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유회평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돌리기만 하였다. 그러고는 한숨 한 번, 차 한 모금. 본론이 차에 있기라도 한 것인지 그렇게 한 주향가량을 보내고서야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도 처음 나온 것은 한숨이었다.
“하아, 청난아. 수진계의 모든 인사들이 너의 비승을 확신하고 있단다. 이곳은 네가 거쳐 가는 곳 중 하나가 될 테지. 나는 너의 됨됨이를 알고 있으나, 다른 이들은 모르지 않느냐. 혹여나 네가 사문을 나 몰라라 한다는 오해라도 살까 이 스승은 걱정이 드는구나.”
유회평은 이미 상황을 다 아는 듯했다. 마치 청난이 잘못하였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백매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백매 또한 청난이 걱정되었기에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청난은 회평의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네요.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 이제 수선계에서 너를 말릴 수 있는 자는 없으니 네 스스로가 자중해야지.”
“왜 없습니까. 백매가 있는데. 백매가 하지 말라면 하지 않을 겁니다.”
“언제 그리 팔불출이 됐느냐? 내심 이 스승의 이름이 나올까 기대했건만. 제자를 잘못 키웠어.”
청난이 회평의 빈 찻잔을 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존께서 키우셨으니 이렇게 자랐지요. 사존께서도 제자를 이토록 아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더냐?”
“백매가 있으니 절로 알게 되더군요.”
사존과 사존의 사존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 수 없던 백매는 그저 자기 몫의 차를 홀짝이며 저 혼자 초조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계속 이어질 것 같았던 대화는 유회평이 일어나면서 끊어졌다.
“이제 슬슬 가야겠다. 예상했다시피 연화문에서 사람이 왔다. 네가 소공자를 납치했다지? 괘씸한 것들. 어디 내 집에서 함부로 입을 놀려.”
“그래서 기다리게 두시고 저와 담소를 나누신 건지요?”
“그럼 다른 뜻이 있겠느냐. 이 정도 심술은 부려야지.”
유회평은 닫힌 침실 문을 힐끔 보았다.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하느냐?”
“괜찮습니다. 준비라고 할 게 있나요. 백매야, 너는 어쩔 테냐?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저도… 저도 가겠습니다.”
“오냐. 별일은 없을 게다.”
청난의 모습에 넋을 놓을 뻔한 백매는 정신을 가다듬고 벌떡 일어나 청난이 입을 새 옷을 가져왔다.
“평소 안 하는 짓을 하는구나. 각주께서 오셔서 그런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도 그렇게 꼼꼼한 제자는 아니었거든.”
“자랑이구나.”
그들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백매는 그들의 사이가 마냥 부러웠다.
‘두 분은 참 친하시구나. 나도 사존과 저렇게 허물없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으으음, 못 해. 무리야.’
유회평 또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명받던 인재였다. 백매는 그것을 알았기에 도저히 그와 자신을 한데 묶는 낯부끄러운 생각 따위는 할 수 없었다.
백매가 마음속의 땅굴을 팔 동안 청난은 어느새 허리끈을 단단히 묶고 외의까지 걸친 후였다. 그의 입 끝은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백매가 보기엔 그가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넓은 대청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있었다. 그중 수야각 사람은 주국을 포함한 청난의 사형제 셋과 방금 들어온 수야각주, 청난, 백매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연화문의 사람으로 보였다. 그중에서도 앞에 앉은 세 명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은 모두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 닿는 곳까지 치장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화려한 장신구가 휘황찬란하였는데, 그들의 외모 또한 뒤지지 않았기에 퍽 어울렸다.
백매는 그 셋 중에서도 가운데에 앉은 이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 짐작했다. 가장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도 그였다.
“초무검, 제 조카는 어디에 숨긴 거요.”
“제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청난은 짧게 대답하고는 수야각주 유회평을 따라 준비된 탁상에 가 앉았다. 백매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청난은 주국의 옆이 아닌 앞에 앉은 덕분에 백매가 그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당당하시군요, 선사.”
“당당하지 못할 것이 있나요.”
“연화문의 소공자를 납치한 것이 당당한 일이오? 그날 당신의 행동을 증언할 사람이 스물이니 발뺌할 생각은 마시오.”
어쩐지 데려온 이들이 많다 하였더니, 그날 청난을 목격한 이들을 전부 데려온 듯하였다. 청난을 대신해 대답한 것은 주국이었다.
“당사자의 자초지종을 들어 보지도 않고 납치라 단정하시는 건 다소 성급하군요.”
“본 이가 많다 하지 않았소?”
“하하, 그들이 오해한 모양입니다. 모양새가 그럴 만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벌써 그렇게 단정 지으시면,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이번에 대답한 것은 청난이었다. 그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덧붙였다.
“그리고, 한 선사께서는 저희와 격을 맞춰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존대하니 너도 존대하라는 말이었다.
한연화의 숙부는 한눈에 보아도 수야각주보다 연배가 있어 보였다. 그가 노안인 탓만은 아니고, 실제로 그는 나이가 많은 편으로, 산 아래에서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은 이미 손자를 두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수선계에서 나이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서열마저도 나이가 아니라 입문순인데, 하물며 문파의 대표로 나섰다면 나이는 그저 자신을 일 초 더 소개할 수 있는 건더기에 불과했다.
백매는 청난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평소의 그는 과할 정도로 유했고, 타인이 불편할 말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달래며 빙 돌려 말했었다. 그런 그가 상대의 부끄러운 행동을 수십 명의 사람 앞에서 지적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예상대로 상대의 얼굴빛은 그들의 술법만큼이나 붉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탁상을 박찰 것 같은 살벌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술을 악물 뿐이었다.
“부모의 허락 없이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납치가 아니면 무엇이랍니까? 초무검께서 이토록 얼굴이 두꺼우신 줄은 몰랐습니다.”
“말조심하세요. 화 선사.”
이번에 청난을 대신한 것은 수야각주 유회평이었다. 그 탓에 한연화의 숙부는 이마 사이에 선 하나가 더 그어졌다.
“하, 그리 우기시니 어찌할 바가 없습니다. 그럼 다른 것도 부정해 보시지요. 초무검께서 사술을 쓰셨다지요?”
“……!”
주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그런 모함을 입에 담다니! 수야각이 우습게 보이나?”
“들은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사실인지는 초무검께서 말씀하시겠죠. 물론 부정하시겠지만요. 목격자인 스물의 수사들이 함께 왔으니 이들과 함께 진상을 알아내 보지요.”
그는 말을 돌리려는 노력을 안 하는 건지, 그럴 능력이 없는 건지 대놓고 수야각과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태도였다.
연화문의 수사들뿐만 아니라 수야각 수사들의 시선까지 청난에게 모여들었다. 청난은 조금도 긴장한 내색이 없이 여전히 여유로운 낯이었다. 그는 마치 객잔 안의 주목받는 이야기꾼처럼 옅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막 열리려던 찰나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자가 막 귀가하여 피곤이 쌓였을 겁니다. 차후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시지요. 볕이 잘 드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 놓았으니, 연화문의 수사께서도 피로를 풀도록 하세요.”
“유 각주.”
“화 선사, 제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대놓고 잘잘못을 따지겠다는 연화문의 입장에 유회평은 보란 듯이 제자를 감싸는 것으로 대응했다. 온 대청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뼘이라도 잘못 뻗었다간 누군가의 팔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분위기에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드르륵.
그런 긴장감 속에서 들려온 문소리는 자연히 이목을 끌었다.
그 시선 속에서 등장한 이는 뜻밖의 인물이었다.
“한 공자.”
한연화는 납치된 피해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고, 다친 곳은커녕 옷매무새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본가에서 일어나 직속 하인들의 손에 치장받은 듯한 공자님의 모습이었다.
연화는 놀란 스물세 쌍의 눈과 그렇지 않은 여섯 쌍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는 손을 맞대어 예의를 표했다.
“실례인 줄 알지만, 저로 인한 오해는 제가 푸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되어 이렇게 허락 없이 방문하였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한 공자, 이쪽으로 와 앉도록 하세요.”
유회평이 그를 반기며 가까운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그가 발을 내딛자 위풍당당한 귀공자의 면모가 더욱 두드러졌다. 누가 이런 이가 납치되었다 말하는가. 지나가는 개가 소리 내어 웃었다는 말보다도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는 안내된 자리에 앉기 전에 청난을 향해 넙죽 인사하였다.
“초무검 진 선사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계획에 없던, 생각지도 못한 조카의 반응에 그의 숙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뭐, 뭐 하는 게냐?”
“숙부,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선사께서는 저는 도와주셨을 뿐입니다.”
연화가 눈썹을 휘며 슬픈 낯을 하였다. 청난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느냐?”
“네, 물론입니다. 제가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스물의 수사 중 대여섯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연화의 말이 좀 더 빨랐다.
“저는 수련이 너무 힘든 탓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