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이튿날, 요마의 습격으로 폐허가 된 지반 위에 거대한 바위가 생겼다. 그것의 높이는 이십 척은 되었으며, 둘레는 성인 남성 여섯이 양손을 뻗어도 다 감싸지 못할 정도였다. 누가 이것을 옮겨 놓은 것일까. 그 기이함에 마을 주민들은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나와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설마 또 요마 같은 건 아니겠지?”
“어, 자네 왔는가. 걱정 말게. 이건 그 선사님이 가져왔다고 하네.”
“아아, 그 선사님이?”
날카롭게 긴장되었던 분위기는 ‘선사’라는 단어 하나로 빠르게 환기되었다.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구한 수사. 최근 들어 생긴 수선자에 대한 좋은 인상과 더불어 그에게 받은 실질적인 도움 탓에 백매는 거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백매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반가워하긴커녕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그 영웅과 단 한 치도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걸어온 자가 사도이기 때문이리라.
청난은 저를 향한 좋지 않은 눈초리들은 가볍게 무시하였다.
“이렇게 큰 게 이 근처에 있었나요?”
“음… 사실 좀 멀리서 가져온 거예요. 몇 개 이어 붙이기도 했지만요.”
“고생하셨네요.”
“별거 아닌 일로 추켜세워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백매가 쑥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가 도력 높은 선사라는 말을 들은 마을 주민들은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수줍은 청년일 뿐이지 않은가. 그에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선사님, 왜 갑자기 신상을 세우시는 겁니까?”
“필요해서 그럽니다.”
질문을 던진 주민은 그가 청난에게 대답한 것처럼 저에게도 온화한 대답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랭하기 그지없어 얼이 나갔다.
“주민들은 큰일을 겪은 후지 않습니까. 많이 불안하실 겁니다.”
청난이 나서 그를 변호하자 백매가 뚱한 표정을 접고 비교적 부드러워진 말투로 대답을 이었다.
“저는 곧 떠납니다. 하지만 제 친우가 은혜를 입은 곳이니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하여 신상을 세워 이곳을 비호할 것입니다.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쪼록 이곳에 오시는 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수선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한 마을 주민들은 아무런 의심도,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저 저들이 방해가 된다 하니, 그날의 공포가 남아 있는 이들은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자 청난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편하게 말하였다.
“전부 쫓아낼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
“눈빛이 맘에 안 듭니다.”
백매가 고개를 기울여 청난의 어깨 위에 툭 떨구었다. 백매가 비비적거리자 청난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린 제자의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사존을 나쁘게 보는 자들은 전부 싫습니다.”
“그래도 내 사람들이지 않으냐. 다들 겁이 많아서 그렇다. 좋아하지 않아도 되니 너무 원망만 하지 말아 주렴.”
“하지만… 사존 덕분에 산 것인데 저리 대하니 너무나 괘씸합니다.”
“죽을 뻔했기에 그런 것이지. 또다시 위험해질까 두려워서 말이야. 전생에 겪은 것들에 비해 저런 감정은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그들이 안타까울 뿐이지. 자, 이젠 이 스승에게 네 능력을 보여 주겠니. 저걸 어떻게 깎아 낼지 궁금하구나.”
“으음……. 네, 그럴게요.”
백매는 아쉬워하며 머리를 비비적거렸으나, 이윽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어느새 어린아이에서 무인의 눈빛이 된 그는 바위의 앞에 서서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매우 낯익은 검이었다.
‘내가 준 검을 아직도 쓰고 있구나.’
삼백 년 전에 그에게 준 첫 번째 진검. 그때 당시에는 청난이 고르고 고른 명검이었지만 신선이 쓰는 법보에 비하면 턱없이 시원찮은 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환생한 이후 백매가 검을 쓰는 걸 본적이 없었어.’
동굴 안에서는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때문에 청난은 그가 보여 줄 초식에 기대가 서렸다.
백매는 무릎을 살짝 굽히더니 용수철처럼 단숨에 튀어 올라 바위의 정상에 올라갔다. 그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 만큼 그의 검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발전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더 예리해졌으며,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이 또한 매우 익숙했다.
그의 검이 펼쳐지자 청난은 감탄을 내뱉다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모습이 자신의 전생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검법은 스승인 자신이 알려 준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삼백 년이 훨씬 지났다. 그동안 백매는 많은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실력도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취월장하였다. 그럼 자연히 자신에게 배운 것 위에 새로운 것이 덧씌워져야 마땅하지 않나?
그가 자신을 잊지 않으려 무슨 노력을 했을지 상상이 가서, 가슴이 아팠다.
떠나 버린 사람을, 다신 보지 못할 사람을 떠올리며 가슴속에 새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청난은 그가 겪었을 고통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백매는 청난에게서 반응이 끊기자 의아해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청난은 나름 표정 관리를 한 것이었는데, 그것만으로 백매를 속일 수 없었다.
“사존, 왜 그러세요? 무엇이 사존을 속상하게 만든 거죠? 제자가 해결해 드릴 수 없는 건가요?”
“그냥… 그냥 배고파서 그런다. 들어가자꾸나. 오늘은 너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구나.”
“전 계속 사존의 시야 안에 있을 거예요.”
청난이 백매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이 정도로 가까운 게 좋아.”
백매는 맞잡은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네. 제자는 사존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백매의 손끝이 굽어지며 청난의 손을 감싸 안았다.
신상은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첫날은 전체적인 덩어리가 잡혔으며, 둘째 날은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셋째 날이 되자, 영광스러운 해류진군, 백매선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여타 다른 신상과는 조금 달랐다. 검이나 법기를 들고 있지 않으며, 화려한 장신구로 꾸미지도 않았다. 그저 허리춤에 묶여 있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신상의 모습은 영험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불과 사흘 만에 완성된 것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영험한 신상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주민들은 그 앞에 각기 다른 음식들을 펼쳐 놓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청난은 조금 떨어진 곳 지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연하게도 그의 옆에는 백매가 함께하고 있었다. 백매는 팔짱을 낀 채 자신에게 각기의 소원을 바라는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청난은 그런 백매를 신상과 함께 번갈아 보았다.
‘역시… 누굴 닮았는데…….’
신상은 본디 그 신을 본떠 만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신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청난은 전생한 이후 선계에도 올라 여러 신선들을 만나며 다소 감각이 둔해졌지만, 그럼에도 신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밤을 지새우는 이런 일과가 대부분의 사람은 겪지 못할 특별한 것임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러하여 인계에서 만들어지는 신상들은 대체로 그 신선들의 일화를 바탕으로, 장인 개인의 해석을 담아 만들어진다. 그 탓에 실제와 닮은 신상이 있는 반면에 성별까지 다른 신상도 있었다.
백매는 자신이 신선이면서 장인이었으니, 개인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조각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그를 그저 인간인 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와 닮은 다른 이목구비가 나왔다. 한데, 청난은 아무래도 그 신상이 백매를 닮았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닮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참… 취향이 한결같구나.”
“네, 언제나 같습니다.”
황당하여 나온 혼잣말이었는데, 백매가 뿌듯한 듯 해사하게 대답하니 청난은 얼이 나갔다. 이 아이는 이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최근에는 거의 밥 먹듯 하루 세 번은 하는 것 같았다.
청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신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것이 너를 대신할 수 있다고?”
“네. 보통 신앙은 저에게 와 법력이 됩니다. 그럼 저는 그 법력으로 신자들의 기원을 들어주죠. 저것에는 손을 좀 써 두었습니다. 법력이 제가 아닌 신상에 쌓이는 것이죠. 그렇게 설치해 둔 진법으로 결계가 유지될 거예요. 자신들의 힘으로 마을을 지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도움은 그만 받고 자립할 때가 되었어요.”
“아직도 토라진 것이냐? 말했잖느냐. 겁이 많을 뿐이라고.”
“모든 겁 많은 자들이 똑같이 행동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진영도 겁이 많지만 사존께 잘합니다.”
“음… 그래도 네가 진 공자를 좋게 보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그야 사존의 혈육이잖아요. 성격은 다르지만 그는 꽤 사존을 닮았습니다. 아마 진 사백을 닮은 것이겠지만요.”
“형님을 기억하느냐?”
“물론이에요.”
“그럼 형님께서는…….”
어쩌다 죽었느냐.
청난은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존, 이미 날이 숱하게 지났습니다. 지난 일로 속상해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청난도 알았다. 자꾸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자신만 상처받을 것을. 하지만 이성과 감정은 별개이기에, 가라앉은 마음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사존, 가까이에서 구경해 보시겠어요?”
시력이 좋지 못한 탓에 안 그래도 가까이서 보고 싶던 차에 이런 제안을 받으니, 호기심이 우중충한 기분을 몰아내었다.
“응, 좋아.”
백매는 청난의 허리에 팔을 둘러 제 몸에 바짝 붙여 지붕 아래로 내려갔다. 완전히 안아 드는 것이 더 편하고 안전했지만, 그 모습은 누가 본다면 다소 낯부끄러울 것이기에 청난이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