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45)화 (45/111)

#45

청난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지금껏 보호자가 없었는데 누가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그의 이름을 불렀겠는가.

청난은 애써 털털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내가 지어 주마. 스승은 아비와 같다 하지 않으냐. 그럼 우선, 성은 진(秦)…….”

“안 돼.”

시작부터 막혀 버린 청난은 뚱한 표정으로 주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어디 부모님께서 이것을 쉬이 납득하실 만한 분이더냐. 대신, 내가 ‘화(禾)’라는 성씨를 주마.”

주국은 장 속에서 종이와 붓을 꺼내 들고는 가장 높은 곳에 화(禾)를 적었다.

“너로부터 시작하는 이름이야. 어디 크게 키워 보거라.”

“그럼 이름은 내가 지어 주마.”

청난은 종이에 두었던 시선을 올려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를 감싼 의복이 하얀 탓일까, 그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둥글게 말린 탓일까. 청난은 자신의 처소 앞에 피어난 하얀 매화나무가 떠올랐다.

청난은 주국에게서 붓을 넘겨받아 종이에 이어서 글을 써 내려갔다.

백매(白梅).

“흰 백, 그리고 매화나무의 매를 쓴다. 이것을 네 이름으로 하고 싶구나. 괜찮으냐?”

아이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청난이 들어 보인 종이를 본다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대신 그것을 든 섬섬옥수 같은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생처음으로 가진 자신만의 것이었다.

아이, 백매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백매는 새로운 의복을 받았다. 전체적으로 흰 탓에 때가 잘 탈 것 같은, 물결 모양이 수놓인 긴 소매가 거추장스러웠다. 하지만 백매는 이런 고얀 생각은 입 안에 꼭꼭 삼킨 채, 묵묵히 스승이 지시한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청난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대갓집의 마당을 그대로 옮겨 온 것처럼 넓고 텅 빈 강당이었다. 입구에서부터 가운데로 길게 뻗은 대리석 바닥은 애매한 곳에서 끊겨 있었고, 그곳을 제외하고는 나무판자가 바닥을 채웠다.

청난은 대리석 길 끝부분의 바로 옆에 앉아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앞으로 넌 이곳에 앉으면 된단다. 내 제자라는 뜻이지. 시선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일찍 왔다. 다른 사람들은 곧 올 거야. 네 새로운 가족들이니 유심히 보거라.”

백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백매는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지 몰라 그저 문을 바라보며 시간을 달랬다.

드르륵. 마침내 문이 열리고 무뚝뚝한 표정의 주국이 들어와 청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뒤로는 일곱 명의 소년과 소녀들이 일렬로 앉았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는 지난밤 백매에게 인사했던 주초하로, 열다섯 정도 되어 보였으며, 그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이는 나이가 백매와 비슷해 보였다.

초하가 주국의 듬직한 몸에 가려졌던 고개를 빼꼼 빼내어 맞은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곳에는 오직 청난과 백매만이 있었는데, 지난 날 청난에게 예의를 갖췄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 손 인사가 청난을 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청난은 몸을 기우뚱하며 자신의 뒤에 있는 백매가 그것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백매는 초하의 인사에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곧 주국의 등 뒤에서 처음 듣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사형, 아는 사이인가요?”

“응, 어제 만났어. 진 사백의 제자야.”

“어느 집 자제래?”

“그건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조용히 있을게요.”

주국은 아무런 말 없이, 뒤를 돌아보기만 했을 뿐인데 혼이 난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들어온 탓에 그들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강당에는 청난의 나이대로 보이는 여덟 명이 앉았고, 그들의 뒤에 앉은 제자들의 수는 각기 천차만별로 달랐다. 가장 적은 건 백매 한 명뿐인 청난이었으며, 가장 많은 건 열일곱의 제자를 둔 이였다. 그는 나이도 가장 많아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이립의 나이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곧게 뻗은 다리로 성큼성큼 중앙을 밟은 그는 길의 끝이자 강당의 중앙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사방에서 정제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자, 각주를 뵙습니다.”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강당을 울린 힘찬 인사에 비해 수야각주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다.

“어제 새로 들어온 이들이 많습니다. 저는 수야각을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유회평이라 합니다.”

유회평은 자신의 소매 안을 뒤적이더니 주먹만 한 크기의 구슬을 꺼내었다. 그것은 투명하다가도 오색이 깃든 것처럼 보이는 퍽 신비로운 물건이었다. 백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에 따라 변하는 그것의 모습을 관찰하였다.

“재밌게 생겼죠? 이건 심수경이라고 하는 법보입니다. 여러분들의 영근을 판별해 주는 법보예요. 입문 시험 때 여기 계신 여러분들의 스승들이 영맥을 짚었겠지만, 가장 정확한 것은 이것을 통해 형상화하는 것이랍니다. 이제 한 명씩 나와 이것을 써 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미 수야각의 사람이니 결과가 어떻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전통적인 자기소개 정도로만 여겨 주세요.”

그는 설명을 잇더니 곧바로 백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서에 따라 소각주의 새 제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화백매는 올라오세요.”

회평에 지시에 따라 백매는 그의 앞에 앉아 심수경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심수경이 안개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양의 안개가 온 강당 곳곳으로 흩어져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곧 심수경은 보다 진한 것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구름이라 하기엔 연하였지만 안개라고 하기엔 짙은 것은 점점 형태를 갖추어 갔다.

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할 때엔 여덟 명의 스승들은 가벼운 담소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수야각이 제자를 새로 받은 건 오랜만이라 하더라도 새 제자가 생길 때마다 의례적으로 행하던 것이었으니 그들에겐 다소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짙은 안개가 형태를 빚을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하나씩 사라져 갔고, 그것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엔 그들 중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용?”

고요함을 깬 건 앳된 목소리였다.

강당의 가운데에 있는 화백매와 유회평,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촘촘한 안개 사이로 한 마리의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세상에.”

“천영근? 저 아이가 천영근이라고?”

“말도 안 돼.”

감탄 또는 경악의 목소리들이 줄을 이었고, 그들 사이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짝짝.

그것의 주인은 현 수야각주 유회평이었다.

“아주 귀한 인재가 들어왔네요. 한 세대에 이렇게 많은 천재가 난 것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이는 수야각의 복이자 곧 수선계의 복이죠. 각주이기 이전에 한 수사로서 이런 자들과 함께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행운입니다.”

유회평은 마치 미리 준비한 것처럼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새로 들어온 이들을 위해 천영근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그들이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하는 것이 주된 이야기였는데, 사실상 다른 이들을 달래는 것에 가까웠다. 백매는 수선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백매는 이미 지난밤에 유회평과 만나 심수경을 통해 자신의 영근을 확인했었다. 그는 백매의 천영근을 확인하자마자 입이 귀까지 찢어질 듯 큰 미소를 지었었다. 지금의 그가 이토록 덤덤할 수 있는 것은 미리 놀랐던 덕분이었다.

그날 밤 청난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한 그는 놀란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후에야 백매를 앉혀 긴 말을 건넸었다.

-한 가지 속성으로만 이루어진 순수한 영근인 ‘천영근’은 수사가 가지는 최고의 재능이란다. 여러 속성으로 이루어진 영근을 그 개수에 따라 ‘쌍영근’, ‘삼영근’ 등으로 불리지. 그런 순수하지 못한 영근을 가진 이가 수년을 수행해야 하는 것을, 천영근은 불과 일 주 만에 얻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자만하고 나태해지지는 말거라. 신선이란 그런 재능을 가진 자가 노력하고 또 노력함에도 닿을 수 있을지 모를 아득한 경지이다. 고로, 천영근이 아니면 신선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지. 다들 알 거야. 자신들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이것이 너를 따로 불러낸 까닭이다. 부디 네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달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백매는 지난밤 그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어른’을 만난 것 같았다.

백매는 유회평의 긴 말이 끝나고서야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다른 제자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영근을 확인하였다. 당연하게도 백매 외의 천영근은 없었다.

유회평은 그 후로 식사는 어디서 하는지, 거처는 어디인지, 문파 내에서 어떻게 생활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그의 설명은 일목요연하였으나, 규칙이 많은 탓에 해산을 했을 때엔 이미 점심 무렵이 지나 버린 후였다.

새로 온 문하생들은 사형, 사저들을 따라 밥을 먹는 곳인 하곡관으로 안내받았다. 백매는 동학인 사형이 없으니 청난이 안내해 주어야 했지만, 그가 각주의 부름을 받은 탓에 주국의 제자들과 함께 주초하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백매는 내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지난밤 각주께 들어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주인공이 되니 불편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안 보는 척하려는 것 같았으나, 전혀 그러지 못했다. 백매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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