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61)화 (61/111)

#61

“이리 오너라. 네 얼굴이 보고 싶구나.”

백매는 부끄러운 와중에도 사존의 말씀에 충실히 따랐다. 그는 고개를 돌렸을 뿐 청난과 한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더 가까이서 보고자 한다는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따라 침상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의 얼굴 가운데 높게 솟은 두 산 사이의 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러자 청난은 그를 왜 불렀었는지 순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

청난이 서둘러 말을 떠올리며 우선 서두를 떼었는데, 백매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듯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았다.

“누가 오고 있네요. 두 명.”

“흐음?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연화인가? 바쁘다곤 하나, 예전에도 이유 없이 인계를 들락날락하였었으니 나를 핑계로 업무에서 빠져나왔을지도 몰랐다. 마침 백매가 달콤한 차를 우렸으니, 이를 마시며 그에게 못다 한 말을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어느새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고, 곧 똑똑 가벼운 문 두드림 소리가 들렸다.

“난아, 깨어 있느냐. 진 공자와 심 소저께서 오셨다.”

그 두 사람이 왜? 의아하였지만 그 둘을 세워 둘 수 없는 요량이었다.

“아, 제가 맞이하러 나가겠습니다.”

“하하하, 벌써 왔어요. 책사.”

청난이 침상에서 일어나려던 찰나에 목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서는 진영과 심경이 서 있었다.

진영이 부채를 넓게 펼쳐 가볍게 흔드는 모습이 황도에 있을 대갓집의 풍류 공자 못지않았다. 심경은 갑옷이 아닌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억지로 입기라도 한 것처럼 펄럭이는 치마가 퍽 불편한 듯 보였다.

청난은 일어나 그들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차림이 손님을 맞기에 마땅치 않아 그러지 못했다. 청운이 자리를 떠나자 두 손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청난이 여전히 앉아 있으며, 한 겹의 나삼을 입고 있고, 백매가 그런 청난과 단둘이 방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백매는 당연하다는 듯 그들을 침상 가까이에 있는 낮은 탁상 앞으로 안내해 주었다.

“두 분께서 오실 줄 몰랐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당연히 생겼죠. 청 책사께서 편찮으신데 이것이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책사의 병문안을 온 것입니다.”

“두 분께서 신경 써 주시니 감읍합니다.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닌데 두 분의 시간을 뺏은 걸까 걱정이네요.”

“섭섭한 소리 마세요. 제 은인이자 지기가 아프다는데 정도가 무슨 상관인가요. 제가 오지 않는다면 천하의 상놈일 겁니다.”

‘오…….’

그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나올 줄 몰랐다. 몸이 연약해 산속에서 지내다 최근에야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청난은 그를 가르친 수사가 참 속세를 좋아했나 보다 싶어 굳이 의아함을 표현하지 않았다.

마침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고, 청운이 간단한 다과를 가져다주었기에 손님맞이에 나쁘지 않은 다과상이 되었다. 더구나 바람까지 그윽하였으니 담소를 나누기엔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것을 마다할 자가 몇이나 있을까. 제 사존의 안위만 생각하는 백매도 이 순간은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휴식 시간을 즐겼다.

대화는 대부분 소탈한 것들이라 그때그때의 즐거움만 이야기할 뿐 새 소식을 접할 순 없었다. 그 와중에 청난은 그들에 대한 소소한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진영은 시와 그림에 조예가 깊은 풍류 공자였다. 외출하기 어려웠던 그는 진 대인이 구해다 주는 귀한 책들로 시와 그림을 두루 보았다고 했다. 청난은 전생에 사군자화에 빠져 틈만 나면 난을 치곤 하였었다. 진영은 본 것이 많았고, 청난은 손으로 익혔으니 그 둘은 서로 부족한 것을 나누며 이야기를 꽃피웠다.

“참, 듣기로는 청 책사의 이름은 본인이 정했다 하지요?”

진영의 뜬금없는 의문에 시선이 모조리 청난에게 쏠렸다.

“아…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네, 맞아요.”

진영이 부챗살을 넓게 펼치며 웃음을 흘렸다.

청운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에는 타인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기에 이웃과의 교류 또한 즐겼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청난을 키우느라 다소 경계심이 생겨,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건 여전히 좋아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좀체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그가 그 옛날이야기를 하였다니, 진영의 화술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체감되었다.

청난은 생각을 더듬듯 조금의 뜸을 들이다 대답하였다.

“제가 난초를 좋아했다곤 하던데. 글쎄,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청난은 그날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났지만, 그 정도로 어릴 때를 기억한다면 기이하게 볼 테니 거짓말을 해야 했다. 진영 또한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는 곧바로 ‘단아한 난초 그림을 보았었는데-’로 시작하는 주제로 넘어갔다.

청난은 오래간만에 그날을 추억하였다.

청운에게 구조된 청난은 한참을 앓았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아이의 이름을 정할 수 있겠는가. 석 달을 ‘아가’라고 불렸었다. 그 후에는 이름을 고민하는 데에 석 달을 더 허비했다. 이미 늦은 김에 며칠 더 고민하여 좋은 이름을 짓겠다는 결심이 하루 이틀 쌓이다 석 달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석 달 동안 청난이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청운의 작명 감각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러다 자신의 이름이 ‘아랑이’나 ‘꽃돌이’ 같은 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리 이름 따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여도, 그런 이름을 넙죽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여 청난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고민하던 찰나에, 청운이 들여온 갖가지 그림 중 난초화를 발견했다. 청난은 겨우 기어 다니는 아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오만 가지를 동원해 겨우 청난이라는 이름을 얻어 내었다.

대화는 수시로 주제로 바뀌었고, 그 주체는 대체로 진영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였으며, 이전에 이야기하였던 주제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진영은 다시 주제를 회귀하였다.

“첫 만남 때부터 줄곧 생각해 왔는데 말이죠, 청 책사께서는 굉장한 미인이십니다. 만약 책사께서 황성에 태어나셨더라면, 책사를 얻으려는 자들이 떼로 나타났을걸요.”

“저를 얻어 어디 쓰겠다고 떼로 헛짓을 하겠습니까.”

“책사께서는 온 주민들의 은인이신데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가 무어가 되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실례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는 화술의 귀재였다. 청난은 곧바로 말을 고쳤다.

“좋아요. 그럼 전 나름 쓸모가 있는 사람이네요. 하지만 너무 과장하진 마세요. 저보다 훌륭한 자들이 천지인데 이 정도 재주로 그런 호평을 들으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답니다.”

청난이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차를 홀짝이자, 이번엔 옆에 앉아 있던 백매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누가 사아아… 책사께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제 자신이 그리 말합니다. 자, 이게 참 달고 맛있으니 선사께서도 드세요.”

청난은 그가 흥분하여 말실수라도 할까 봐 그의 입 안에 당과를 넣어 주었다.

“하하하, 두 분은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토록 아름다우시니 분명 어릴 적에도 어여쁘셨겠지요?”

백매는 입 안의 것을 빠르게 씹어 넘기며,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대답을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 매우요.”

“호오, 두 분께선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셨나 봅니다.”

“죽마고우죠.”

이번에 대답한 것은 청난이었다.

‘내가 어린 백매를 지켜보았고, 백매도 어린 나를 지켜보았으니 죽마고우라는 말이 틀리진 않지.’

대화는 쉼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진영은 피로가 쌓이는 인간, 특히나 몸이 약한 인간이었으니 어느덧 기세가 줄어들었고, 그런 그의 말을 이어 대화를 이끌어 간 것은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심경이었다.

심경의 관심 분야는 진영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그는 천생 무인으로, 그의 대화는 무예에서 시작해 무예로 끝났다. 간혹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여도 결국은 ‘그 간식은 수행할 때 먹으면 좋겠습니다.’로 끝나곤 하였다.

진영과의 대화가 서로의 부족함을 메꾸었다면, 심경과의 대화는 서로의 공통점이 깊어 길게 이어졌다. 심경은 이 몸이 약한 서생이 어찌 무예에 그리 박식한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백매 또한 이룬 경지만큼이나 무예에 조예가 깊었으니 그들 셋은 충분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검무는 무용보다는 보법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현란한 움직임이 눈을 혼란케 하니, 다음을 예측하기 어렵게 되죠. 세간에는 그 효용에 비해 저평가되어 아쉽습니다.”

심경이 작은 한탄을 내뱉었다. 그의 무예는 무겁고 탄탄한 것이라, 자신과 반대되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는 듯했다.

이제껏 추임새만 간간이 넣었던 진영이 그의 말을 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게 좀 있습니다. 오래전에 보법으로 이름을 날리던 수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그 누구도 기척을 잡을 수 없어 때로는 신선이라며 추앙도 받았을 정도라고 해요.”

‘설마…….’

청난은 진영의 이야기 속 인물이 낯익었다. 진영의 길지 않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분은 검무 또한 뛰어나셨죠. 그전까지만 해도 검무는 무로서 인정받지 못하였다고 해요. 그러다 한 연회가 벌어졌죠.”

이다음은 청난이 잘 아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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