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홀로 남겨진 백매는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시게 되면 어떡하지? 어디 계신 건지 전혀 안 보여.’
그는 맞잡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하였다. 결국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던 백매가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 발이 다시 땅에 닿기도 전에 불길이 양방향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청난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청난의 오른쪽 팔에는 백매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정신을 잃은 채 매달려 있었다. 청난이 왼쪽 손을 앞으로 뻗자, 백매가 그를 향해 달려갔다.
“사, 사존!”
“잘 지키고 있었구나. 이제 도망가야지.”
“도, 도망이요?”
누가? 사존이? 신이 될 사람이?
‘도망’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붙기엔 너무나 저급하지 않은가. 하지만 백매는 놀랄 틈도 없이 청난의 왼팔에 잡혀 그의 몸에 바짝 밀착된 채 들어 올려졌다. 그렇게 청난의 양팔은 두 아이로 봉쇄되었다.
백매는 그가 이번에도 땅을 박차고 오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예상과 달리 그는 단 한 걸음을 걸었을 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윽고 백매의 목덜미에 시린 바람이 지나갔다. 눈을 떠 보니 공중 한가운데였다. 백매가 화들짝 놀라자 청난은 그의 몸을 안쪽으로 당겼다.
“그러다 떨어져.”
그의 다정한 음성에 백매는 금방 안정되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백매는 자신의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청난과 백매는 검날을 밟고 선 채였다. 그들을 태운 검이 공중을 날고 있었다.
“……검?”
“그래, 어검술이라고 한다.”
청난의 검은 연검으로 굉장히 얇았는데, 사람 셋을 태우고도 전혀 휘어지지 않았다. 백매는 이것에서 미세한 영력을 느꼈다.
“영력을 넣으신 건가요……?”
“맞아. 그러니 떨어질 걱정 말거라. 네 표정에 다 쓰여 있구나.”
백매는 청난의 옷을 부여잡았다.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닌데.’
비행은 안정적이었으며 머잖아 그들은 인근 산 중턱에 내릴 수 있었다. 그들의 발이 떨어지자 검은 청난의 허리춤에 고정된 검집 안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청난은 데려온 아이를 바위 앞에 기대어 앉혔다. 백매는 그제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청난과 문지기의 대화 덕분에 백매는 이 소년이 연화문의 ‘한연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난은 연화의 손목을 잡아 영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영기는 순정함으로 충만했기에 마치, 신선의 가호처럼 보였다. 백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방금 전 그의 싸움이 생각났다.
“사존, 그럼 검을 부수던 술법은 무어라 하나요?”
“그건 네가 익힐 일은 없을 것이니 몰라도 된다.”
“예……?”
청난은 지금까지 백매가 묻지 않은 것을 알려 준 적은 있어도 백매의 물음에 답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백매의 표정에 당황이 역력하였는지 청난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그건 사술이다. 쓴다면 정파로부터 매도될 테지. 그러니 잊어라.”
“그, 그럼 사존께서는 왜 쓰신 거죠?”
백매의 눈썹꼬리가 내려가며 걱정이 한가득 담겼다. 그의 표정을 보니 첫날의 경계심 많았던 백매가 떠올랐고, 청난은 어쩐지 뿌듯함이 일어 평소보다도 더욱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생을 구하는 데에 정과 사를 구분하여 무얼 하겠느냐.”
“하지만 다들 손가락질할 거예요.”
“내 편을 들어 줄 한 사람이면 족하다.”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잖아요.”
청난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은 싸움의 잔해들로 지저분하였는데, 입가는 여전히 둥근 호를 그리고 있었다.
“흠… 그럼, 그냥 내가 뿌듯할 뿐이겠구나.”
그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어지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의 볼을 덮었다. 어째서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건지 백매는 알 수 없었다.
딸꾹.
백매는 자신의 딸꾹질에 양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딸꾹질이 어찌 멈추겠는가. 딸꾹딸꾹. 새어 나오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양어깨가 쉼 없이 들썩거렸다. 청난은 푸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늘게 뜬 백매의 시야에는 오직 그만이 담겼다. 앞에 누운 한연화도, 주변의 갖가지 나무들도, 심지어 어둠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딸꾹, 딸꾹, 딸꾹.
백매의 딸꾹질이 더욱 거세졌다. 청난은 웃음을 갈무리하고 바짝 다가와 등을 문질러 주었다.
그 덕에 백매는 바로 눈앞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저분해졌다지만 여전히 청난의 이목구비는 가히 신선의 것이라 불릴 만했다. 얇은 눈썹과 둥근 눈매가,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바로 눈앞에 닿았다.
백매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으……. 괜찮습니다. 제, 제자는 이… 이렇게 있으면……!”
백매는 몸을 완전히 돌려 양 무릎을 안고 고개를 숙여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백매는 자신이 삼 초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백매는 부끄러웠지만 딸꾹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아침 해가 산등성을 타고 올라와 그들의 몸을 밝게 비추어 주었다.
백매는 살금살금 고개를 일으켰다.
“사존, 이젠 어떡하실 건가요?”
“우선 한 공자가 쉴 곳을 찾아야겠다. 내상을 입은 것 같진 않지만 안정을 취해야 해.”
“으음……. 사존, 저희 한 공자를 납치한 건가요?”
“그거야 그의 생각에 달렸지.”
청난이 연화를 안아 들었다. 그의 입에서 끄응,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조용해졌다. 연화는 백매와 비슷한 또래지만 그보단 골격이 좋았다. 그 탓에 청난은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바짝 안을 수밖에 없었다.
백매는 문뜩 생각이 들었다. 저도 저렇게 안아 주셨을까. 눈 속에서 언 저를 저리 다정하게 안아 주셨을까. 백매는 지금 그의 품 안에 있는 게 다른 이라는 것이 불편했다. 하지만 그가 어찌 환자의 자리를 뺏겠는가. 또 어찌 사존께 안아 달라 할 수 있겠는가.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백매는 조용히 청난의 옆으로 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는 것으로 스스로를 달랬다.
안 하던 행동을 한 탓인지 청난이 그를 돌아보았다. 백매는 서둘러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아, 아직 어두워서요. 이렇게 가도 될까요……?”
“아니, 다시 어검할 것이니 허리를 꽉 잡거라.”
청난은 백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의 팔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하였다.
“……!”
그들의 간격은 너무나 가까워졌다. 백매는 갑자기 온몸에서 열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우스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혹여 사존께서 보시면 우습게 생각하실까 걱정되었다. 백매는 얼굴을 감추고 싶었지만, 지금은 손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다.
어느새 발밑으로 온 검이 그들을 태우고 공중에 올랐다. 청난이 연화를 제 몸에 기대게 하며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반대쪽 손으로 백매의 등을 받쳐 주었다.
어검술 또한 영력을 소모하는 술법이었고, 오랜 비행은 영력뿐만 아니라 체력까지 소모했다. 연화문의 수사가 쫓아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청난은 힘을 비축하기 위해 중간 마을에서 휴식하기로 하였다.
밤이 늦은 까닭에 그들은 가까스로 하나의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방은 큰 편이 아니었는데 침상을 두 개 넣어 억지스럽게 이인실로 꾸며져 있었다. 가격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방이었으나, 청난의 주머니 사정을 보았을 때 아깝다는 생각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연화를 침상에 눕힌 청난이 뒤늦게 숨을 골랐다.
“후우…….”
백매는 문을 닫고 짐을 정리하다 들려온 청난의 신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백매는 청난에게 쪼르르 달려가고 싶었으나 그가 자신을 귀찮게 여길까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결국 백매는 제자리에 앉아 무엇도 쥐지 않은 빈 손가락으로 허공을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백매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 청난이 웃음 지었다.
“아가, 스승을 걱정하는 것이냐?”
머릿속을 가득 메꾸고 있던 사존이 자신을 부르자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백매는 한쪽에 비치된 주전자에서 뜨거운 차를 한 잔 따라 청난에게 가져갔다.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처음이구나.”
“기분 상하셨나요?”
“그럴 리가 없잖느냐. 도리어 기분이 좋아졌어.”
청난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백매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사존, 많이 피곤하세요?”
“조금. 아직은 인간이니 말이야.”
청난이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그의 가슴은 눈에 띄게 오르내리며 거친 숨을 달래고 있었다. 이제야 피곤함이 몰려온 그는 침상 위에 고개를 뉘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청난의 고갯짓을 따라 침상을 어지럽혔고, 가쁜 숨은 그의 볼을 붉게 물들였다.
백매는 청난과 적어도 두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의 숨소리가 귀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백매는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사방을 헤매다가 주전자 옆에 놓인 사소한 주전부리를 눈에 담았다.
“사존, 시장하시죠? 제, 제자가 식사를 청하고 오겠습니다!”
백매는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헐레벌떡 방문을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청난은 자신이 벽곡 수련을 끝내 먹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자신들은 배불리 먹은 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짚어 주지 못하였다.
그들이 지금껏 다녔던 객잔은 대체로 일 층은 식당, 이 층은 객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들이 잡은 방 또한 이 층에 있었다. 때문에 백매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 식당을 찾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또 다른 객실 문일 뿐이었다.
‘설마 여긴 식당이 없나?’
백매가 어째야 할 바를 몰라 제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하고 있을 때, 복도 끝에서 저벅저벅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기, 뭐 하고 있소?”
목소리의 주인이 어두운 복도에서 나와 백매의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는 방을 내주었던 나이 많은 남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