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너……!”
“…….”
백매가 변명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있자 청운이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가.”
“……그럴 수 없습니다.”
“이곳은 내 집이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이 제 영역입니다.”
백매의 뜻 모를 소리에 청운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청운은 방금 전 그의 힘을 알아 버렸으니, 달걀로 바위를 깨려 들지 않았다. 그가 이리 완고하니 자신이 당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혹여 누워 있는 청난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하겠는가. 차라리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게 나았다.
청운은 그를 무시하기로 하고 떨어진 천을 주워 와 청난의 머리맡에 앉았다. 차가운 천으로 청난의 맨피부를 닦아 내는 모습은 몹시 지극하였고, 일절 육체적인 인상을 주지 않았기에 백매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물론 그도 청난의 치유를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제 몸은 반응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감히 사존에게 그런 짓을……. 백매의 고개가 푹 꺼져 갔다.
들고 온 천을 모두 사용한 청운은 후,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꼬리를 내리며 지극정성이었던 아버지의 눈은 백매에게 향하자 단번에 사나운 기색을 품었다.
“저는 약을 달이러 나가야 합니다. 화 공자, 부디 순순히 나가 주십시오. 제 아들의 회복에 방해가 됩니다.”
그의 명백한 축객령에 백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책에 물들었던 표정은 무심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해입니다.”
“정확히 어떤 것이 그렇다는 거죠?”
“그걸 몰라서 그럽니까?”
청운은 팍 헛숨을 내뱉고는 제 머리카락을 헝클였다.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고심하더니 이윽고 낯 뜨거운 대답을 꺼냈다.
“그 어떤 아비가 아들을 쓰러진 사이 입을 맞추는 이와 한 방에 있게 하겠습니까?”
그의 말은 백매의 양심을 정통으로 후벼 파 냈다.
무인으로서 당당했던 기색이 순식간에 꺾이고 말았다. 백매의 눈동자는 한곳에 멈추지 않고 허공을 맴돌았다. 차마 청운을 바라보지 못했다.
“희롱…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호흡이 어려우신 것 같기에… 도와드리려고…….”
백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다. 특히나 그는 청난이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온 가죽이 벗겨진 것 같았다.
갑자기 태도가 변한 백매의 모습에 청운은 얼떨떨하였다. 처량한 것이 집 나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꼴이었다. 그 모습에 자신이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청운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보다 온화한 목소리로 그를 달래었다.
“화 선사께서 수선에 임하시느라 의술에 막연하신 모양입니다. 그건 옳은 해결책이 아니니 다신 그런 행동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예…….”
백매는 청난의 아버지인 청운에게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인 백매에게 청운이 나쁜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주변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청난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맴돌았다.
“난아, 난아. 괜찮니?”
청운이 고개를 낮추며 걱정 어린 목소리를 속삭였다.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이 없던 청난의 바짝 마른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알아듣기 어려웠다. 청운은 귀를 바짝 열어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였다.
“……형님……. 형…….”
가냘프게 뜬 눈은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을 흘려보내고는 다시 맞물렸다. 그의 손은 서서히 힘이 풀려 침상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그의 잠자리를 다시 정돈해 주는 청운의 마음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저 아이가 ‘형’을 찾은 것이 분명한데, 당연하게도 그에겐 친형이 없었고, 자신이 알기론 호형호제하는 지기도 없었다. 그는 대체 누구를 부른 것일까.
청운은 백매를 흘겨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청난과 친근한 관계를 보여 준 의문의 수사. 혹시 이자를 찾은 걸까. 그가 보여 준 행동과 태도로 볼 때, 그는 청난을 애정하는 것 같았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청난은 감이 좋은 아이였으니 그 또한 그것을 알 터이다.
‘그런데도 저자와 함께 있다는 것은, 혹시…….’
만약 그것이 제 아들의 선택이면, 자신은 아비로서 그 뜻을 존중함이 옳았다.
“으… 윽…….”
청난의 신음 소리에 청운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래그래. 아가, 아비가 여기 있단다.”
청난은 언제 목소리를 내었냐는 듯 다시금 새근새근 숨소리만을 내뱉었다. 청운이 손을 올려 그의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열은 꽤 내려갔다. 슬슬 그가 깨어날 때를 대비해 약을 올려야 했다. 청운은 그리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백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약을 달일 테니, 대신 간호를 부탁드립니다.”
청운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지만 백매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가 나가면서 또다시 방 안에는 둘만이 남게 되었다. 백매는 여전히 그의 머리맡을 지켰다. 그는 수시로 신음을 뱉었으며, 뜻 모를 단편적인 단어를 연신 내뱉기도 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다 또 조용히 자기도 하였다. 백매는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재의 구수한 냄새가 풍겨 올 무렵에는 차도를 보여 갑갑한 신음 소리가 흐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에 청난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청난의 눈에 비친 것은 침상의 머리맡에 기대어 자고 있는 청운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백매였다.
“사, 사존, 괜찮으신가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무슨 소란이더냐.”
청난은 말을 더 이으려다가 청운을 힐끔 보더니 말투를 고쳐 내었다.
“지난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백매가 그의 시선을 따라 청운을 보더니 입을 벌려 소리를 내는 대신 전음을 보냈다.
-사존께서 쓰러지셨습니다. 그리고 밤새 앓으셨어요. 언제부터 편찮으셨던 건가요? 제자가 되어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였으니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자가 미덥지 못한 탓에 사존께서 고통을 나누지 못하였으니, 제 죄가 너무나 큽니다.
지난밤 동안 할 말을 묵히기라도 했던 것인지, 백매의 자책적인 말은 끊임이 없었고, 이러다간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다. 청난은 전음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조심히 육성으로 대답하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공자보다 뛰어난 자가 몇이나 있겠어요? 단지,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휴식을 조금 미룬 것뿐입니다. 하필 시기가 좋지 못했을 뿐이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것이죠.”
청난이 그에게 다가가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 주었다. 그와 가까이 눈을 마주쳐 온화한 웃음을 보이자 백매는 상기되어 고개를 돌렸다. 그런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니, 청난은 그가 저지른 지난밤의 일을, 그리고 지금 다시 그것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지나쳐 옷장 앞에 섰다.
지난밤 청운이 그의 탈의를 도왔기에 그는 홑겹의 나삼을 입고 있었다. 장을 열어 개어진 옷가지 중 가장 위의 것을 꺼내어 소매를 끼워 넣자 백매가 짧은 거리를 부리나케 달려와 청난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
“설마 어디 나가시려는 건 아니시죠……?”
“나가야지요. 오늘 진 대인의 사택에서 회의가 예정되어 있는 걸 잊으셨나요? 자, 갑시다.”
청난은 평소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백매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청난과 그의 빈손을 번갈아 본 그는 눈썹꼬리를 축 내린 안타까운 표정으로 청난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쉬실 수 없으신가요? 다음에 쓰러지실 땐 오늘처럼 하루아침에 나으시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괜찮습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그저 대화를 나누고 올 뿐인데 큰일이랄 게 있을까요.”
음성에서 조마조마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백매와 달리, 청난의 말본새는 느긋하기만 하였다.
“그것이 사존의 건강보다 우선이진 않잖습니까. 내일 하여도 되고, 모레 하여도 됩니다. 어째서 당신의 몸을 아끼지 않으시는 건가요. 과거에 사존께선 수련만큼 중요한 것이 적절한 휴식이라 일침해 주셨지요. 그런데 어째서 사존께서는 그러지 않으십니까. 사존, 제자를 돌아봐 주세요. 저는, 저는 너무나 속상합니다.”
이어질수록 백매의 목소리는 떨려 갔다. 그의 긴 속눈썹은 당장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쪼르르 흘릴 것만 같았다. 청난은 누군가 제 마음속에 막대기를 집어넣어 휘젓는 듯 뭉클해졌고, 동시에 자고 있다고 한들 청운의 앞에서 말을 가려서 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는 백매를 보니, 우선 그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들었다.
“우선 장소를 옮겨 주겠니?”
“물론, 입니다.”
침울함이 턱 끝까지 차고 올라온 순간에 들려온 청난의 다정한 요청은 순식간에 그를 침울한 늪에서 끌어올렸다. 백매에게 청난은 그런 존재였으니, 어찌 그의 요청을 거절하겠는가. 백매는 눈물을 머금듯 음울함을 굳게 삼키고 건네진 스승의 손에 제 발걸음을 맡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좁은 주방이었다. 본디 이곳은 이토록 좁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난과 청운은 둘 다 가사에 능하지 못하였으니,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각종 것들로 어느새 사람 두셋이 들어오면 꽉 차는 공간으로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청난이 머쓱히 조리대 위에 몸을 기대고는 제 손보다 긴 소맷자락으로 옆자리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내었다. 청난이 그곳 위를 두어 번 토닥이자 백매가 쪼르르 그 앞에 몸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