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 아프신가요?”
청난의 신음 소리에 백매가 발을 놓고 몸을 앞으로 빼어 청난을 바라보았다. 그게 세게 누른 것도 아니고, 그저 가볍게 문지른 정도였는데 그것에 놀랐다는 것이 민망하여 손을 들어 가리곤 고개마저 돌려 버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해.”
“네.”
짧게 대답하는 백매의 목소리가 잔잔한 탓에 청난은 과도했던 자신의 반응이 더욱 부끄러워졌다.
백매는 청난의 발 중앙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엄지로 힘껏 눌렀다. 각오한 덕분에 다시금 소리가 새어 나가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백매가 청난의 발바닥을 누른 손가락 끝에 무게를 담아 바깥을 향해 밀어 내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발뒤꿈치를, 발가락 사이를 종횡하며 맘껏 누볐다. 백매는 한참을 휘적이다가 문득 손가락을 멈추었다.
“사존, 정말 괜찮으신 거죠?”
“그, 그렇다니까.”
청난은 속으로 죽을 맛이었다. 그의 손길은 간지러우면서 자극적이었다. 제자의 효심을 거부할 수도 없으니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는데, 이 착한 제자는 간간이 스승의 상태를 살피느라 행동을 멈춰 주기까지 하였다.
더 이상 참기 어려워 그의 손에서 제 발을 빼내려 하였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덤덤하기만 하였다.
“사존, 위험하세요. 혹여 제자가 불편하게 만들었나요?”
“그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되었구나. 그, 그만하렴.”
“정말요……?”
“그, 그래.”
청난은 백매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무룩해 있었다.
“……사존께서 그간 무리한 일정을 행하셨으니 무척 피곤하실 겁니다. 제자가 도와드리도록 허락해 주실 수 없으실까요? 사존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데 어찌 ‘안 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청난은 이번에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 래. 그럼 살살해 주겠니. 살살…….”
“네! 그럼 반대쪽 할게요. 사존.”
백매는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파릇파릇해져 청난의 발에 집중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이면서, 또 동시에 걱정되었다. 방금 느꼈던 것을 한 번 더 한다니. 이쯤 되니 청난은 다른 것엔 신경 쓸 수도 없었다. 혹여나 가쁜 숨소리가 흘러 나가 버릴까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니 백매의 목소리는커녕 자신의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고 먹먹해졌다. 코끝에서 나온 저의 날숨이 따뜻하단 생각이 들었고, 어두운 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별들은 자전하듯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자신이 몸이 공중에 있는지, 아니면 바닥에 닿아 있는지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회평 사존이 숨겨 놨던 술을 한 모금 마셨을 때가 딱 이런 기분이었었나. 그렇게 어느 순간 눈꺼풀이 맞물리며 청난이 털썩 쓰러졌다.
‘모르는 천장이네…….’
청난이 눈을 뜨고 제일 처음 본 것은 처음 보는 무늬의 천장이었고, 그다음으로 본 것은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백매였다.
“매아…….”
“괘, 괜찮으세요?”
백매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앞이 흐린 탓에 그의 표정을 낱낱이 살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청난의 손을 잡은 그의 손가락 끝이 까끌까끌하였다. 신선의 신체에 상처를 낼 사람이 신선 말고 또 누가 있으랴.
청난은 건조한 입을 열었다.
“응. 나는 아무렇지 않단다. 걱정 말거라.”
백매의 두 손은 잡고 있다기보다는 걸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청난이 손을 높게 뻗자 그의 팔이 살며시 떨어져 나갔다. 청난은 백매의 볼을 감쌌다.
“내 제자가 왜 이리 놀랐을까.”
“청 선사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그렇습니다.”
대답을 한 건 모르는 목소리였다. 청난은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눈동자만 굴려도 볼 수 있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청난이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복식이 표국에 와 본 다른 종업원들의 복식과 닮았기에 그가 이곳의 사람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기척을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청난이 일어나자마자 애제자를 달래느라 주변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었다.
청난은 오붓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손을 품속으로 거둬들였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실례는 제가 했죠. 두 분의 시간을 방해했으니까요.”
“사존께서 곤란하실 말은 자제해 주십시오, 지부장.”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부장은 말투는 조금도 비꼬는 것 같지 않았고 그저 성실하고 단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그의 신분을 알게 된 청난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려 하자 백매가 그의 등을 받치며 도와주었다.
지부장은 청난과 백매를 가만히 지켜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두 선사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편히 말씀하세요.”
청난은 백매의 도움을 받아 객실 한편에 있는 화롯불 앞에 앉았다. 어느새 준비한 것인지 그 앞에는 막 우린 것처럼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청난은 백매가 따라 준 찻잔을 들었다.
“두 분은 어찌 사제지간이 되셨습니까? 혹여, 신선이신가요?”
아직 마시지 않아 다행이지. 청난은 하마터면 입 안의 것을 뿜을 뻔했다. 청난이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그의 눈썹만은 솔직하여 움찔거렸다. 다행히 지부장은 청난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청 선사께서 더 젊으신 듯한데, 화 선사가 사존으로 모시고 계시니, 이 범부에 불과한 사람은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아, 그렇군요.”
청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백매의 모습만 보고도 신선이라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여간내기가 아닐 것이다. 청난은 보다 편안해진 표정으로 답하였다.
“과거에 인연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필히 범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겠지요. 애써 묻지 않겠습니다.”
“네 좋아요.”
청난은 시선을 잠시 돌려 차를 마심으로써 이 주제의 대화를 끊어 내고, 새로운 주제를 열었다.
“혹여 지부장께선 제가 쓰러진 연유를 짐작하시나요.”
“그럼요. 별거 아닙니다. 탕에 오래 계셔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많은 손님들이 그러하십니다.”
“흠… 예전엔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보통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웬만해선 그럴 일이 잘 없긴 합니다. 요즘 피곤하셨었나 보네요.”
“아무래도 그랬나 봅니다. 그래도 덕분에 편히 쉬었습니다.”
청난은 마시기 좋게 식은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옆에 앉은 백매를 힐끗 보니 역시나 불쌍한 강아지 꼴이 되어 있었다. 청난은 한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주물럭거리며 장난을 걸었다. 백매는 당황하는가 싶더니 순순히 제 손을 바치었다. 그의 표정도 보다 편안해졌다.
“저 때문에 헛걸음을 하셨나요?”
“헛걸음이랄 게 있나요. 계단 몇 칸 오를 뿐인걸요.”
‘오긴 왔었다는 거구나.’
겸손하면서도 제 고생을 빠트리지 않는 것이 꽤나 말재주가 있었다. 이곳이 심경의 친가가 맞는 걸까. 진영의 친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지부장은 천천히 청난에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그를 지나쳐 반대편에 있는 창문으로 갔다. 창문을 닫고 잠금을 걸고 두어 번 당겨 보기까지 하며 완전히 잠긴 것을 확인한 그는 그제야 본론을 꺼내었다.
“선사님께선 어떤 요마의 흔적을 찾는다고 하셨지요?”
청난과 백매는 심수표국을 비롯하여 심경과 진영, 그 누구에게도 진짜 목적을 알리지 않았다. 불안을 주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일반인들은 쌍영근이나 수야각 술법과 같은 것들을 알 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이 알아도 딱히 도움받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적당히 둘러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이 길을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어 가는데, 영 수확이 없네요. 그 탓에 귀 표국의 정보력에 기대게 되었습니다.”
“부디 두 분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저희도 꽤나 큰 걸 걸고 도와드리는 것이거든요. 그들에게 미움받았다간 이 일도 접어야 할 테니까요.”
“표국의 고객이 관련되어 있는 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마 중원의 그 어떤 단체도 그곳에 미움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
청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굳게 다문 입매는 감정을 꾹 참는 것처럼 움찔거렸고, 눈썹 사이에는 소소한 골짜기가 생겨났다.
“짐작되시나 봅니다.”
“네. 아쉽게도.”
지부장은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들은 민간인들의 희망인데, 그들이 더러운 일에 연관되어 있다면 배신감이 들 터이다. 지부장은 가까이 와 청난의 빈 잔을 채워 주며 말하였다.
“그들이 어떤 형태로 연관되어 있는지, 또 연관되어 있는 건 맞는지 확실한 건 없습니다. 다만 기이한 일을 찾으시기에 소문을 전해 드릴 뿐이니, 벌써부터 상심하진 마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자세한 건 여기 적어 두었으니 살펴보세요.”
지부장이 넓은 소매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 건네주었다. 청난은 그것을 바로 읽지 않고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떤 내용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그의 앞에서 표정 관리를 잘할 것이란 장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건을 끝낸 지부장은 지체 없이 굳게 닫은 문을 열었다. 청난은 그제야 이 방의 문이 두 겹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 다음 지역으로 가는 호송 의뢰가 있어서 청난과 백매는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백매의 걸음이 훨씬 빠르지만, 이제껏 다닌 곳들과는 유형을 달리하는 곳이었으니 신중히 생각하여 눈에 덜 띌 방안을 선택한 것이었다.
목적지는 남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