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장소가 마땅치 않구나.”
“사존의 곁인데 무어가 부족하겠나요. 당신의 옆이라면 어디든 제겐 과분할 따름입니다.”
“그래…….”
“…….”
다정하고 진심이 담긴 말을 한마디씩 주고받은 그들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서로 언제,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눈치만 보는 이런 상황에서 주로 먼저 입을 열었던 것은 청난이었고, 지금 또한 청난이 먼저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그건… 네 탓이 아니다. 내가 불안한 탓이지.”
“불안이요……?”
백매는 생각지 못했던 말에 놀라기보단 의아함이 들었다. 백매가 알고 있는 청난은 누구보다 강인하였기에 불안이란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청난은 백매의 표정이 어떠하든 자신의 말을 이었다.
“나는 스스로 하고자 한 일은 뭐든 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당신은 강인하며, 당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없었죠.”
“맞아, 그랬지.”
청난은 불필요한 겸손을 부리지 않고 그저 한탄하듯 조소하였다.
“그랬더니 적응하기 어렵더구나. 무력하다는 것에 말이야. 어째서 내가 애정하는 이들은 슬피 울고 나를 떠나가는지, 또 나는 그때마다 무엇도 하지 못하는 건지. 그제야 이 세상의 불공평이 와닿더구나. 내가 알던 곳은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우습지. 그러곤 또 다른 생각도 들었지 뭐냐. ‘내가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떠난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혹시 그때 내게 그런 힘이 있었더라면, 저렇게 행동했더라면. ‘만약’이란 생각은 또 다른 ‘만약’을 낳았고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단다.”
“사존…….”
“그래서 더는 즐길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또 불길했지. 곧 누군가 떠나가 버릴 것 같았어.”
백매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청난은 허탈하게 웃었다.
“스승이 쓰잘머리 없는 소릴 했구나. 신경 쓰지 말아라. 그저 너에게 이런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을 뿐이란다.”
그에게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 한 장 달리지 않은 가냘픈 나뭇가지 같은 처량함이 느껴졌으며, 또 언제라도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함도 느껴졌다. 백매는 이토록 약한 모습의 청난은 처음 보았다. 다시 태어난 그는 전과 같은 강렬한 영기를 다루진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당당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불안정해 보이다니. 백매는 누군가 제 배에 칼을 찔러 넣은 듯 괴로웠다.
“저는… 저는 사존을 떠나지 않았어요.”
“알지. 내가 떠났지 않았느냐. 고의든 아니든. 널 두고 간 것은 나였다.”
“아니, 제 말은…….”
“그런데도 널 붙잡으려 했단다. 모순적이지? 그래도… 붙잡고 싶었어.”
잦아드는 목소리에선 허망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백매는 조리대에 아무렇게나 걸쳐진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양손을 포개었다. 자신의 손 너머로 보는 그의 손은 너무나 얇았으며, 또 작았다. 이 손은 더 이상 아름다운 검길을 만들어 내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이젠 자신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더는 그의 등을 보고 있어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사존. 부족한 제자가 감히 첨언하자면, 저 그때보다 강해졌어요. 물론 사존만큼 뛰어나진 못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저를 두고 가도 쫓아갈 수 있을 만큼은 되었어요.”
백매는 자신의 말을 미처 다 하지 못할까 급히 말을 이어 갔다.
“예전에는 당신이 제게 많은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넘어져도, 실패해도 저를 일으켜 주는 존재를 처음으로 가져 보았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젠 제가 사존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살아 버렸네요. 당신께선 무릇 연장자란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러니, 이제 당신이 제게 기대어 주실 수 없을까요?”
백매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물이 가득 담겼다. 그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는 오직 단 한 사람, 청난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지난 삼백 년간, 감히 그럴 수 있는 자격을 얻었을까요?”
청난은 백매의 눈을 보고 있자니, 그가 온몸으로 저를 아끼며, 온 생애 동안 제 곁에서 그의 두 구슬에 오직 자신만을 투영할 것이란 착각이 일었다.
청난은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굶주린 아귀가 음식 냄새를 쫓아가는 것처럼 불가항력이었다. 청난은 언제나처럼 생각보다 몸이 앞서고 말았다.
“응, 좋아.”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대답을 뱉어 버린 자신의 목소리가 제 귓속을 두드렸지만, 딱히 놀라거나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그렇게 할게.”
“정말… 인가요?”
“응.”
청난은 그의 눈동자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지금도 가까웠지만, 더욱더 가까이. 백매는 청난보다 키가 큰 만큼 눈도 훨씬 위쪽에 있었다. 청난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발돋움을 해야 했고, 자연히 그의 몸에 기대게 되었다.
그들의 거리가 손바닥 하나만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았는지 청난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백매는 전에 없던 그의 태도에 놀라며, 뛰쳐나갈 듯한 심장을 진정시키기 급급하였다. 백매가 더는 버틸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자, 때마침 이질적인 소음이 고요한 귓속을 파고들었다.
드르르륵!
그것은 오래된 주방만큼이나 오래된 문이 시끄럽게 열리는 소리였다. 그곳에는 입가에 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청운이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난아, 여기 있었구나. 일어나니 너도 화 공자도 보이질 않아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가슴이 철렁했단다.”
청난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탈 없음을 확인한 청운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가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쳐 있는 곳까지 닿았다. 그의 시선 끝을 확인한 청난은 서둘러 자신의 손을 빼냈다.
“출출해서 내려왔어요. 아버진 잠도 부족하셨을 텐데 들어가 쉬세요.”
“네가 아픈데 내가 어찌 편히 쉬겠어? 너야말로 좀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청운이 지금껏 봐 온 청난은 늘 무리가 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런 아들의 성향을 아는 청운으로서는 그를 말리는 건 꽤 어려웠다.
청운이 말끝을 흐리자 청난이 즉시 말을 이었다.
“그럼…….”
움직이는 그의 입술에 다른 두 남성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진 대인께는 제가 아프다고 전해 주시겠어요? 오늘은 쉬어야 한다고요.”
청난의 대답에 청운은 환호성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고, 백매는 몰래 안도하였다. 청운은 제 아들이 말을 바꾸기라도 할까 봐 급히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렇게 하마. 식사는 내가 챙겨다 줄 테니 화 공자와 방에 가 있겠니?”
“고마워요, 아버지.”
청운이 기쁜 마음에 이 주방이 거의 꽉 찼다는 것도 잊고 들어온 까닭에 청난과 백매는 내쫓기듯 나가야 했다.
천장을 열어 각종 식자재를 살피는 그는 당장에 콧노래도 부를 것 같았다. 그의 기쁨이 자신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을 알았기에 청난은 마음이 포근해지며 입 끝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청난은 청운의 뒷모습에 소리 없이 공수하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청난은 어정쩡하게 입었던 옷을 벗어 다시금 한 장의 나삼만을 둘렀고, 대신 두꺼운 이불을 어깨에 걸치며 체온을 지켰다. 그동안 백매는 화로에 올려진 다구의 뚜껑을 열어 보고는 굳이 코앞에 가져다 대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건 또 왜 맡고 있느냐.”
다관에서 코를 뗀 백매가 무심한 투로 대답하였다.
“진통제는 그만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흐음……. 눈치챘느냐?”
“어제야 알았어요. 예전에도 차를 좋아하셨죠. 그 때문에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설마 진통제를 달여 마시고 계셨을 줄은…….”
백매는 울적한 낯으로 다구 안의 마른 잎을 단번에 태워 버렸다. 백매가 합을 열자 여러 종류의 바짝 말린 잎들이 언제든 차를 달이기 좋은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다행히 차를 좋아하는 건 여전하신 게 맞는 것 같아 백매는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찻잎을 골랐다.
“매화차가 좋겠구나.”
스승의 정확한 주문에 백매가 적당량을 담았다. 청난이 사흘 전 담아 놓았던 물은 이미 한참 전에 식은 지 오래였건만 백매가 손을 대자 순식간에 뜨거운 김이 새어 나왔다. 그것을 말린 꽃을 담은 다구에 붓고, 잘 우러날 수 있도록 뚜껑을 닫아 흔들었다. 그에게서는 무로서 명예를 얻고 비승한 신선답게 사시사철 장군의 기개가 느껴졌었는데, 지금 양손으로 다구를 쥐고 있는 모습은 또 다른 매력을 자아냈다.
매화의 향긋한 내음이 방 안을 휘감았다. 백매가 맑게 우려진 찻물을 자신의 몫까지 두 잔 준비하곤 침상으로 다가와 청난에게 한 잔 건네주었다.
“아주 향이 좋구나.”
“재료가 좋은 덕분이죠.”
“이런 시골 마을에서 난 것이 무어 그리 특별하다고. 다 네 덕이지.”
청난이 나긋하게 미소 짓고는 매화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의 따뜻함이 손끝까지 퍼지는 것 같아 푸근해졌다. 청난이 찻잔을 코 가까이 대며 향을 맡자 백매가 그의 바로 곁에 바짝 다가왔다. 이 향은 청난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백매는 천천히 손을 내려 청난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많이 내려갔네요. 편안하신가요?”
“그래. 몸도 많이 좋아졌고, 뭣보다 매화 덕분에 기분이 좋구나.”
“그… 그렇군요…….”
백매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청난은 보다 붉어진 귓등을 보며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앓은 건 난데 왜 네가 빨개지느냐?”
“사, 사존… 제자를 놀리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