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누구냐!”
골목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밝았으니 다가오는 청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저벅이는 발걸음 소리에 긴장을 한껏 머금었다. 하지만 나타난 자는 싸움은커녕 벌레도 제대로 못 죽일 것 같은 삐쩍 마른 이였다. 그것도 모르고 긴장한 자신들이 우스워서인지, 아니면 주제도 모르고 나선 저 정의로운 청년이 가소로워서인지 두 무뢰배는 피식 비웃었다.
“어느 집 귀한 공자님이 이렇게 세상 물정을 모르실까.”
두 무뢰배 중 한 명은 그 여성을 위협하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청난에게 다가왔다. 그는 둔기로 제 손바닥을 탁탁 치며 위협해 왔다. 하지만 제 눈앞에서 검도 휘둘러졌었는데 그따위 것이 무에 두렵겠는가. 청난이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서 다가오고 있으니, 위협하던 무뢰배는 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생각에 주춤하였다.
“왜 멈추지? 두렵나? 저는 남을 핍박하면서, 제 몸은 애지중지하는구나. 이 얼마나 이기적인 자인가.”
청난은 멈추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다가갔다. 그의 발이 내디뎌질 때마다 기품이 흘렀고, 동시에 위압감이 들었다. 만약 이것이 힘없는 자가 속이려 드는 것뿐이라면, 그는 필히 연기로 나라도 제패할 수 있으리라.
두 무뢰배는 여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왔었다. 그 말은 자신들이 도망칠 곳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하던가. 퇴로가 막힌 채 위기감을 느낀 그는 무예도 뭣도 잊은 채 막무가내로 둔기를 휘두르며 청난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악! 아악! 악!”
그가 휘두른 그 무엇도 결코 청난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가 청난의 가까이에 닿기도 전에 백매의 큰 손에 저지되었다.
둔기를 내려치기 위해 위로 치켜올린 손이 백매의 큰 손에 잡혀 옴짝달싹 못 하였다. 곧이어 백매의 다른 손이 그의 복부를 강하게 격타했다. 그는 제 배를 움켜쥘 틈도 없이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자신의 동료가 한 방에 쓰러진 것을 본 또 다른 이는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였지만, 당연히 도망치지 못한 채 제 동료와 같은 꼴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여성은 얼떨떨하였다. 방금까지 큰일이 났구나, 세상이 끝나는구나 절망이 차오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상황이 끝나 버릴 줄이야.
그녀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마저 하지 못하는 동안 청난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저, 괜찮으신가요?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 아, 괜찮아요!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번쩍 일어나 신체의 건재함을 증명했다. 그녀의 활기에 청난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 아름답기까지 하니 그녀가 넋 놓고 보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청난은 이런 반응들이 익숙했기에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어쩌다 저런 자들에게 안위를 위협받게 되신 건가요?”
“모르겠어요. 아마 재수가 없었을 거예요. 외부에서 오신 분들이시죠? 요즘 저희 마을엔 이런 납치 강도가 많아졌어요. 다른 지방에서는 괴수를 피하려고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하던데, 저희는 사람을 피하려고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죠.”
“이곳엔 관아가 있지 않나요?”
“있어요. 하지만 언제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는데 최선을 다하겠어요? 병력을 아껴 두거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비관하며 허송세월할 뿐이죠. 그래서 주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거나, 신에게 기도를 올려야 해요.”
그 신들의 사정을 아는 청난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럼 그 피리 소리는 뭔가요? 독특하던데.”
“아, 이거요?”
그녀가 소매 사이에 욱여넣었던 피리를 꺼내었다. 길이는 손바닥보다 짧았고, 폭은 새끼손가락만큼 작았으며, 그 몸체는 나무, 아마도 버드나무로 만들어진 듯했다.
“영정이라는 물건인데, 비비의 울음소리가 나요.”
“비비라면, 영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영노. 그 울음소리를 따서 비비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민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신수다. 다만, 존재가 확실한 인면조와 달리 영노는 그저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에 불과했으며, 설령 존재한다고 하여도 그 성질은 신수보다는 요마에 가까웠다.
그녀는 이것에 대해 잘 모를 청난을 위해 설명을 이었다.
“비비가 악인의 목을 물어 가길 바라며 동족의 울음소리를 내는 거예요.”
“하지만…….”
청난은 그들의 신앙을 깨는 것 같아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여성은 대신 그의 말을 받았다.
“알아요. 비비는 뭐든 잡아먹는댔으니 제가 먹힐지도 모르죠. 하지만 사람도 위험하고, 비비도 위험하다면 차라리 비비에게 먹히겠어요. 적어도 혼자 죽진 않을 테니까요.”
영정을 움켜쥐는 여성의 손이 부들 떨렸다.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넌지시 전해졌다. 그녀가 청난의 제자였다면, 그녀를 토닥이며 달래 줬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들에게 위협받은 여인에게 남성인 청난이 접촉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녀의 공포를 존중해야 했다.
“대협께서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나요. 세상이 이런 것이 대협의 탓도 아닌데.”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나요?”
“미안해하는 표정이요.”
“하하 그랬나요. 소저, 자택까지 데려다드릴까요?”
청난이 어물쩍 넘기자 눈치 빠른 여인은 그의 바람대로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희 집까진 멀지 않아요. 걱정되신다면 제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두 공자께 신선의 가호가 있길 바랄게요.”
여인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합장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숙이자마자 다급하게 번쩍 들었다. 두 눈을 크게 뜬 그녀의 표정에 청난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었다.
“내 정신 좀 봐. 은인의 성함도 여쭙지 않았네요. 어느 문파의 협객이신가요?”
이런 시기에 낯선 땅을 밟는 관군은 없을 테니 그녀가 그들을 명문 문파의 문하생으로 오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청난은 잠깐의 고민 끝에 대답을 골랐다.
“수야각입니다.”
그날 백매는 다섯 번은 더 손을 써야 했다. 그의 맨손에 바닥을 구른 이들 중 요마귀괴는 없었다. 오직 자신들과 같은 인간을 해치며 제 잇속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인간뿐이었다.
“세상이 혼란하니 인간이 인간을 해치는구나.”
청난이 한탄을 내뱉었다. 백매가 그의 옆에서 지켜보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제자가 감히 여쭙건대, 인간은 오래전부터 그랬지 않았나요.”
“……그랬지.”
청난의 단마디 말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존, 아무래도 오늘은 사귀(邪鬼)에 대한 단서는 찾기 어려울 듯한데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곧 날도 밝을 겁니다.”
청난과 백매는 삼백 년 전 불새의 동굴과 얼마 전 인면수 동굴을 만든 범인을 ‘사귀’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것의 정체가 귀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삼백 년을 살 수 있는 존재 중 신선을 제외하고 가장 보편적인 것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신선을 제외한 까닭은, 그저 아니길 바란다는 청난의 소망이었다.
이제 청난은 제 제자의 품에 안기는 것이 퍽 익숙해졌다. 백매의 큰 발걸음으로 아랑 마을에 돌아오는 데엔 얼마 걸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청난은 어느새 그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백매가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밝아 오고 있었고, 부지런한 청운이 이른 시간부터 나와 앞뜰을 청소하고 있었다.
백매는 청난을 침상 위에 눕히고 옷과 이불을 정리해 주었다. 백매는 그러한 와중에 청난이 아직 외출복 차림인 것을 보고 불편하실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벗겨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국 모른 척 넘어가 버렸다.
청난의 수면은 길지 못했다. 사시 무렵이 되자 진 대인의 어린 사병인 심경이 데리러 온 까닭이었다.
전생의 청난은 몇날 며칠을 지새워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청난이 졸린 눈으로 비몽사몽 할 동안 백매가 그의 환의를 도운 덕에 볼썽사나운 꼴은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진 대인의 사병들은 청난을 반겼다. 책사로 임명받았던 날에는 미덥지 못한 눈으로 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감동할 지경이었다. 그에 반해 청난과 친근한 교류를 했던 마을 주민 다수가 그를 꺼리기 시작했다.
청난은 저를 향한 불편한 시선들 사이를 가로질러 진가 저택의 중앙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뜰에는 풍파의 흔적이 여태껏 남아 있었으나, 안채는 꽤 정리되어 있었다. 청난이 중문에 다가가자 대기하고 있던 자가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청난이 그의 환대를 따라 문턱을 넘었고, 백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다릴 심산으로 제 몸을 기댈 그늘을 찾았다.
하지만 청난은 제 뒤로 거대한 온기가 따라오지 않자 의아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가, 찾는 게 있느냐?”
“아, 아닙니다. 그냥 좀…….”
“그럼 어서 들어가자꾸나. 다들 기다릴 게다.”
백매가 들뜬 표정으로 청난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청난은 그가 갑자기 상기된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 의아했고, 그들을 안내하러 온 이는 이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없어 의아했지만 그들 중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