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식사를 한 후에는 서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준비된 서적이 있었고, 나이가 많은 제자가 그것을 보며 상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백매는 글을 몰랐기 때문에 서적은 읽을 수 없었지만, 설명 덕분에 얼핏 알 수 있었다.
수야각 제자로서 첫날의 일과는 숙소로 안내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스승의 거처에서 생활하는 소수의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한 지붕 아래에서 숙박을 함께하였다. 제자들은 개인 방이 주어졌는데, 부유한 집안에서 온 이들이 너무나 작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통해 전해졌다.
백매는 방이 너무 넓은 탓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가져 본 집에 처음으로 가져 본 방은 그에게 너무 낯설었다. 우선 백매는 청난에게 처음 받았던 옷을 장 안에 넣어 두었다. 자신의 방에 자신의 것을 마음대로 넣어 본 첫 경험이었다.
그러곤 입었던 옷을 벗어 장에 넣지 않고 바닥에 개어 두었다. 그것은 한참을 바라본 백매는 이불을 깔고 몸을 뉘었다.
“초무검의 제자는 어디 있어?”
“안쪽에. 그보다 그 애를 너무 괴롭히지 마.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궁금한 걸 어떡해?”
아직 소등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밖에선 여전히 자잘한 대화 소리가 오갔다. 그간 길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었으니 이 정도 소리는 소음도 아니었다. 백매는 습관처럼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이불을 잡은 탓에 그럴 수 없었다.
“매아, 잠귀가 어둡구나? 계속 불렀는데.”
“사존.”
청난이 소복에 얇은 외투를 거치고 머리카락은 아래에서 살짝 묶은, 비교적 가벼운 차림새로 그의 이불 옆에 서 있었다.
“일어나자. 네가 할 게 있단다. 가서 종이와 붓도 가져오거라.”
백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벗어 둔 옷을 집었다. 백매는 ‘스승의 앞에서 갖추어야 할 복장 예의’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도리가 없었으니 청난을 따라 외의를 살짝 걸치기만 하였다.
청난은 한쪽에 놓인 탁상 옆에 가 앉았다. 백매가 종이와 붓을 꺼내 그의 맞은편에 앉자 청난은 소매 안에서 긴 두루마리를 한 장 꺼내어 건네주었다. 백매가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무언가 적혀 있었는데, 백매는 이것이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것 외에는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백매는 부끄러웠다.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맞지 않는 곳에 감히 앉아 있다는 것에서 온 부끄러움이었다. 백매의 어깨가 움츠러들며 목이 굽어졌다.
그러자 청난이 그의 손을 사뿐히 잡아 탁상 위로 끌어 올렸다. 그는 백매가 놀라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그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주었다.
“아무렇게나 쥐어도 되지만, 떨어트리지 않으려면 이 자세로 연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 네?”
“오늘부터 매일 밤 나와 글공부를 할 것인데, 괜찮겠느냐?”
백매는 청난의 말에 머뭇거리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싫으냐?”
“아, 아니에요. 그것이……. 사존께서는 알고 계셨군요.”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추측했지. 나는 생애 처음 쓴 글씨가 내 이름이었다. 그런데 너는 이름이 없었으니 어디 글을 쓸 일이 있었겠느냐. 수행은 글을 몰라도 할 수 있지만, 글을 알면 더욱 증진할 수 있으니 배워 두면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야.”
백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부턴 네가 내 처소로 오거라. 아무래도 제자의 처소에 매일같이 오는 건… 조금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청난은 민망해했지만, 백매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청난은 백매의 손을 잡아 흰 종이 위에 붓끝을 눌렀다. 검은 먹물은 종이를 제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
청난의 처소가 사각사각 먹을 가는 소리로 채워졌다. 탁. 손의 주인은 먹을 내려놓고는 붓을 쥐었다. 방 안에 무엇 하나 멋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고, 유일하게 앉아 있는 이 또한 절대 값싸지 않은 것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그가 붓을 쥔 방식은 엉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백매가 붓을 쥔 지 고작 일 주가 지났을 뿐이니 이는 당연했다.
수야각은 칠 일 중 엿새는 수련에 매진하고, 하루는 휴식을 취했다. 오늘은 백매의 첫 휴일이었으나, 그는 휴일을 즐길 줄 몰랐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청난의 처소에 와 글공부를 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백매가 글을 쓸 동안 청난은 그의 옆에서 서책을 읽었으나, 수야각의 기대주는 휴일에도 마음껏 쉬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찾아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쁜 탓에 처소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백매는 청난이 자리에 없다 하더라도 착실히 자리에 앉아 붓을 움직였다.
그러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 하앗!”
기합 소리가 들리자 백매는 창가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지루하기도 하였고, 그 목소리가 낯익기도 했기에 흥미가 돌았다.
백매는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를 불러 수련을 방해하는 것과 이대로 남모르게 훔쳐보는 것 중 어느 쪽이 덜 실례일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먼저 백매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화 사제!”
그는 주초하였다.
백매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인사를 건넸다.
“사제가 여긴 어쩐 일이야. 벌써 진 사숙과 생활하게 된 거야?”
“아니에요.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사존께서는 각주께서 호출하셔서 잠시 나가셨어요.”
초하의 피부는 발갛게 익었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호흡은 정갈하였기에 꾸며진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우리 사존께서도 사숙과 같이 계시나 보다. 아침부터 안 보이셨거든. 응?”
초하는 백매의 시선이 자신의 검을 향해 있는 것을 보았다.
“사제는 아직 진검을 쥐어 본 적이 없지? 너도 머잖아 검을 받게 될 거야. 진 사숙께서 그 탓에 바쁘신 걸지도 모르겠다. 원래도 바쁘셨지만 요즘은 더하신 것 같아.”
“사존께서?”
“응, 수야각의 제자들이 처음 드는 검은 스승으로부터 하사받는 검이거든. 내 검도 우리 사존께서 주셨어.”
“사존께서…….”
주초하는 평소에도 웃음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달리 더 기뻐할 때가 있었는데, 바로 지금처럼 그의 사존, 진주국에 대한 얘기를 할 때였다.
“사백께 검을 받은 게 기쁜 건가요?”
“네가 보기에도 티가 많이 나는구나. 응, 기뻐. 사존께서 나만을 위해 어렵게 구해 주셨거든.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
나만을 위해.
어쩐지 초하의 그 말이 입 끝에 맴돌았다.
만약 백매가 욕심이라는 욕망을 으레 알던 아이였더라면, 이 순간의 감정도 알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못하였으니, 그저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채 하염없이 검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초하는 이 사제에게 남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천재는 독특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게 둥근 눈으로 마냥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독특하기보다는 막 태어나 세상 구경하기 바쁜 어린 동물처럼 느껴졌다.
초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숙께서도 그러실 거야.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두 분 많이 닮으셨거든.”
초하의 말에 백매는 지난날을 떠올랐다. 기억 속에 있는 진주국은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청난은 하나를 물으면 열 가지로 대답해 주었다. 또한, 진주국은 돌덩이라도 달아 놓은 듯 입 끝이 언제나 땅을 향해 있었는데, 그에 비해 청난의 입매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듯 미소 짓는 것처럼 하늘 쪽을 향해 둥글게 휘어 있었다.
백매는 도무지 초하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였다. 백매의 표정이 점차 심각한 고민에 빠져 가자 초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사제, 주름 생기겠어. 자, 그만 생각해. 수련하는 걸 보여 줄게.”
초하는 창가에서 몇 걸음 떨어졌다. 이 거리라면 그가 검을 놓치지 않는 한 혹여라도 다칠 리는 없어 보였다.
초하는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검을 쥔 손목을 가볍게 돌리기 시작했다.
칼날은 손길에 따라 곡선을 그렸고, 그 잔상은 마치 물결처럼 보였다. 초하의 동작은 점점 커져 갔다. 그의 어깨가 움직이자 물결은 강의 흐름이 되었고, 그의 다리가 움직이자 바다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찌르는 그의 검은, 맹렬한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백매는 하마터면 감탄사를 내뱉어 그의 수련을 방해할 뻔했다.
일 주간 수업을 들으며 청난의 검은 많이 보았지만, 그의 경지는 너무나 높은 곳에 있어 다른 세계의 동작 같았다. 그에 비해 주초하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고 훌륭했지만, 청난의 것보다 현실감이 느껴져 고수의 검을 보았다는 느낌이 확연하게 들었다.
모든 동작을 마친 초하는 검집에 검을 넣고 다시금 백매가 있는 창가로 다가왔다.
“어땠어?”
“굉장해요. 제가 이것을 익힐 수 있을까요?”
“물론이야. 하지만 조금 다를지도 몰라. 난 내 사존의 검결을 따라가고 있는 거라 사숙의 검법과는 조금 달라.”
‘또…….’
초하의 표정이 다시금 불그스름해졌다. 백매가 아무 말도 않자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존의 검은 정말 강인해. 진 사숙을 제외하면 수선계에서 그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어. 많은 사람들이 사존을 좋아해. 그러니 화 사제도 사존을 좋아해 주면 좋겠어.”
백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