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62)화 (62/111)

#62

어느 날 한 문파에서 수야각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수야각뿐 아니라 수선계에서 이름을 드높인 거대 문파의 대표 격인 사람들이 두루 모였었다. 명목은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접대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호화로운 연회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무희였으며, 아쉽게도 수선계에도 제힘과 별것 아닌 권력을 믿고 설치는 무뢰한들은 존재했었다. 연회를 연 문파에서 손꼽히는 위치에 있던 자가 무희를 공개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악의가 담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서서 말리는 자가 없었다.

“그때! 그 선사께서 앞으로 나섰습니다.”

청난은 회상에서 돌아와 진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분께서 그날은 붉은 의복을 입고 있으셨다고 해요. 그 탓에 술에 취한 무뢰배가 그분을 무희로 오해하고 춤을 추라 요구했죠. 그분은 바로 수락하셨어요. 그분의 사형제들께서 나설 틈도 없었죠. 그분께서는 검무를 보이겠다 하셨어요. 기록에 남겨진 바로는 그분이 한 바퀴 돌자 꽃이 만개한 듯한 아름다움이 펼쳐졌다고 해요. 그 무뢰배는 그 모습에 현혹되어 같은 누를 반복하였어요. 그러자 그분은 단숨에 그를 찔러 들어갔어요. 무뢰배 또한 실력이 뛰어난 자였으니 한 수에 당하진 않았죠. 그 둘은 서로 십몇 합을 나누었는데, 그 수사는 공격을 하는 것보단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해요. 결국 무뢰배는 패배를 인정하고, 그곳에 있던 많은 후지기수들이 그 위력을 입에 담았죠.”

“진 공자는 그 이야기를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무예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요. 혹시 이 선사께서 진 공자의 선조신가요?”

“그건 아니에요.”

심경의 질문에 진영이 대답했다.

“제 선조의 동생분이시죠.”

그렇다. 이건 진영의 선조인 진주국의 동생, 즉 진청난의 일화였다.

백매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청난의 일화에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청난은 그가 말실수를 할까 또다시 그의 입에 당과를 물려 주었다. 입 안이 가득 차 버린 백매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끼어들 수 없었다.

“화 선사께서 당과를 참 좋아하시나 보네요.”

“네, 맞아요. 좋아하십니다.”

진영의 말에 청난이 대신 답하며,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는 어미 새처럼 계속해서 당과를 넣어 주었다. 이야기의 주제가 그것에서 멀어질 때쯤이 돼서야 청난의 손은 쉴 수 있었다.

어느덧 창 너머로 노을빛이 스며들어 왔다. 방금까지 한 새로운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진영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였다. 진영이 일어나자 심경이 눈치껏 함께 일어났다.

“너무 늦게까지 폐를 끼쳤네요. 저흰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청 책사, 화 선사. 오늘 하루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무예에 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심 소저.”

“나오지 마세요. 책사께서 탈이 나신다면 진 대인께서 절 책망하실 겁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들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청난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청난의 빈손이 허공에서 꼼지락대자 곧 백매의 굵은 손가락이 찾아와 달래 주었다. 백매는 청난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청난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제 막 문밖을 나서는 두 손님을 불러 세웠다.

“진 공자, 심 소저, 저희는 곧 마을을 떠나려고 합니다.”

청난의 어조는 평온하였지만, 그 내용은 그러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청난에게 성큼 다가왔다.

“어, 어째서요?”

“혹여, 저희가 책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나요? 저희 자매형제들이 충성심이 강하다 보니 경계를 하여 그렇지 청 책사를 나쁘게 보진 않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호되게 혼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정하세요 진 공자, 심 소저. 아예 떠나려는 게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껏 여력이 없어 미뤄 두었는데, 화 선사께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이제야 마음이 서네요.”

진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말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청난은 자신과 사는 세계가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해할 수도 없겠지. 하여 진영은 굳이 묻지 않았다.

“저희가 미워진 게 아니시라니 다행이에요. 일이 끝나시면 돌아오실 테죠?”

“물론이에요. 아버지도 계신걸요.”

“좋아요. 그럼 제 어머니께서는 알고 계시나요?”

“아직이요. 내일쯤 진 대인께 찾아가 말씀드릴까 합니다.”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떠나기 전까지라도 쉬세요. 어머니껜 제가 말씀드릴게요.”

“저도 대인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두 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청난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다시금 우의를 다진 듯한 뿌듯한 감정을 안고, 보다 안전해진 거리를 통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청난은 문득 그 둘의 우애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다음에 만날 때는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져 있을 것 같았다.

청난은 청운이 달여 준 약탕과 온종일 제 옆을 지키며 지극히 간호해 준 백매 덕분에 침상에 누운 지 나흘째 되던 날에는 상쾌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겨우 돌아다니는 걸 허락받은 청난은 해가 오르는 동안 산책을 하고 서재를 정리하였으며 차를 마시기도 하는, 이른바 평온한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다시금 손님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손님은 진영과 심경이었다. 그들은 허투루 온 것은 아닌지, 청난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두 눈에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진영은 화법에 뛰어났으니, 제 본론을 바로 토로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청 책사, 푹 쉬셨나요? 정말 좋아 보이십니다. 어느 무인과 겨루어도 손색없이 건강해 보이세요.”

“너무 과장되었습니다, 공자. 하지만 좋아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네, 아버지와 화 선사께서 고생해 주신 덕분에 쾌유했습니다.”

청난의 안색이 훨씬 좋아졌다고는 하나, 애초에 희멀겋고 얇은 피부와 깡마른 몸을 가졌으니, 아무리 좋게 보아도 무인과 비견하는 건 세상 모든 무인들에게 실례가 될 법했다. 아마 며칠 전 대화에서 청난이 무예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알고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과연 그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번에도 백매가 그들을 탁상 앞으로 안내했다. 진영은 어째서 찾아올 때마다 백매가 청난의 방 안에 당연한 듯 있는지 의아했지만, 이번에도 사생활에 굳이 말을 얹지 않았다.

“화 선사께선 어째서 늘 청 책사의 방에 계신 겁니까?”

안타깝게도 심경에게는 그러한 눈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언변 능력은 백매도 지지 않았다.

“하늘 같은 친우가 앓고 있다 하니, 이른 아침에 와 간호하고 있었습니다.”

“하늘 같은?”

조금 이상했지만.

백매는 그런 의문을 풀어 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고, 청난은 차마 할 수 없었으며, 진영은 괜한 말은 안 하는 주의였으니, 심경은 아무도 풀어 주지 않는 의문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막 끓어오른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인 진영이 본격적인 화제를 꺼냈다.

“어머니께 책사의 향후 계획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책사를 응원한다 하셨어요. 그러면서 덧붙이시길, ‘한번 전우는 영원한 전우. 내 책사의 뜻을 전심전력으로 돕겠네.’라고 하셨습니다.”

진 대인의 성대모사를 하며 어울리지 않게 눈썹 사이를 구겼던 진영은 대사가 끝나자마자 푸흐 웃으며 제 이마를 손가락으로 눌러 폈다. 그러더니 금세 표정을 정리하고 청난과 백매 사이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옴짝달싹하였다.

“무엇을 그리 말하기 어려워하시나요. 편히 말씀하세요.”

“그게……. 제 능력이 부족하여 화 선사의 도움은… 계속 필요할 성싶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진영이 보기에 청난과 백매는 평범한 지기 사이는 아닌 듯하였고, 지난날 청난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으니 그들은 함께 떠날 것 같았다. 한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그에게 남아 달라 부탁하려고 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제 할 말을 끝낸 진영이 눈썹 앞머리를 올리며 백매의 표정을 살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안타까워 보이는지 진영은 모를 것이다. 청난이 눈동자를 굴려 옆에 앉은 백매의 표정을 살폈다.

백매는 만사에 무심한 편이었지만, 표정마저 단조로운 건 아니었다. 지금도 꽤 당황해하지 않는가. 평소에 이런 표정을 대면하는 사람은 청난이었는데, 지금은 백매가 대면하고 있으니 이 상황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도 백매는 나았다. 청난은 백매를 이길 수 없었지만, 백매는 진영에게 칼 같은 대답을 하는 것 따위는 가뿐할 것이다. 하지만 아랑 마을은 청난에게도 중요한 곳이었으니 그의 대답이 걱정되는 건 청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는 당연히 책사와 함께 갈 겁니다. 하지만 책사의 고향인 이곳을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 마세요.”

“장기간 떠나시는 것이면, 이 결계는 사라지는 게 아닙니까?”

“일반적인 경우엔 그렇죠. 힘의 근원이 끊길 테니. 하지만 대신할 것을 세워 두면 괜찮습니다.”

“대신할 것이라니, 무어냐?”

청난은 자신이 습관적으로 말을 놓고 말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백매의 대답을 기다렸다.

청난의 지식으로도 술사가 장기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지되는 술법은 없었다.

청난의 또렷한 시선을 눈치챈 백매가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화답하였다.

“신상을 세울 겁니다.”

“예?”

전혀 예상치 못한, 생뚱맞은 단어에 오직 진영만이 어리둥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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