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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52)화 (52/111)

#52

빠르게 쏟아져 나온 그의 첫마디에 일어선 이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그제야 앞에 있는 세 명이 여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저는 수련에 집중하느라 세상사에 어두웠습니다. 그 탓에 노략질을 일삼는 이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했습니다.”

헛소리였다. 그는 천영근인 데다 지체 높은 수선가의 자제라 어린 시절부터 수련을 쌓아 온 실력자였다. 동네 건달은 물론이고, 무를 닦은 이들 중에서도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그 허무맹랑한 말에 연화문의 대표 세 사람은 귀신이 쓰인 것 같은 엄청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앞에서 차기 연화문주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었으니 우선은 그의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찰나에 지나가던 두 선사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제 수련이 부족하여 정신을 잃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오해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선사께서는 제 명예가 실추될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으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넘어간다면 어찌 도를 닦은 수행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이렇게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부디 이 어린 제자에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연화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닥에 넙죽 엎드려 죄를 빌었다. 연화문 수사는 자신들의 귀공자께서 다른 문파가 보는 앞에서 이토록 저자세를 취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한연화의 숙부는 손사래 치며 그를 만류하였다.

“일어나거라. 그래, 네가 그리 말하니 내 이번만은 넘어가겠다. 네가 고생하였구나.”

그제야 연화가 허리를 일으켰다. 그의 숙부는 유회평을 슬쩍 바라보려다 그만 제대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유희평이 씨익 웃었다.

아무리 수야각이 탐탁지 않아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연화의 숙부가 연화를 일으켜 세우고는 바로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제 조카가 왔으니,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지요.”

갑자기 방문하여 수야각의 소각주에게 납치와 사술을 들이밀며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하였음에도, 정작 그에게는 일말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행하였음에도 수야각주는 끝까지 그를 손님으로서 예우해 주려 굳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을 데리고 대문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 탓에 그들은 수야각의 어린 제자들 앞에서 어떠한 잡음도 내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손님들이 아주 작은 점으로 보일 때쯤에야 유회평이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 산다.”

“그런 말 마세요, 사존. 저보다 오래 사셔야지요.”

“…….”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획하니 고개를 돌려 청난을 바라보았다.

“빈말도 그럴듯한 걸로 해라. 난 밀린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겠다.”

유회평이 뒷짐을 지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번엔 주국의 한숨 소리가 거하게 들렸다. 청난은 그의 눈치를 보더니 자진하여 고개를 숙였다.

“청난이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절대 쓸 일 없을 거예요.”

“알면 됐다. 들어가 쉬어.”

주국은 고생했을 동생을 마냥 세워 둘 수 없었기에 다른 사형제를 이끌고 홀연히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그 자리에는 청난과 백매만이 남게 되었다. 먼저 말을 연 것은 백매였다.

“사존, 한 공자가 그렇게 대답할 것을 알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럼 그가 납치된 것이라 말했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셨나요?”

“그럼 납치범이 되었을 테고, 넙죽 엎드려 용서를 빌어야 했겠지.”

“……사존은 잘못하신 게 없는걸요.”

백매는 시무룩해 보이기도, 못마땅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토록 저를 생각하는 모습에 청난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리 생각해 주는 네가 있으니 뭐든 되었다. 피곤하지? 이만 들어가자꾸나.”

청난은 백매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몸을 돌려 안쪽으로 향했다. 백매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단 한 걸음의 거리를 두고 그의 등을 쫓았다.

청난의 걸음걸이는 우아하였으며, 그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풀잎이 넘실거리는 듯했다. 그는 뒷모습마저 엄숙했다.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도 가까이 갈 수도 없을 것이며, 누구도 감히 그를 보며 방금 전까지 문책을 받던 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이다.

백매가 또다시 초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청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떨어져 있는 백매의 손을 붙잡아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청난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백매는 감히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청난을 올려다보았다.

‘사존, 당신의 길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있어선 안 돼요.’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그렇게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반복해 읊었다.

그날 이후, 수야각의 소각주가 사실은 사술을 쓰는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으나, 수야각에선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문은 일주일도 가지 않았다.

소문이 그렇게 쉽게 사라진 데에는 평소 청난의 덕을 본 이들을 목소리를 내 준 덕이 있었으며, 그뿐만이 아니라 사건의 당사자인 연화문의 한연화 공자가 허구한 날 수야각에 드나들며 청난의 뒤를 졸졸 쫓기 시작한 덕이 컸다.

처음에는 은사께 감사를 표하겠다며 선물을 들고 공식적으로 방문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이유가 ‘엊그제 두고 간 머리 끈’처럼 하찮은 것이 되더니 나중에는 마치 수야각의 제자인 것처럼 아무런 기별 없이 오가는 지경까지 되었다.

그가 수야각에 오는 이유는 오직 청난이었고, 청난은 죄 없는 아이, 특히 부조리를 겪는 안타까운 아이들에게 유독 약했으니, 결국 그를 말리지 못했다.

백매는 연화와 말을 트기 시작하더니, 곧 동문 사형제와도 건강한 관계를 쌓아 가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배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저보다 어린아이에게까지 찾아가 배웠다.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면 누가 그를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결국 백매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고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청난은 그를 자신의 처소로 불러 생활을 돕게 하였다.

백매의 눈꺼풀이 사르르 벌어졌다. 다행히 잠시 예전을 추억하는 사이에 청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매는 이 당연한 사실에도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청난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더니 그 사이의 푸른 눈동자를 드러냈다.

청난은 안경을 쓰지 않아 눈앞이 흐렸지만 어째서인지 달빛에 비춰진 백매의 고운 얼굴만은 확연히 볼 수 있었다.

“매아.”

백매가 무릎을 굽혀 앉아 청난과 시선을 맞추었다.

“더 주무세요.”

청난은 그의 음성에는 마약 성분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면 이토록 포근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더 자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청난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침구를 걷으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협탁에 놓인 안경을 쓰자 시야가 단번에 뚜렷해졌다.

청난은 고개를 살짝 돌려 살짝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는 허공을 감싸는 반투명한 막이 펼쳐져 있었다. 지난밤 진영이 만든 결계와 다르게 섬세함이 느껴졌다.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니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할 일이 있어. 얼른 다녀와서 쉬자꾸나.”

“사존, 이렇게 무리하시다간 탈이 나실 거예요.”

청난은 제자의 만류에도 꿋꿋하게 침상에서 일어났다. 백매는 여전히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사존께서 외출하시는데 마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으니 순순히 한쪽에 곱게 접어 놓은 외의를 챙겨 그의 착의를 도왔다.

청난은 백매가 찾아 준 구멍에 손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있는데 왜 탈이 나겠느냐?”

“신선은 만능이 아니에요. 저는 더더욱 그러하고요.”

“만능까진 필요 없다. 그럴 일도 없어야지. 그저 다른 마을 상황을 보고 싶을 뿐이야. 내 발로 걸으면 일 주는 꼬박 걸릴 테니, 네가 좀 데려다주겠니?”

“보기만… 하시는 건가요……?”

백매는 의문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그의 옷깃을 정리하고 허리끈을 매어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청난이 중의, 외의 그리고 망토까지 꼼꼼히 챙겨 입자, 백매는 그의 뒤로 돌아갔다.

“그래, 네가 걱정할 일은 하지 않으마. 나도 내 몸 챙길 줄 알아. 아, 머리카락은 되었다. 간단히 묶는 게 좋아.”

“제자가 해 드릴게요. 어제 하신 것처럼 묶으면 되는 거죠?”

“어어, 응.”

청난의 머리카락은 전생처럼 부드럽지 못하였기에, 백매의 손길이 곱절은 들어갔다. 그가 쥔 빗을 한번 내릴 때마다 그의 손끝이 목에 닿는 것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백매의 손이 완전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지자 청난은 서둘러 고개를 앞으로 뻗어 내며 그의 곁에서 벗어났다.

“다 된 거지?”

“네, 오늘도 아름다우세요, 사존.”

백매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 세상에 시중을 들고 그리 기뻐하는 이는 오직 이 아이뿐일 것이다.

백매는 청난에게 한 걸음 떨어져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의 눈동자는 온통 청난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의 양팔은 청난을 향해 뻗었다. 창가를 넘어온 달빛이 그의 모습을 비추니, 그는 마치 저만을 위해 내려온 선군처럼 보였다. 아니,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가 내려온 이유는 오직 저에게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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