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백매에게 이끌리듯 다가가니 그의 양팔이 청난의 몸을 감싸 안으며 단숨에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은 지난 날 산을 내려올 때와 같았다. 청난은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이건만 그새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절 꽉 잡으세요.”
“그렇지 않더라도 날 떨어트릴 생각은 없잖느냐.”
“혹시 모르잖아요.”
백매가 창틀을 밟았다. 굳이 먼 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의 발이 바닥을 박차더니 위로 솟아올라 허공에 안착하였다.
청난의 허공답보가 바람의 미세한 균열을 밟는 것이라면, 백매의 경공은, 아니 경공이라 볼 수도 없었다. 그는 마치 자연 그 자체인 것 같았다. 바람이 바람을 밀어내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었다.
영력으로 온몸을 두르지 않은 채 맨몸으로 맞는 바람은 새로웠다. 서늘하면서도, 청량하여 기분이 좋기도 하였다. 허공에 손을 뻗으니 과연 무엇도 잡히지 않고 손 틈으로 바람이 새어 나갈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사존.”
“응? 벌써?”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다른 마을에 도착한 후였다.
아무리 청난이 하늘만 보고 있었다 하여도 그가 움직이는 것은 얼핏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청난이 느끼기엔 그는 고작 스무 걸음도 채 걷지 않았다. 바람이 몇 번 지나갔는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 또한 자연이기에 느낄 수 없던 것일까. 어쨌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이 마을은 청난의 고향인 아랑 마을보다는 컸다. 가장 안쪽에는 관아가 있었으며, 외곽엔 높은 담이 쌓여 있어 여차할 땐 출입자를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은 고요하기 그지없었으나, 청난의 불편한 눈으로도 외출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긴 하였다.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붕은 기루였다. 백매가 그곳에서 가장 안정적인 곳을 골라 청난을 내려 주어서 청난도 안에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평범한 사람조차도 쉬이 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분명 이곳은 아직 요마귀괴 중 무엇도 겪지 않았으리라.
“이곳은 평화로운 모양이구나.”
청난이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가 누각 끝에 서자 백매가 그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위험합니다.”
청난이 제 허리를 두른 큼지막한 손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닿기만 해도 부끄러워했었지. 그래서 청난은 그가 타인과 닿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지금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최근에 그의 몸에 올라앉은 적이 많아 접촉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익숙해지면 자신의 감정이 연모가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겠지.’
청난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침 백매 또한 청난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백매는 초연하게 미소 짓더니, 반대쪽 손을 점점 위로 뻗었다. 그 손이 눈앞에 다가오자 청난은 순간 긴장하고 말았다. 하지만 손은 그를 지나쳐 허공으로 뻗어졌다.
먼 하늘에서 푸드덕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다 지척에 다다르자 청난은 그것이 하얀 새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략 살펴보아도 십수 마리는 되는 크고 작은 새들이 백매의 손끝에 부리를 비비다가 다시 왔던 곳으로 날아가길 반복했다.
“그렇네요. 이 마을은 운이 좋아요. 아직 한 번도 침입을 받은 적이 없대요. 근처에 화전민들이 많은 덕을 본 모양입니다.”
“몸을 숨길 곳도, 먹을 것도 없으니, 본능적인 것들이 올 이유가 없었나 보구나.”
“네. 아무래도 이곳은 허탕인 것 같아요.”
“호오, 새들의 시선을 빌린 것이냐?”
“보기만 해도 아시다니, 역시 사존께서는 대단하세요. 맞아요. 새들이 보았던 것을 공유받았어요.”
“그것참 편리하구나. 그러고 보니 네가 기르는 영수도 새를 닮았었지. 새를 좋아했더냐?”
“네, 사존을 닮아서 좋아해요. 그럼 다음 장소로 갈까요?”
청난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했던가.
청난은 다시금 저를 안아 들려는 그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아래로 내려가자꾸나.”
백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단숨에 내려와 땅을 밟았다. 그는 청난을 살포시 내려 주며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볼일이 더 있으신가요?”
“그렇진 않아.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것도 심심하지 않으냐. 위에서 봤으니, 아래에서도 보자꾸나. 너와의 밤 산책이라 생각해도 좋겠지.”
청난은 몇 걸음 앞서 걷다가 몸을 돌려 백매에게 손을 뻗으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청난의 눈은 곱게 접혀 휘어졌으며, 밤하늘을 장식한 둥근 달이 그의 머리 위에서 밝게 비치었다.
“이 스승과 놀아 주련?”
“저로 괜찮으시다면… 제자가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백매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땅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손을 뻗어 청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청난은 이 아이가 왜 또 갑자기 수줍은 아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손을 잡고 밤 산책을 나오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때는 낮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그의 소매를 간지럽혔지만, 지금은 부쩍 자란 백매의 넓은 소매가 그의 손을 간지럽혔다.
말을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청난의 몫이었다. 청난은 자신이 본 것, 먹은 것, 들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고, 백매는 착실히 호응해 주었으니 청난은 꽤 기분이 좋아졌다.
양쪽으로 문 닫은 상가가 늘어서 있는 넓은 대로변 길을 걷던 무렵, 골목을 막 나온 개 한 마리가 청난에게 다가왔다. 청난이 가볍게 웃으며 지나치자, 개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저를 따르는 개에 대한 이유 모를 친근감이 느껴진 청난은 걸음을 멈추어 그를 기다려 주었다. 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청난의 다리에 제 몸을 비볐다.
“사람을 참 잘 따르는구나.”
청난이 개를 쓰다듬으려 허리를 낮추려던 순간, 개는 널찍한 손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당연히 그것을 든 것은 백매였다.
“이 지저분한 것이 사존의 옷을 더럽혔으니 제가 쫓아내겠습니다.”
청난은 제 제자가 개 한 마리를 경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제 시선과 가까이 올라온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떠돌이 개인가? 참 귀엽네.”
“사존……. 개를 좋아하셨나요.”
“응, 졸졸 따라오는 게 귀엽지 않으냐? 유독 개들이 나를 잘 따르더구나.”
청난이 질리도록 개를 쓰다듬다가 문뜩 고개를 올리니, 백매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잘 따르는 개가 여기도 한 마리가 있었다. 청난은 개의 머리 위에 두었던 손을 백매의 푹신푹신한 검은 머리카락 위로 옮겼다.
“그래, 그래. 참 귀엽구나.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뒤가 아닌 옆에서 따라오면 더 귀여울 텐데.”
“제자가 어찌 감히…….”
“매아야, 내가 무어라 했지?”
“…….”
백매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청난이 말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소곤거리는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제자’, ‘감히’란 말을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쓰지 말아야지?”
“하지만…….”
백매가 여전히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거렸다. 청난이 평소처럼 볼을 감싸기 위해 머리 위에서 손을 내렸을 때, 그들의 귓가에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 비-.
피리 소리인 듯싶으면서도, 동물의 울음소리처럼도 들리는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계속 반복되었다. 청난은 원래 하려던 것도 잊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게 무슨 소리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 보자.”
“네!”
청난은 자신의 발로 뛰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제자가 또 자신을 안아 들 줄은 몰랐다. 이대로 다리를 쓰지 않아 퇴화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최근에 그에게 자주 안겼었다. 하지만 소리의 정체를 모르니 최대한 빨리 갈수록 좋고, 자신의 뜀박질은 느렸으니 이번에도 순순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소리는 먼 곳에서 들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매는 공연히 눈에 띄지 않도록 이번에는 지붕이 아닌 땅을 밟아 이동했다. 그럼에도 속도가 무척 빨라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청난은 막 안긴 것 같았는데, 백매가 벌써 내려 주니 의아했다. 더구나 제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대로변만이 보였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청난이 백매의 소매를 잡아 물으려던 차에 백매가 검지를 입술 위에 대며 아무런 말 없이 어두운 골목길을 가리켰다.
청난이 그곳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원체 시력이 좋지 못한 탓에 딱히 볼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때,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만하세요. 제, 제발…….”
“낭자, 이렇게 버텨 봤자 달라지는 것 없어.”
“그래, 그래. 우리도 괜히 피 보기 싫으니 잠자코 따라와!”
“흐으… 흐으윽…….”
여성이 흐느끼는 얇은 소리와 함께 비- 비-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톤의 두 남성은 그 소리가 듣기 싫은지 피리를 뺏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무뢰한 둘이 여성에게 악행을 가하고 있으며, 그 피리 소리는 여성이 보내는 구조 신호인 것이다.
청난이 곤경에 처한 이를 두고 지나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청난은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타박타박.
“절도? 아니 납치인가. 너무 소란스럽네요. 그만큼 자신 있나 봅니다. 자신이 약자가 될 일이 없다는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