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청난이 삐져나온 백매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려던 차에 한 표사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마침 심심하였기에 청난은 기쁘게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임무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뭘요. 선사님들 덕분에 저흰 놀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그는 청난과 대화하는 와중에 백매를 힐끔 보았다. 관심이 있는 쪽은 청난이 아닌 백매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백매는 남과 대화하는 걸 즐기지 않는데, 그와 대화하다 무안해지는 것보단 아쉽더라도 청난과 대화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청난은 반걸음 앞서가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제 제자를 좋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 제자분이십니까? 어째…….”
청난은 뒤에 이어질 말이 충분히 예상되어 먼저 대답하고 싶은 심정을 꾸욱 참았다.
“선사님께서 더 젊어 보이십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사님들은 실력이 뛰어날수록 늙지 않는다고 하던데, 정말 뛰어나신 분인가 봅니다.”
“경지가 높은 자들의 노화가 더딘 건 사실이나, 노화가 진행되긴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 젊은 것이니, 그리 뛰어나지 못합니다. 제자가 뛰어나 이 스승이 복을 받습니다.”
“그렇군요. 두 분께선 분명 명문 문파의 제자분이시겠죠?”
“네, 그렇습니다.”
청난은 수야각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어쨌든 수야각의 제자는 맞지 않는가. 비록 삼백 년 전이지만. 청난의 대답을 들은 표사는 들뜬 기색이 되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 제 안사람이 연화진군을 크게 신봉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지요. 오늘 연화문의 제자분들과 동행한 것은 신의 인도가 분명합니다.”
“에… 예?”
표사는 청난의 반응을 보기나 한 건지, 주절주절 자신의 신앙과 평소 흠모해 온 연화문 수사에 대해 나열했다. 어째 저렇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명문 문파가 다 전멸한 걸까? 청난이 당황하여 말을 고르고 있는데, 가만히 듣기만 하던 백매가 그를 쏘아보았다.
“수야각입니다.”
“예… 예?”
백매는 기분 나쁘다는 것을 표정으로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저희는 수야각의 제자입니다. 사문을 두고 다른 문파로 오해받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군요.”
“아……!”
백매가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내자 청난은 표사와 다툼이라도 일어날까 걱정되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표사는 기분을 상해하긴커녕 한층 더 들뜨며 어깨까지 올라가더니, 곧 백매의 양손을 부여잡았다.
“역시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렇게 만나 뵈어 정말 영광입니다!”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아? 아아-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이 소 아무개는 아무것도 듣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겠다고 삼계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하, 아주 좋네요. 아주 좋아요. 두 분은 정말 이 시대의 영웅이십니다. 존경합니다!”
청난이 황당해 있는 사이 표사는 자신의 말만 늘어놓고는 자리를 떠났다.
“……황당하네.”
“정말 말이 많은 사내네요.”
“‘그 신선’에 대한 소문이겠지?”
“제자는 그렇게 생각해요. 수야각에 반응한 건 의외였긴 해요. 아직 수야각 술법을 알아보는 사람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참 다행이구나.”
청난이 옅게 미소 지었다. 백매는 그것이 씁쓸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뻐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역시 내가 사문을 지키지 못했다고 실망하시는 걸까.’
때마침 정산을 받으러 갔던 표사가 돌아왔다. 자신들의 돈주머니를 반기는 이들의 호응 소리에 자연히 청난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그 탓에 청난은 제 제자가 또다시 땅굴을 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청난도 순서에 따라 돈주머니를 받았다. 백매 또한 자신의 몫을 받았지만 곧바로 청난에게 넘겼다. 청난은 받은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생각보다 액수가 많구나. 오늘은 이 스승이 대접해 줄 수 있겠어.”
청난의 고개가 제게 향하자 백매는 순식간에 입꼬리를 슬쩍 올려 이전의 표정을 숨겼다.
“제자가 사존께 받은 것이 많으니, 사존을 모시는 건 당연합니다.”
“왜 그것이 당연해? 내가 널 돌보는 게 당연한 일이지.”
“제 부모도 하지 않은 일을 대신해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널 거두었으니, 그게 내 책임이지. 됐다. 또 반복되지 않느냐. 그럼 오늘은 내가 계산하고 싶은 날로 하자꾸나.”
백매의 굽어진 눈썹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의 벌어진 입은 다시금 말꼬리를 잡을 것 같았다. 청난은 재빨리 그의 손을 잡으며 손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하자꾸나. 응?”
“네, 네. 사존께서 원하시는 거면 뭐든 좋아요.”
백매는 쑥스러워하며 겹쳐진 손 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존, 연화문에는 바로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응.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아. 이곳이 내 생각과 너무 다르니, 하룻밤은 지켜보고 싶구나.”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방을 구하시겠어요?”
“그래야겠지. 그런데 사람이 이리 많으니 방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청난의 불길한 예상대로 이 도시의 몇 없는 여관은 거의 다 방이 차 있었다. 청난은 침울한 백매를 달래며 네 번째 여관에 들어섰다.
이곳은 다른 여관과 달리 외관은 화려하지 못했다. 사실, 잘 정리된 폐가와 비슷했다. 거미줄은 없었지만, 대충 수리된 문은 서로 다른 색의 목재로 때워져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영업 중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청난은 노숙보단 낫겠다는 심정으로 삐걱대는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런 생각은 내부를 보자마자 사라졌다. 같은 건물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내부는 깔끔했으며, 최근 유행에 맞추어져 있었다. 동시에 과하지 않아 깔끔한 미가 돋보였다.
청난은 바로 종업원에게 찾아갔다.
“남는 방이 있을까요?”
종업원은 청난과 그 옆의 백매를, 그리고 마주 잡은 손을 바라보다가 다시 청난을 바라보았다.
“음, 하나밖에 안 남긴 했는데, 괜찮으실 것 같네요. 저쪽에 돈을 지불하시고 절 따라오세요.”
청난은 그녀의 말대로 돈을 지불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방은 하나뿐이라고 하나 청난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한 방에 여러 개의 침상을 두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었다. 이처럼 방이 부족한 지역이라면 대체로 그러하겠지.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선 청난은 또다시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방은 좁지 않았다. 분명 두 명이 하룻밤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아도 침상은 하나였다. 청난이 당황하는 사이 종업원은 이미 떠났고, 백매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는 가져오라 이를까요. 아니면 내려가서 드시겠어요?”
“어… 음… 오면서 주전부리를 먹었더니 배가 부르구나.”
“그럼 다과를 드시겠어요?”
“너는 내가 먹는 걸 좋아하는 줄 아느냐?”
청난은 힐끗 백매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였더라면 아니라며 부정하기 바빴을 텐데, 지금의 백매는 그저 소리 없는 미소만 살며시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이 마치 ‘아니셨나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큼… 그럼 먹자꾸나.”
“네!”
백매는 신이 나서 아래층의 종업원에게 다과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무엇이 그리 신나느냐?”
“제자는 사존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쁩니다.”
“나는 매일 네 덕을 보는데, 그럼 매일 기쁘냐?”
“네, 그렇습니다. 다만, 제자가 부족하여 사존께 충분한 득이 되어 드리지 못했을 테지요. 제가 매일 기쁜 것은, 그저 사존께서 제 곁에 계셔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할 날을 위해 이 지루한 삶을 견뎌 온 것 같습니다.”
백매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청난의 어깨에 기대어 비비적거렸다. 그의 머리카락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하지만 청난은 그의 발언이 마음에 박힌 바위 같아서 마냥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지루한 삶…….’
청난은 백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구불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은 청난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를 위로할 때 하던 행동이었는데, 지금은 청난 자신이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청난에게 바짝 붙은 백매와 그를 쓰다듬는 청난, 그리고 하나뿐인 침상을 순서대로 돌아보았다. 그는 가운데 탁상에 쟁반을 두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나가기 전 자신의 실례를 사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눈치 없게 들어와 버린 모양입니다. 소생이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오니 공자들께서 양해해 주세요. 그럼, 이만.”
백매는 그자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난은 아무 상관 없는 건지 혹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배달된 다과를 집어 먹을 뿐이었다. 백매는 자신이 불결한 상상을 한 것 같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자 바닥을 향했던 그의 입술 앞으로 반지르르한 과자가 내밀어졌다. 그 손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당연 청난이 있었다.
“뭐 하느냐? 너도 먹어야지. 기름에 튀겼는지 아주 바삭하구나. 단걸 좋아하잖아?”
사실 백매는 단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청난이 준 걸 어찌 거절할까. 하여 지금까지 오해를 바로잡지 못하였고, 물론 지금도 바로 잡을 생각은 없었다. 백매는 입을 작게 벌려 청난이 건넨 것을 입에 넣었다.
“맛있느냐?”
“네, 맛있습니다.”
요마는 주로 밤에 출몰하기 때문에, 청난과 백매는 다과를 먹고, 때로는 차를 우리며 단조롭게 시간을 보내었다. 그들의 방은 이 층이었고, 창문이 넓게 트여 있어 이 아래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면면에는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고, 축제 준비로 바쁠 뿐이었다. 그 모습은 지부장에게 전해 받은 두루마기 속 모습과 대비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했다. 아니, 중원 어디에도 이처럼 평화로운 곳은 없었으니 이 자체가 기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