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사존? 제자,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백매는 이곳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매는 방을 거치고 지나가 후문으로 나갔다. 그가 휴식을 취하곤 했던 매화나무 아래는 풀잎만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존, 안 계신가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백매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기이함을 느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무에 가려졌던 풀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곳은 청난과 백매가 몰래 밖으로 나설 때 이용하던 길목으로, 지난번에 이용한 후에 자신이 주변을 정리하여 감쪽같이 만들었던 것이 똑똑히 기억났다. 이곳이 다시 헤졌다는 것은 누군가 이용했다는 뜻이고, 자신이 아니었으니 청난 외에 또 있겠는가.
백매는 곧 청난을 볼 것이란 생각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서늘한 바람이 얇고 두꺼운 나무 기둥을 스쳐 지나가며 백매의 귓가를 간질였다. 아늑한 어둠 속을 밝히는 달빛은 은은하니 몽환적이었다. 손등을 적신 밤이슬은 시원했다. 백매는 이유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고 그 탓에 그답지 않게 낙관적인 생각까지 이어졌다.
‘사존께 내 마음을 고백하는 건 어떨까. 떠나시면 다시 뵐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분께 그저 제자로만 남고 싶진 않아……. 사존이시라면, 내 이런 이기심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응, 그러실 거야.’
사존께선 나를 슬프게 만들지 않으실 거야. 백매의 머릿속은 행복한 공상으로 채워져 갔다. 그렇게 일 주향가량을 걸었을 때, 어두운 수풀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청난이라 예상한 백매는 기쁘게 다가갔다.
“사존, 백매입니다.”
그런데 다가가자마자 그는 후다닥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다. 간혹 수야산에 몰래 와 약초를 캐 가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였던 것일까. 백매는 한눈에 보아도 수선자였으니, 산의 주인에게 들킬까 도망친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백매는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 불길함이 들었다.
백매는 그자가 있던 장소로 다급하게 다가갔다. 그럴수록 전에 맡아 본 적 없는 냄새가 진해졌다.
“아…….”
백매는 그것이 피 냄새임을 알 수 있었다. 맡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았기 때문에 알았다.
이 순간 백매의 심장은 잠시 멈췄을지도 몰랐다.
백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이 올려 드렸던 단정한 머리카락이 흙과 피와 어우러진 모습. 고운 손가락이 괴성을 지르듯 붉게 피범벅된 모습.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짙은 피 냄새를 풍기며 흙바닥에 온몸을 맡긴 사존, 진청난의 모습이었다.
백매는 헐레벌떡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옷 따위가 더럽혀지는 것은 상관치 않았다. 이미 그의 옷은 피와 흙이 뒤엉켰다.
“사, 사존……? 왜, 왜 여기… 왜…….”
백매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미동 없는 제 스승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어떻게 된 일이지. 문득 정신을 차린 백매는 당장 그를 안고 산을 내려갈 요량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 사존, 정신이 드세요? 사존, 제자가, 매아가 여기 있습니다.”
백매는 그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가냘팠지만 그의 두 눈동자는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존, 조금만 참으세요. 제자가, 제자가……. 흐윽… 흐끄윽…….”
떨리는 백매의 목소리는 울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청난도 그것을 들은 걸까. 힘겹게 뻗은 그의 손은 백매의 눈물을 닦아 주려는 것 같았다. 백매가 그의 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안 돼요, 사존. 저, 저는 사존이 없으면 안 돼요……. 흐윽… 강하시잖아요. 신이 되실 거잖아요. 이럴 수는 없어요. 안 돼요. 으흐윽… 흐윽……. 흑…….”
한번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이래선 안 되는데.
청난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아 그의 소리에 집중하였다. 달싹이던 마른 입술 사이로 가까스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난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힘이 없었다. 백매는 괴로웠지만, 그의 말을 놓칠 수 없었기에 이를 악물며 참아야 했다.
“너… 는… 신… 이…….”
그 끝맺지 못한 말을 마지막으로 청난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꺼풀은 끝내 닫혀 다신 열리지 않았으며, 백매의 눈물을 훔치려던 손은 털썩 떨어졌다.
“사존……? 사존?”
사존. 사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반복해서 그만을 불렀다. 백매는 가볍게 그를 흔들었지만, 티끌만 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백매는 그제야 그의 손목을 짚어 보았다.
이것이 정녕 인간의 영맥이 맞는 건가. 이토록 텅 비어 있는 것이?
백매는 더 이상 사고를 하기 어려웠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으로 청난을 바닥에 눕히고 그의 옷을 찢듯 벗겨 내었다. 그의 맨몸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한 복부가 눈에 들어왔지만, 백매는 그것을 지나치고 그의 가슴 위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백매는 저 스스로가 이승에 있는 것인지 저승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저를 끌어냈다는 기억만이 어렴풋이 존재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진 사백이 아니었을까. 그 혼미한 와중에 각인되듯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단 하나 있었다. 사존의 몸이 너무나 차가웠다는 것.
원래 이러했던가. 그가 이토록 차가웠던가.
그의 따뜻한 온기에 맞닿았던 때가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의 체온이 기억나지 않아 몇 날 며칠을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보냈다. 그럴수록 청난이 더더욱 기억나지 않았다. 저를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할 수 있던 것은 그의 마지막 목소리.
‘너는 신선이…….’
백매는 더 이상 잊을 수 없었다. 그 다섯 글자를 지키기 위해 문을 나섰다. 그 후 그는 오직 수련에만 전념했다. 누구보다 많은 명성을 얻게 되면서 그는 더 이상 진청난의 제자 화백매가 아닌, 그저 화백매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삼 년 후, 또다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며, 수사 화백매는 신선이 되었다.
그 해묵은 일이 왜 지금 떠오른 건지. 백매는 함께 덮쳐 온 불길함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청운이 단정히 정리해 놓은 침구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청난의 손은 너무나 창백했다. 백매는 곧 깨질 유리구슬을 대하듯 조심스레 청난의 손을 잡아 들어 자신의 볼을 감쌌다.
“사존, 바보 같은 제자를 혼내 주세요. 벌써 사존의 온기가 기억나지 않아요.”
당연하게도 청난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머리론 이번 일이 그의 목숨에 큰 지장을 주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하지만 이성과 달리 감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백매는 하염없이 청난을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습게도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기도를 올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저는 뭣 하러 신이 되었던 것일까. 그 덕분에 청난과 다시 만날 수 있었음을 알지만, 이토록 무력한데 신선이란 위상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청운이 다녀간 후 청난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가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침울함에 잠겨 있던 백매는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헉… 헉…….”
청난은 고개를 돌려 겨우 숨을 들이쉬었지만, 여전히 흉부의 움직임은 단조로웠다. 백매의 그림자가 침상 위 청난의 몸 위로 드리워졌다. 백매의 코끝이 그의 것과 맞닿기까지 손가락 단 한 마디의 거리도 남지 않았다. 백매는 그곳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째서 호흡이 불안정하신 거지.’
백매의 손끝이 청난의 코 위에서 멈추었다가 목으로, 그리고 가슴 위로 움직였다.
‘어딘가 부어올라 막히기라도 하신 건가.’
안쪽에서부터 기도를 연다면 호흡하기 더 편해지실 텐데.
어느새 백매는 청난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점이 특히나.
도덕적인 문제를 고심하기도 전, 이미 그의 벌어진 입술은 청난의 입술 위에 겹쳐 올려진 상태였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백매는 뛰어오를 정도로 놀랐지만, 그렇다 하여 아무것도 안 하고 멀어지는 것도 이상했다. 적어도 무는 베어야 하지 않겠는가.
백매의 입 안 뭉글한 살덩이가 청난의 입술을 비벼 열었다. 그의 안에서부터 텁텁한 숨이 넘어왔다. 그는 숨을 뱉을 구멍이 막혀 버리자 힘겨워하였다. 백매는 그의 바람대로 떨어지는 대신 더욱 그에게 파고들었다. 그의 턱 끝이 천장을 향하도록 들어 올리고, 숨을 불어 넣었다. 백매의 숨은 여타 다른 이들의 것과 달랐으니, 백매는 자신이 신선임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포개어졌던 입술이 서로 멀어졌다. 청난의 숨은 진정되었고, 반대로 백매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뜀박질하였다. 그것이 몸을 뛰쳐나와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백매가 자신의 심장 위를 움켜쥐며 멍하니 청난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몸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물론 백매는 그의 힘에 말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대는 보아야 도리이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시야에 비친 것은 청운이었다. 그는 꽤 화난 듯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그의 몸 뒤로는 깨져 버린 자기 그릇과 그 안에 담겼던 듯한 깨끗한 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백매는 그가 자신의 행동을 보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