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건……. 연화문에서 주었습니다. 이 ‘사업’ 종사자가 많아진 것도 연화문의 덕이지요. 그들이 그 부적을 팔면서 사용법도 알려 주고 있거든요.”
“…….”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청난은 속으로 수선계가 어지러운 이유에 한 가지 항목을 더 적어 넣었다. ‘연화문’.
청난이 연신 한숨만 내뱉고 있자 인부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운을 떼었다.
“그럼 저희는 가도 되겠습니까……?”
“후, 그렇게 하여라. 내 너희를 위해 충고하겠는데, 살생은 살생으로 돌아온다. 목숨을 귀히 여긴다면 이런 일엔 손 떼도록 해.”
“저희는 죽이지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청난이 고개를 바짝 들어 인부들을 쏘아보았다.
“정녕 이자가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냐? 직접 손을 쓰지 않는다 하여 자신의 죄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살고 싶으면 알아 둬.”
청난은 그들에게 냉랭한 시선을 던지고 곧 자리를 떠났다. 청난은 인부들이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리가 되자 저의 뒤를 바짝 따라온 백매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따뜻하게 변해 있었다.
“매아, 네가 보기엔 저 인어가 살 수 있겠느냐.”
“상처를 입었으니 곧 죽을 겁니다.”
“그럼 시신이라도 능멸당하지 않도록 처리해 주겠니.”
“사존께서 원하신다면 응당 그러해야죠. 한데, 제자가 미흡한 탓에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아라.”
백매는 인어가 담긴 배를 힐끗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하며, 또 진정 의문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 저런 한낱 미물에 관심을 두십니까?”
청난은 잠깐 동안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타인에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신선이 되어서? 아니면 혹시…….
청난은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 내었다. 두통이 심하니 사고가 부정적으로 흐르는 게 분명했다. 청난은 아무렇지 않은 척, 조금의 웃음을 담아 대답했다.
“저 인어가 미물인데, 나는 미물이 아니더냐?”
“무, 물론입니다. 세상 누가 감히 사존께 그런 망언을 던진답니까.”
“망언이 아닌 진실이다. 태어남에 귀천이 어디 있더냐. 똑같이 세상에 난 존재들 아니더냐.”
“그럼… 제자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저 인어는 미물이 아닙니다.”
백매는 말과 달리 못마땅해 보였다.
“옳지.”
청난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백매는 지난날처럼 청난을 안고 창문을 넘었고, 지난날과 다르게 이번에는 청난이 두 눈을 끔벅끔벅 뜬 채였다.
백매가 창을 넘어 바람 같은 조용한 발걸음으로 익숙한 방문을 열었다. 몰래 빠져나왔던 방은 나갔던 모습 그대로였다.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온 달빛만으로는 청난의 눈앞을 밝히지 못할 테니 백매는 그를 위해 등잔불을 켰다.
“사존, 오늘은 푹 주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손님은 제자가 돌려보낼…….”
털썩.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귀를 울리는 소리에 백매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이 방에는 쓰러질 만한 것들이 많았다. 탁상 위의 책이 떨어질 수도 있었고, 베개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소리가 무겁긴 하였으나, 청난의 이불은 두꺼웠으니 그것의 소리일 수도 있었다. 백매는 고개를 돌리는 찰나의 순간 동안 자신이 떠올린 그 소리가 아니길 바라며 여러 상황을 예측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흐트러진 청난의 모습이었다.
“사… 존?”
그 순간 백매의 세상이 멈추었다가, 청난의 가느다란 손끝이 움찔거리자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매가 다급하게 청난의 몸을 안아 침상 위에 눕혔다.
색색거리는 그의 호흡이 얕았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의 얇은 피부는 붉게 상기 되었으며, 차갑게 식은 땀은 옷과 머리카락을 적실 정도였다.
누가 보아도 환자의 모습이었다.
백매가 청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가 수야각에 입문한 이후 고뿔에 걸린 사형제는 없었으니, 이는 지난 십 년간 청난의 곁을 맴돌며 보았었던 청운의 모습을 따라 한 것이었다.
그의 체온이 높다면 차갑게 식혀 주고, 그의 체온이 낮다면 데워 주는 것은 백매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백매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백매는 인간의 체온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기에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청난의 체온을 재어 보아도 그의 체온이 높은 것인지, 아니면 낮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지?’
청난의 작고 미약한 숨소리가 백매를 재촉했다.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또다시 찾아온 무력함에 백매의 눈에서는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
청난의 갈라진 신음 소리가 백매의 귀를 관통하며 정신을 되돌려주었다. 백매가 청난의 손을 부여잡았다.
“사존, 매아가 청운을 데려오겠습니다. 잠시만 버텨 주세요. 잠시만, 금방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백매는 두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청운보다 쓸모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백매는 어쩔 수 없이 제 감정을 접어 두어야 했다.
백매의 걸음은 올 때처럼 가볍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처럼 타박타박 시끄러운 뜀박질에 자고 있던 청운이 놀라 뛰쳐나왔다. 덕분에 백매는 마침 초췌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온 청운을 볼 수 있었다.
백매는 이제껏 청운을 불러 본 적이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그를 뭐라 불러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선인들의 예절 책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었겠지만, 백매에겐 그럴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의 머릿속은 이미 혼란하여 평소 같은 사고가 불가능하였으니, 백매는 생각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를 불러 세웠다.
“아버, 아버지! 아버님!”
청운은 자신을 부르는 호칭과 목소리의 주인이 맞지 않았으니 의아했지만, 돌아본 백매의 모습이 너무나 다급했기에 그런 사소한 의문 따위는 날아가 버렸다.
“화 공자, 무슨 일입니까?”
“사, 사존께서, 아니, 청난이 아픕니다.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백매는 말을 더 이었지만, 청운은 이미 스쳐 지나간 후였다. 청운은 결코 무인이 아니었으니 그 짧은 거리 동안에도 넘어질 뻔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사사로운 사고는 그 무엇도 아니라는 듯 곧장 무릎을 펴고 청난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두꺼운 이불 아래에서 불그스름한 낯으로 겨우 숨을 내뱉는 청난의 모습이 두 눈에 박혀 들어왔다. 놀란 표정도 잠시, 청운은 청난이 누운 침상 앞으로 다가며 백매에게 물음을 건넸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청운은 익숙한 손짓으로 청난의 침구를 정리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청난은 겹겹이 싸인 옷을 입고는 불편해서 잠자리에 들 수 없다며, 밤중에는 나삼 한 겹만 입고 있기 일쑤였다. 하나 지금은 방금 나갔다 온 이처럼 외의까지 입고 있었으니, 이는 부자연스러웠다. 청운의 목소리가 확연히 낮아졌다.
“밖에 나갔었군요.”
“네, 저와… 밤 산책을 잠시 즐겼습니다.”
백매가 얼버무리며 대답하자 청운이 작게 심호흡하였다.
“그렇군요. 난이는 몸이 약해 밤이슬에도 곧잘 앓고 합니다. 이런 지경이 되도록 화 공자가 알지 못했던 걸 보면 꾹 참고 있었나 봅니다. 저는 차가운 천을 가져올 테니 화 공자께서 난이를 돌봐 주세요. 답답해하여도 침구를 걷어 주지 마시고 창문을 열어 주세요.”
말을 끝마친 청운은 백매가 대답을 할 새도 없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렇게 이 넓지 않은 방에는 오직 의식 잃은 청난과 반쯤 멍해진 백매만이 남겨졌다.
“사존…….”
백매는 감히 무릎도 꿇지 못하고 기억을 더듬거렸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쌀쌀했던 동굴에서부터? 아니면 제 품에서 잠드셨을 때부터? 그날 어떻게 주무셨더라. 혹시 내가 눈치채지 못해 화를 부른 거면 어떡하지. 야행을 나가시는 걸 말렸어야 했나.
후회에 후회가 층층이 쌓여만 간다.
‘이대로 눈을 못 뜨시면 어떡하지.’
흐트러진 모습, 굳게 닫힌 눈. 나지막한 숨소리. 이 모든 것이 ‘그날’ 일을 떠올리게 하였다.
◈
넓은 강당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모습은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수야각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한쪽에선 술을 마시고, 다른 한쪽에선 재잘거리며 사담을 나누었다. 후대에 길이 남겨질 경사에 모두가 기뻐하며 이때를 즐겼다. 다만 그 경사의 주인공 자리가 비워져 있었으니, 백매는 가시방석에 앉은 양 안절부절못하였다.
“백매, 네 사존은 어디 갔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금방 오신다며 절 먼저 보내셨습니다.”
“벌써 한 시진이 지났는데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제자가 사존을 모셔 오도록 하겠습니다.”
백매는 마침 청난을 찾기 위해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찰나였기에 주국의 혼잣말에 가까운 말에 반응하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애초에 백매는 이 연회가 그리 내키지 않았다. 수야각의 각주인 진청난의 인계에서의 마지막 날을 축하하는 연회. 어떻게 마지막 날을 축하할 수 있단 말인가. 사존께서 만민의 존경을 받으며 그 뜻을 이루셨으니 제자 된 도리로서 축하드려야 마땅하였지만 백매가 가진 마음은 그저 제자의 것만이 아니었다.
백매는 복잡한 감정을 안고 청난의 처소로 찾아갔다. 매일 아침 그를 깨우러 왔던 곳으로 내일이면 더 이상 올 이유가 없어질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매의 추억은 장소가 아닌 사람에 있었으니, 아무런 미련 없이 내원을 스치고 지나가 문 앞에 섰다.
“사존, 늦으시기에 제자가 모시러 왔습니다.”
청난의 청각이 백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 없는데도 처소 안은 아무런 반응 없이 조용하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