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초하와 백매는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실 대화라고 하긴 무색하였다. 초하가 말하면 백매는 끄덕이거나 고개를 저었을 뿐, 그가 말을 하는 건 일 할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초하가 사존께서 오신 것 같다며 대화를 멈추었다. 백매에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안 것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상대가 이미 떠나고 간 후였고, 곧 청난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쫓아가지 못했다.
백매는 청난의 발걸음에 맞춰 문을 열어 주었다.
청난은 백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방 안을 훑어보았다.
“친구가 왔다 간 모양이구나.”
“주 사형이었어요. 근처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래, 형님의 처소가 이 근방이란다.”
청난은 외투를 걸어 놓고는 나가기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들었다. 백매는 그것을 보자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붓을 들었다.
청난은 백매를 보고 슬며시 웃고는 자신의 책에 집중하였다. 그는 방금 들어온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한순간에 책에 빠져들었다.
그에 비해 백매는 붓에 집중하지 못하였다. 주국을 얘기하며 빙긋 웃던 초하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나고 말았다. 백매는 고개를 살짝 돌려 청난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매는 이제껏 청난보다 아름다운 이는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처음 보았던 날에는 눈을 뜨자마자 본 청난의 모습에 자신이 죽은 것이라고 오해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설명이 더 필요할까. 확실히 그는 시선을 끄는 얼굴이었고, 그의 몸가짐과 실력마저 출중하니 그를 보며 시선이 돌아가지 않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계속 보게 되는 것일까.
청난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그 덕에 그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뭐든 대답해 주마.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얼굴에 쓰여 있구나.”
“아.”
백매가 소매를 길게 빼어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농이다 농. 말해 보거라, 주 사질이 네게 어떤 궁금증을 남기고 갔느냐?”
“그것이… 주 사형과 진 사백은 사이가 각별하신 것 같았습니다. 보통 그러나요?”
“호오.”
청난은 읽고 있던 책을 펼친 채 바닥에 엎어 두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수야각은 다른 문파와 달리 입문하는 제자의 수가 적단다. 지원자는 늘 많은데도 말이지. 왜 그런지 알겠느냐?”
백매는 고개를 좌우로 두 번 돌렸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주기적으로 산문을 개방하고 새로운 제자를 받는다. 하지만 우리 수야각은 인원이 많을 때에는 제자를 받지 않지. 올해도 오 년 만에 산문을 열었던 것이었단다. 그리고 산문을 열어도 스승과 제자가 눈이 맞아야 하지.”
“네?”
청난이 길거리에서 주워 들었던 단어를 말하자 백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과거에 백매는 ‘눈이 맞다’는 말을 누구와 누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지금 청난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는 것을 보니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백매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었단 게 부끄러웠다. 능력을 고루 갖추신 사존께서 독심술은 익히지 않으신 것이 다행이었다.
“산문을 열면 입문을 원하는 아이들이 모여들지. 그러면 제자를 받을 준비가 된 수사들이 그중에서 누구를 거둘지 고른단다. 그런데 너처럼 재능이 탁월한 아이들은 인기도 많은 법이지 않으냐. 여러 명의 수사가 한 아이를 제자로 받길 원하는 경우, 많은 문파에서는 항렬을 따른다. 높은 항렬의 제자가 되는 거지. 하지만 수야각에서는 아이들이 고른다. 그리고 그중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버리기까지 해.”
“그래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란다. 수행은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애초에 서로에게 마음이 있어야만이 사제 관계를 맺는데, 수야각은 문하생이 적기도 한 탓에 더욱 애틋한 편이야.”
“그럼 사존께서도…….”
“응, 널 애정하지.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느냐?”
‘아니요.’
“아… 아 네, 네! 오늘도 가르침 감사합니다.”
백매는 하마터면 진짜 답을 입 밖으로 꺼낼 뻔하였다. 어떻게 감히 그에게 불만을 얘기하겠는가.
“그래, 그럼 다시 공부할까?”
“네, 사존.”
백매의 머릿속이 자신도 깨닫지 못할 것들로 메꾸어지는 동안, 백매의 손이 새하얀 종이 위를 먹으로 채워 나갔다.
밤이 무르익었다. 지금 저잣거리에 남아 있는 자들은 하루를 달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백매와 청난 또한 거기에 속했다.
백매가 입문한 지 반년째, 그들은 산을 내려왔다.
사실 청난은 원래 수야각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로 바쁜 편이었다. 하지만 백매를 낯선 환경에 홀로 둘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의뢰를 거절해 왔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들은 오래된 다과집에 앉았다. 점원이 차를 내오자 청난이 주전자를 들어 백매의 잔에 따라 주었다.
“오늘 어땠느냐? 오늘처럼 나오는 일이 많아질 텐데, 괜찮으냐?”
백매는 잠깐 생각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대답은 되도록 말로 해 주면 좋겠구나. 눈이 침침한 어르신들이 꽤 많으니 말이야.”
“네.”
“잘했어.”
청난은 씨익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진한 매화 향이 코끝을 당겼고, 입에 담으니 끝 맛이 청량하였다.
“역시 유명한 곳은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차 맛이 좋아. 선물로 들고 가야겠다. 너도 한잔 마신 후에 하고 싶던 말을 해 주렴.”
백매의 어깨가 들썩였다. 자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그는 눈치 보듯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청난과 마주 보았다.
“너는 말하고 싶은 게 있을 때 티가 난단다. 너와 보낸 반년이 괜한 것이었겠느냐. 생각이 정리되면 말하거라. 네 스승은 속이 좁지 않으니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
“그리…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냥 조금 의아해서요.”
“무엇이?”
“원래도 이런 사사로운 일을 직접 하시나요? 문파엔 다른 제자들도 있는데… 소각주께서 하실 만한 것은 아닌 것 같아서요.”
백매가 이런 의문을 갖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수야각에서 그들이 오늘 방문한 곳까지는 두 개의 큰 강을 건너야 할 정도로 길이 멀었다. 청난의 발이 빨랐으니 그리 긴 시간을 쓰진 않았지만 그의 영력은 쓰였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 가며 간 것에 비해, 정작 그곳에서 한 일은 산짐승을 잡는 것에 불과했다. 산짐승은 관아에 연락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나? 백매는 그것을 굳이 멀리 있는 수야각의 수사들에게 의뢰하는 이유도,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요량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그들이 날 찾았으니 내가 가야 하지 않겠어? 너도 내 처소에서 형님이 나오면 당황하지 않겠느냐.”
“그으… 건 그렇지만… 그럼 다른 문파의 대제자들도 멧돼지를… 잡나요?”
백매가 조심스럽게 멧돼지를 얘기하자 청난은 그만 파핫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귀의 정체를 보고 많이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하하하, 글쎄다. 내가 그들의 문하가 아니니 그들에게도 멧돼지 의뢰가 가는지는 모르겠구나.”
“그럼 그분들은 멧돼지를 잡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도 잘 모르겠구나. 멧돼지를 잡았다는 것은 별로 자랑할 거리가 못 되니 굳이 말하진 않았겠지. 일단은, 푸흐, 들어 본 적이 없구나.”
청난은 백매가 멧돼지를 말할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청난은 백매의 귀여운 모습을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그의 소양은 그를 가르치는 것이지, 놀리는 것은 아니었으니 웃음을 갈무리하며 차를 홀짝였다.
“백매야.”
“네, 사존 말씀하세요.”
“강이 넘치면 사람들이 무엇을 가장 먼저 하는지 아느냐?”
갑작스러운 청난의 질문에 백매는 차를 마시려던 손을 멈추었다. 그에겐 집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는 산과 들을 건너기엔 너무 어렸고, 그가 구걸을 하던 마을 인근에는 강이 없었기 때문에 강이 넘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댐을 세우지 않을까요?”
“물론 그것도 하겠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도를 한단다. 아마 하백신께 올리겠구나.”
청난이 백매의 찻잔을 향해 손짓하자 백매는 그제야 멈춘 손을 움직여 차를 홀짝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청난이 말을 이었다.
“산불이 나면 힘 있는 자들은 물동이를 나르겠지만, 그것조차 어려운 이들은 산신을 찾지. 신이라 함은 강자보다 약자를 볼 일이 더 많지 않겠느냐. 그러니 차후를 위한 예행연습이라 해 두마.”
백매는 그의 말을 들으니 더 알 수 없어졌다.
“사존께서는 신이 되실 거죠?”
“응, 그리고 너도 신이 될 테지.”
“저, 저는…….”
“된다, 돼.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자, 이것도 먹거라. 이 지방에서는 이것이 가장 유명하다고 하더구나.”
백매는 한번 축 처지기 시작하면 땅으로 꺼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으니, 청난은 그럴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어느새 점소이가 상 위에 한가득 다과를 올렸다. 둥근 반죽에 다양한 문양이 찍힌 월병이 눈에 들어왔다. 청난은 월병이 담긴 그릇을 백매에게 밀어 주었다.
이렇게 청난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에 들렀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먹지 않았다. 지금도 이미 저녁 식사를 한 후라 전혀 배고프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굳이 유명한 월병집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새 청난의 이런 식습관 아닌 식습관에 익숙해진 백매는 순순히 그가 원하는 대로 월병을 입에 넣었다.
“아.”
“어떠냐, 전에 먹은 것과는 다르지?”
백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짧은 말을 달았다.
“네. 훨씬 부드러워요.”
“이 지방에서는 월병 안에 달걀노른자를 넣는다고 하더구나. 특히나 이 집은 반죽을 부드럽게 구워 내 맛이 일품이지.”
백매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질문이 아니었기에 소리 내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조용히 월병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