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청난은 그에게 더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접시에 월병을 세 개 옮겨 담아 깨작깨작 먹으며 거리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백매도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온통 어두웠고, 오직 사람이 만든 불빛만이 앞을 밝혀 주었다.
그 사이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길이 있었다. 백매는 문뜩 그곳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잘 어울렸다. 적어도 지금 입고 있는 값진 의복보단 더.
어느덧 청난의 시선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백매로 옮겨졌다.
“아가, 넌 대단한 사람이야.”
“……네?”
“네 가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뛰어나.”
“으음… 사존께서는 제 생각도 읽을 줄 아시나요?”
“그래, 네 스승도 대단한 사람이지. 넌 그런 내가 보증한 사람이니 그런 맞지 않는 방석에 앉았다는 표정은 거두어라. 입가에 묻은 월병도 닦으면 좋고.”
백매가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자신의 입 주변을 비볐다.
청난은 뭐가 좋은지 푸흐 웃음보를 터트렸고, 백매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건 먼저 말해 주세요. 제자의 지저분한 모습이 사존을 부끄럽게 만들까 염려됩니다.”
“그 정도로 부끄러워질 체면이 아니니 걱정 말아라.”
백매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백매는 아직 청난의 장난과 진담을 구분할 줄 몰랐기에 무슨 말이든 소스라치게 놀랐고, 대처할 줄도 몰랐다. 말수가 적은 백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청난도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물으며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이, 일단, 먹자.’
백매는 자신이 열중해 먹으면 말을 걸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양손 가득 월병을 잡았다.
백매의 입 안에 한 개분의 월병이 가득 찼을 때, 갑자기 먼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
백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청난의 표정 또한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창밖으로 지나는 이들의 표정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였다.
“기이하구나.”
“불을 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불꽃놀이 같은 게 아닐까요?”
“네 느낌엔 그런 것 같으냐?”
그는 생각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말했다.
백매는 차분히 자신에게 끼쳐 오는 열기를 느꼈다. 불꽃놀이 같은 오락용이라기엔 그 기세가 강했다.
“……아니요. 하지만 뭔지는 모르겠어요. 봐야 알 것 같아요.”
“좋아, 그럼 가 보자꾸나.”
청난이 탁상에 은자 두 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먹은 양에 비해서 턱없이 많은 금액이었다. 백매는 은자를 끝까지 흘겨보다 청난의 뒤를 쫓아 가게 밖으로 나갔다.
밤이 무르익은 탓에 행인은 몇 없었고, 그나마도 그저 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귀가하는 농민으로만 보일 뿐, 불길에서 도망치거나 걱정스러워하는 듯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로변에 가까워질수록 열기는 더욱 강렬해졌고 청난과 백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드높은 담을 넘도록 이글거리는 화려하고 또한 거대한 불길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 집은 담이 높을 뿐 아니라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그 안의 거대함은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람 네다섯은 쌓아 올린 것 같은 거대한 대문 앞의 양쪽에는 덩치가 큰 문지기가 둘 있었는데, 이들의 표정도 지나며 봐 온 마을 주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도리어 문 앞에 선 두 사람을 경계하는 듯싶었다.
“화… 현한가(火玄漢家)……?”
“아니, 저건 ‘수(率)’라고 읽는단다. ‘화수한가(火率漢家)’. 불을 거느리는 한씨 가문이라는 뜻이지. 연화문주의 집이 이곳에 있는 줄은 몰랐구나.”
“공자께서는 수선자이십니까?”
청난과 백매의 대화를 들은 문지기 중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청난의 얼굴을 살피는가 싶더니 그의 허리춤에 매인 검파를 보고는 움찔거렸다. 방금까지 불만이 담겼던 목소리가 금세 공손해졌다.
“혹, 초무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저를 아시는 듯한데 연을 보아서 제게 상황을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연이라니요. 수선계에서 초무검을 모르는 자는 몇 안 될 겁니다. 저 또한 진 선사를 존경하는 수사 중 한 명입니다. 이곳은 연화문주님의 본가로, 공자께서 수련을 하고 계실 뿐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민간인들이 놀랄 것을 염려해 결계를 쳐 두었는데, 역시 초무검을 속이기엔 부족한 모양입니다.”
“과찬입니다. 공자라 하시면 천영근이라 하는 한연화 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하, 저희 공자님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다니, 한씨 가문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매우 뿌듯합니다. 맞습니다.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계신 분이죠. 온 가문이 그분을 지원하는 것에 조금도 아끼지 않습니다. 오늘 수행에 쓴 것만 해도 작은 나라가 일 년은 먹고살 겁니다. 더구나 공자께서 그리도 총명하시니, 하늘로 오르시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리되시면 저희 공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성과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하였다. 그에 청난은 경계심을 풀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다음엔 정식으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훌륭한 수선자를 뵈어 영광입니다.”
그들의 대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청난이 가볍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을 때,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미약한 비명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사, 살려……!”
청난이 몸을 획 돌렸다. 비명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경계하는 문지기의 태도가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알려 주었다. 문지기가 허리에 매인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기세당당하게 청난의 앞을 막아섰다.
“방문은 다음에 하신다 하셨지요?”
“정녕 저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 수행일 뿐입니까?”
“설마 한씨 가문에서 공자를 해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수행일 뿐인지 여쭈었습니다.”
청난의 손이 검파에 닿자 그 끝에 달린 옥들이 서로 부딪치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는 긴장감이 서렸고, 그들 중 조금도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백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파밧-!
대치 중이던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문지기는 청난이 아닌 백매를 향해 뛰었다. 청난은 그의 추잡한 속셈을 뒤늦게서야 깨닫고 급히 방향을 돌렸다.
청난의 검집에서부터 얇은 검날이 물결쳤다. 그리고…….
채앵-.
서로의 검이 부딪쳤다.
백매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감히 어린아이를 노리다니!”
“당신이야말로 저희 소공자의 수행을 방해하려 들면서, 어찌 그리 당당하시오?”
채챙. 챙. 두 검은 네 번의 합을 더 주고받았고, 곧 함께 있던 다른 문지기를 비롯하여 네 명의 지원 인력이 가세하였다. 그들의 가운데 있는 청난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검을 막아 내기 급급해 보였다.
“이쯤에서 그만두신다면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내 행동은 내가 책임질 것이야. 자네들도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지게나!”
청난의 발이 땅을 누르더니, 곧 가볍게 튀어 올랐다.
그에 비해 대치 중이던 다섯 명의 남성들의 검은 푹 땅에 박히더니 아무리 당겨도 뽑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박힌 검 주변의 땅이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기운이 곧 검을 타고 올라오더니, 쨍강! 그들의 검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무기를 잃은 그들이 당황하는 순간을 청난은 놓치지 않았다.
“백매! 들어가!”
“네? 네…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당황했지만, 백매는 그의 말을 착실히 수행하였다. 문지기들은 청난을 상대하느라 자리를 비웠으니, 문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아악! 악! 악! 사, 살려 주세요!”
더욱 거세진 비명 소리는 마치 재촉하는 것처럼 들려서 백매는 짧은 다리로 힘차게 뛰었다. 그는 온몸으로 대문을 밀어 간신히 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안쪽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 문을 비집고 들어온 작은 소년을 향해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에 백매는 주춤할 뻔하였다.
“가자꾸나.”
하지만 어느새 들어온 청난이 그의 등을 받치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청난은 백매를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그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리자 어디선가 쏘아진 물줄기가 그의 앞을 터 주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술법에 집 안을 지키던 이들 중 누구도 그들에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청난의 한 걸음은 다른 이들의 다섯 걸음보다 빨랐으니, 그들은 금세 뒤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의 근원지가 바로 그곳이었다.
하늘을 뚫을 듯 드높게 타오르는 불길의 중앙에는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불길은 닿을 듯 말 듯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
청난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를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런 불길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한 곳에 오직 아이 혼자 남겨 둔 것이다.
청난은 앞으로 더 다가가기 전에 백매를 옆에 내려 주었다.
“사존……?”
“뜨거우니 여기 있거라. 누군가 오면 소리치고.”
청난은 당장이라도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작정이었다. 하지만 백매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청난은 당장 뿌리칠 수 있음에도 붙잡힌 소매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백매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것인지 어안이 벙벙해 보였지만 끝내 소매를 놓지 않았다.
“네 스승은 강하니 걱정 말아라. 이로써 네게 친구가 생기면 좋겠구나.”
청난이 백매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의 등 뒤에서는 황궁마저 집어삼킬 것 같은 강한 불길이 일고 있는데도 그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이기에 백매는 더 이상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작은 손이 떨어지자 청난은 곧장 몸을 돌려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백매는 불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청난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