 그 탓에 자신과 그의 차이가 되새겨졌다. 연화는 곧 기백을 잠재웠지만 여전히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저만 보면 표정을 풀고 온순해지던 백매가 떠올랐다. 같은 시기를 보낸 아이들이라 하여도 역시 서로 다른 법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청난을 바라만 보기를 몇십 초, 연화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게 내가 환영하는 방식이야. 너희가 불편하다고 하니 물릴 거야. 하지만 날 탓하진 말아 줬으면 해.”
“물론이야.”
연화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휙휙 내젓자 무희와 악사들은 부리나케 짐을 챙겨 방을 나갔다.
연화는 그제야 굽이치던 눈썹을 가다듬었다. 그러더니 자신의 상 위에 있는 그릇을 들고 청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들고 온 그릇에는 청난의 상엔 없던 과일이 몇 가지 담겨 있었다. 연화는 그것을 청난의 바로 앞에 놓았다.
“그럼, 꼬마 사존과 내 친우가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게.”
청난은 그가 내려 둔 그릇에서 과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시원한 맛이 기분을 달래 주었다.
“사실 널 찾아온 게 아니야. 연화문에 왔을 뿐인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지. 바쁜 줄 알았거든.”
“그래. 네가 왜 여기 있어?”
백매의 퉁명스러운 말에도 연화는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대답하였다.
“화백매야, 화백매. 이 친우가 과로사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 나도 좀 쉬어야지.”
“지나가던 개가 안 웃으면 다행이겠다.”
백매가 청난의 곁으로 붙어 왔다. 청난은 그를 보며 미소 짓고는 자신이 먹던 것과 같은 과일 열매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백매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고는 한입에 집어넣었다. 그 맛을 본 백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마치 그의 머릿속에 ‘맛있다’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청난은 그것이 귀여워 백매를 쓰다듬었다. 그 와중에도 연화의 말은 이어졌다.
“사실 이미 다 끝났어.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어졌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줄 알았어. 또 아무 연락도 안 받았지? 신선들이 몇 달간이나 이 문제로 다투었는데, 지난달에야 결과가 나왔어. 인계에는 단 세 명의 신선만이 남기로 했어. 너, 나, 그리고 사헌 선자(史憲仙者). 아, 사헌은 해치를 부리던 그 신선이야.”
연화는 청난을 위해 친절하게 덧붙이곤 말을 이었다.
“사실상 손 놓은 거지. 사헌은 인계에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백매 넌 소식도 모르니 네게 기대한 것도 없었겠지. 그리고 난… 음, 알잖아?”
“네가 일을 할 리 없지.”
“그렇지.”
연화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청난은 연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선계의 그 신선들이 결국 인계를 포기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신은 인간이었으니, 인계는 그들의 고향이었다. 신선은 신앙에서 비롯된 이들이니, 인간은 그들의 삶이었다. 청난은 오래된 이들이 감히 제 역할을 잊었을 뿐이고 결국엔 옳은 길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청난은 손끝이 차가워지며, 동시에 뜨겁게 달구어짐을 느꼈다. 움찔거리는 제 손끝의 진동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느껴졌을 때, 서늘한 손길이 손을 덮어 왔다.
“진정하세요, 사존. 연화의 말을 더 들어 봐요.”
당연히 백매였다. 청난은 백매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았다. 예전의 모습에서 몸만 큰 것 같았다. 청난은 그의 손 위에 반대쪽 손을 올리곤 심호흡하였다.
연화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은사님이 이토록 걱정하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겠어? 내가 사헌을 도울게. 그럼 나을까?”
“물론이야. 후우…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어. 이들의 고통이 하루라도 빨리 사그라들길 바라. 너도 그렇지?”
“응. 나도 하루빨리 이루어지면 좋겠어. 최선을 다할게.”
청난이 손을 옮겨 연화의 뒷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연화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로 인해 청난과 연화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다. 연화는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대신 부탁이 있어.”
“뭔데? 말해 봐.”
“날 제자로 삼아 줘요.”
청난은 연화를 보는 시선을 유지한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부탁’은 무려 삼백 년이나 된 것이었고, 청난은 그때마다 같은 이유로 거절해 왔다. 그때는 그가 그런 부탁을 하는 연유가 짐작되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돌봐 줄 어른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왜 여태껏 자신의 제자가 되길 고집하는 것일까.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청난은 대답할 수 없었으니, 연화가 스스로 물러나 주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 사이를 큼직한 손이 비집고 들어오더니, 그대로 연화의 얼굴을 밀어 버렸다.
“장난하지 마.”
“장난 아닌데.”
백매의 손에 얼굴이 덮인 채 대답하는 연화의 목소리는 꽤나 무미건조하였다. 그는 양손으로 백매의 손을 밀어 내고는 어느새 평상시의 들뜬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의 시선은 다시금 청난을 향해 돌아갔다.
“물론 강요하진 않아. 사존은 내 은인인걸. 내가 나서는 걸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 백매 넌 지금까지처럼 사존 곁에 있도록 해. 지켜 드려야지. 내가 필요할 때 부를 테니까 내 전음은 듣고.”
“네가 말하지 않아도 사존의 곁에 있을 거야. 여기가 내 자리니까.”
“그래, 그래.”
여전히 백매의 경계심은 잦아들지 않았다가 연화가 청난에게 주었던 과일을 하나 집어 물고 제자리로 돌아간 후에야 잠재워졌다. 곧 백매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청난은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왜 저러지…….’
한 집에 개와 고양이를 같이 두면 이런 기분인 걸까. 심지어 한 마리는 우리 집 아이도 아니었다. 청난은 곤란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어른의 중재가 필요한 나이가 아니었기에 신경전 사이에서 눈을 돌리고 모른 척 앞에 놓은 과일을 깔짝대었다.
“그래서 둘은 연화문에 왜 왔던 거야?”
“아.”
“아.”
청난과 백매가 음식을 손에 쥔 채 동시에 탄식하였다. 연화문에 오른 이후 황당한 일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 탓에 그만 잊을 뻔했다. 백매가 손 위에 든 것을 덥석 입에 넣는 사이, 청난은 과일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음… 연화산에서 밤마다 비명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을 들었어.”
“호오… 어디서 나온 소문인데?”
“떠돌아다니면서 들은 거지. 소문이 어디 한 곳에서 나왔겠어? 그걸 듣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까 찾아온 거였는데… 이렇게 평온할 줄은 몰랐지.”
“그런 말이 도는 줄 몰랐네. 우리 제자들이 밤에 토벌을 나가는데, 그 소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비명을 지르는 게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응, 일리 있어.”
청난은 연화의 말에 수긍하는 것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꺼림칙함이 가시질 않았고, 그것은 연화와의 대화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슬쩍 본 연화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으며, 걱정 같은 이타적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청난은 먹고 있던 식기를 정리하였다.
“연화, 오늘 밤 머물다 가도 될까?”
“물론이야. 여기가 수야각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머물다 갔으면 좋겠어. 여기서 제일 좋은 방은 이곳인데, 나랑 같이 잘래?”
“그럴 필요 없잖아.”
대답한 것은 청난이 아닌 백매였다. 그는 어느새 청난과 같은 방식으로 식기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꼭 필요가 있어야 해?”
“필요도 없는데 네가 왜 사존이랑 같이 자? 잘 필요도 없는데, 다른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내가 내 집에서 자고, 내 집에서 손님을 재우는데 이유를 네게 말할 필요도 없겠지?”
어느새 연화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허공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러다 싸우는 건 아니겠지? 청난은 작은 걱정이 들었다. 그들이 작정하고 싸운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연화문의 제자들에게도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심해지면 아랫마을 주민들까지.
슬슬 말려야 할까 생각이 들 때쯤, 백매의 시선이 청난에게로 넘어왔다.
“…….”
그의 두 눈동자는 청난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눈썹꼬리가 아래로 축 쳐졌다. 청난은 그의 저 표정에 굉장히 약했다. 저 강아지 같은 표정에. 이 상황과 그의 표정을 생각했을 때, 저 눈빛의 의미는 ‘한연화와 같이 잘 건가요?’ 정도 될 성싶다.
“음…….”
청난이 입을 열자 연화의 시선마저 그에게 돌아왔다.
“혼자 자고 싶구나.”
“호, 혼자요……?”
“응. 혼자. 아무도 없이.”
청난의 확답에 백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시선이 청난에게서 벗어나 점차 바닥으로 향했다. 그가 눈을 한 번 깜박이니, 청난은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청난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 백매의 손을 잡았다.
“왜. 너 때문에 그러는 것 같으냐?”
“아, 아니, 어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겠어요. 그저 제자는…….”
“이 스승 믿지?”
“네, 물론이에요.”
“그럼 네 탓이 아니야. 네 덕도 아니지. 그저 오늘은 그런 기분일 뿐이야. 알겠느냐? 내가 잠버릇이 나쁜 건 기억하고 있지? 오래간만에 실컷 굴러다니려는 것뿐이야.”
“그러다 고뿔에 드신다면 제자는 어찌하지요.”
“연화문의 건축 방식은 그 정도로 형편없지 않아.”
끼어들어 온 제삼자의 목소리에 청난과 백매는 주고받던 시선을 거두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내친김에 그 둘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양 얼굴들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 말이야. 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