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랑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방은 보편적인 여관의 방보다 큰 크기였다. 침구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으며, 향도 피웠던 것인지 나긋한 향도 돌았다. 한편에는 곱게 개어진 나삼이 눈에 들어왔다. 꽤나 본격적으로 접객 준비가 되어 있는 방의 모습을 곳곳이 살피자 랑이 덧붙였다.
“저흰 중요 고객을 상대로 숙박업도 겸업하고 있거든요. 여기서 가장 좋은 방이에요. 아가씨 친구분이라니까 지부장이 인심 썼죠.”
“이곳 분들은 심 소저를 아끼나 보네요.”
“네에- 맞아요! 아가씨께서 어리실 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거든요. 특히 이곳을 자주 오셔서 여기 식구들과 친해요.”
아직 십 년도 안 산 듯한 아이가 어릴 때를 논하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하지만 청난은 표 내지 않고 그에 장단을 맞췄다.
“심 소저는 어떤 아이였나요?”
“네에- 알려 드리고 싶지만 저는 바빠요.”
“그것참 아쉽네요. 참, 저희가 받기로 한 정보가 있었는데, 언제 들을 수 있을까요?”
“그건 지부장이 직접 와서 전해 드릴 거예요. 우선 쉬고 계세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문단속 잘 하시구요오!”
랑은 허리를 숙이고 검지를 우뚝 세우며 강조하였다.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있는 건가요?”
“그, 그건… 몰라요! 어쨌건 아무도 들으면 안 돼요!”
랑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는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청난은 아이가 멀리 떨어졌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귀엽네.”
“귀엽나요?”
“응. 난 아이들을 좋아하거든.”
“아이는 다 귀엽나요?”
“맞아.”
청난은 침상으로 가 옷도 벗기 전에 털썩 앉았다. 후, 숨을 내쉬며 몰린 피로를 풀던 청난의 눈에, 여태 문 앞에 서 있는 백매가 보였다. 그는 뭔가를 주저하는 듯 손끝을 주물럭거렸다.
“거기서 뭣 하느냐?”
“그… 그럼… 혹시 제자도…….”
갈피 잃은 눈동자가 청난을 힐끗거렸다. 저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귀여웠냐고?”
“그것이…….”
“응. 귀여웠지. 네가 얼마나 작았는지 넌 기억 안 나느냐? 이만했었지.”
청난은 자신의 허리쯤을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처음 만났을 때 백매가 청난의 허리 정도에 겨우 닿은 건 맞았으나, 지금의 청난은 그때보다 작았고, 더구나 지금은 앉아 있기까지 하니 그 높이는 너무나 낮았다.
“그렇게까지 작지는 않았어요.”
“그게 중요하느냐?”
백매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난 네가 어떻게 생겼든, 얼마나 크고 얼마나 작든 상관없어. 알겠느냐? 그러니 그런 건 신경 쓰지 마라.”
백매는 누가 보아도 어여쁜 절세미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삼백 살이 넘었든, 그렇지 않든 자신은 그의 스승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어여쁜지 알려 주는 것보다는 그의 외모가 크게 중요치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어야 했다.
물론 그라면 그것쯤은 알겠지만, 그에게 좋은 것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스승 된 마음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옳지.”
청난은 휴식을 취하려고 머리를 풀어 헤쳤다. 지부장이 온다 하여 잠들 순 없었지만, 병자들을 돌보느라 노곤해진 몸을 잠시라도 눕히고 싶었다. 그렇게 청난이 불편한 차림새로 침상에 기대려고 할 때, 창밖을 보던 백매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존, 주무실 건가요?”
“아니. 지부장이 온다고 했으니 그럴 수야 없지.”
“그럼, 온천욕을 즐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온천욕?”
여긴 이 층인데?
청난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백매가 창밖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었다.
“여기, 노천 온천이 있습니다.”
청난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휴식을 맛본 육체가 침상에 진득하게 붙어, 일어나기 고되었다. 청난이 백매의 옆으로 가자 백매는 기관 장치마냥 자연스럽게 청난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청난은 백매가 가리켰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정말 온천이 있었다. 이곳은 이 층이었는데, 창 너머는 바로 땅이 닿아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이 건물은 산 사이를 파서 지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층 창 바로 앞에 이런 노천 온천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겠지.
연기가 가득 피어올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바깥에 불빛이 훤하다 하여도 요마가 득실대는 이런 시국에 산에 들어가는 건 꺼림칙한 모양이겠지. 자신들에게 이런 방을 안내해 준 건 자신들의 실력을 믿은 걸까, 아니면 빈방을 준 것뿐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청난은 옷고름을 풀어 홀라당 외의를 벗었다.
“아, 아니… 사존!”
“응? 왜 그러느냐.”
“여기서, 옷을 벗으, 시면…….”
“그럼, 온천욕을 하는데 옷을 입고 할까?”
청난이 중의까지 벗자 백매는 시선을 돌리는 와중에도 그의 옷을 받아 들어 한쪽에 정리하였다.
청난은 창틀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후 몸을 돌려 바깥으로 향했다. 발끝으로 땅을 눌러 보니 단단한 것이 갑자기 무너질 걱정은 없었다.
청난은 머리를 풀고, 나삼 한 겹만을 입은 채 산속을 거니니 다소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자연 속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청난이 뒤를 돌아 방금까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표국의 창문이 한 폭의 족자이고, 창 너머의 광경이 그 속에 그려진 그림 같았다. 그럼, 이것은 미인도일까. 그런 생각에 청난은 나지막이 웃었다.
청난은 그 그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만 보낼 테냐?”
“아, 아닙니다. 제자도 갈게요.”
백매는 서둘러 창틀을 밟으며 건너왔다. 온천은 표국 건물 안에서도 보일 정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금방 도착하였다. 청난은 살며시 앉아 발목을 담갔다. 뜨뜻한 온도가 발을 타고 올라오자 온몸이 전율했다.
“크으, 시원하다.”
청난은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에 뒤늦게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느새 청운의 입버릇이 옮아 버리고 만 것이었다. 곧 백매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하, 태사존 같으시네요.”
“하하… 그러하냐? 아무래도 내가 그분께 이런 것마저 배워 버린 모양이구나.”
청난은 수야산에 있던 작은 온천이 생각났다. 청난이 어릴 때, 그의 스승 유회평이 아직 수야각주가 되기 전에는 그를 데리고 온천욕을 즐기곤 하였었다. 그때마다 시원하다며 연신 신음을 내뱉는 그가 이해가 안 되었었다. 그곳은 주로 수행에 이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삼백 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서야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백매는 아직 옷을 단정하게 입은 채로 서 있었다.
“너는 아니 들어오느냐?”
“예. 제자는 언제나 청결이 유지되어 괜찮습니다. 여기서 사존을 지키고 있을게요.”
“호오……. 신선의 몸은 정말 편리하구나.”
“사실… 신선이라서가 아니라… 법기를 쓰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법기?”
백매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작은 향초 주머니를 꺼냈다. 얼핏 보아서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가운데 쓰여 있는 ‘청(淸)’이 금빛을 띠고 있으니 평범하지 않기도 하였다.
청난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에도 생각했는데, 참 여러 종류의 법기를 가지고 있구나. 신선들은 모두 이러하냐?”
“이러한 신선들도 있고, 아닌 신선들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의 일에 대해 단서를 찾기 위해 여러 법기를 모으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우연히 구했던 건데, 쓸모가 없어 다른 신선에게 넘겨주었다가 최근에 돌려받았습니다. 그저 외관만 깔끔히 보이게 할 뿐 다른 기능은 없는데, 원하신다면 사존께 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나보다 네가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
무인은 아무래도 더러워질 일이 많았다. 백매가 그런 점을 신경 쓴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는 전생에도 깔끔하며 단정한 용모를 유지했었지만, 그건 수야각의 규범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보니 원래 성격이 이러했던 모양이었다.
“그럼 너는 거기 서서 내가 씻는 걸 지켜만 보겠다고?”
“으음… 아무래도 사존께서 불편하시겠죠……?”
“내가 불편할 게 있느냐. 너 어릴 땐… 응?”
청난이 말하는 사이 백매는 첨벙이며 탕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탈의를 하지 않은 채였기에 옷가지들이 흠뻑 젖어 피부에 달라붙었음에도 그의 몸매가 두드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흑요석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물에 닿으니 더욱 굴곡졌고, 그것이 하얀 피부 위를 어지럽히니 그것만으로 꽤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청난은 그가 탕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로는 놀라지 않았다. 워낙 그러한 아이였으니.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풍기며 한쪽 무릎을 접어 앉은 데다가 제 발바닥을 잡아 올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려는 거야?”
“제자가 피로를 풀어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으앗.”
청난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 백매가 발을 들어 버리는 바람에 자연히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그 탓에 고개를 내려 제 몸 아래에 있는 백매를 보려고 하여도 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만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저렇게 초롱초롱하고 어여쁜 눈을 가진 아이에게 ‘안 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연히 청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할게요. 아프면 말해 주세요.”
“그, 그래…….”
청난은 어쩐지 긴장되었다. 생각해 보니 누군가 제 발을 만진 적이 없었다. 누가 있겠는가. 전생과 현생을 모두 따져 보아도 청운이 목욕시켜 주던 어린 시절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백매의 손가락이 청난의 발바닥에 닿았다. 청난은 하마터면 ‘흐읍’ 하는 숨소리를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청난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으읏…….”
그 노력의 성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