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깼어? 몸은 좀 어때?”
아이는 대답을 망설이느라 조금 늦게 대답하였다.
“괜찮… 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는 이만…….”
“응? 어디 가?”
청난의 말에 아이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 귀태 나는 미인은 역시나 저에게 대가를 요구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목숨밖에 없었으니 도망가야 했다.
청난이 창가에서 벗어나 아이에게 걸어갈수록, 아이는 눈에 띄게 긴장하였다.
“걱정 말거라. 해치지 않아. 단지 혼자 식사하기엔 적적하니, 네가 내 말 상대가 되어 주면 좋겠구나.”
“바… 밥?”
“그래, 밥. 무엇을 좋아하니? 뭐든 사 주마.”
아이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그의 유혹은 거부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굶어 죽고 싶진 않았다.
아이는 도망치려던 계획을 잠시 미루고, 그가 옆으로 다가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좋아하는 게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걸 먹자.”
“으, 으응… 네.”
“옳지, 착하다.”
청난은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것이라 생각해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는 청난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여관의 바로 뒤 건물은 같은 주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청난이 들어서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되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는 탓에 임의로 네 가지 음식을 골랐다. 음식은 비교적 빨리 나왔고, 청난은 아이가 밥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아이는 음식을 잡을 때까지는 오래 걸렸으나, 한번 입에 넣은 것은 빠르게 씹어 삼켰다. 점점 앞에 놓인 접시들이 바닥을 보여 가자 청난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집이 어디니?”
그의 말에 아이는 얼음에 갇힌 양 완전히 멈추었다. 고개도 움직이지 않은 채 눈동자만을 굴려 청난을 바라보았다. 청난은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 어, 없어요.”
“응? 어째서?”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럼 보호자도 처음부터 없었니?”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듯 주변을 헤매던 아이의 눈이 결국 다시 청난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갖고 싶어?”
이번에도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젓기만 하였다.
“나는 갖고 싶어. 얘야, 수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고 있니?”
아이는 한참 동안 고심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산에 사는… 사람들?”
“응, 맞아. 그래서 산에 가면 넓은 집이 있지. 나는 그곳에 살고 있어. 너도 함께 갈래?”
아이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청난은 당연히 그가 좋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나 빠르게 거절당할 줄이야. 청난은 당황하여 다시 물었다.
“정말 싫으니?”
이번에도 아이는 빠르게 두 번 저었다.
“겁나?”
이번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가 사방을 헤매었다.
“그럼 나도 겁나?”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솔직하네. 그럼 갈 곳이 있어? 적어도 네가 다시 눈 속에 파묻히지 않을 수 있는 곳 말이야.”
“없지만……. 나는 선사님한테 아무것도 줄 수 없어요. 그러니 데려가셔도 소용없어요.”
“내가 너한테 대가를 바란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
“안 믿어요. 대가도 없이 저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아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러나 힘없이 늘어졌다.
청난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 또래의 아이들은 세상모르고 뛰어다니지 않던가. 저 아이는 어쩌다 저런 생각을 품게 되었을까.
청난은 최대한 눈꼬리를 끌어 내려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켜 버렸구나. 맞아, 나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널 원하는 게 아니야.”
“역시… 그럼 저는 어디로 팔려…….”
“난 네 재능을 원해. 너에게 탁월한 재능이 있단다. 네가 수련을 해서 네 스승이 될 나의 이름을 널리 알려 다오. 그것이 내가 널 돌봐 주는 대가야.”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곧 진정된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청난은 그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눈앞의 만두를 집어 먹었다. 청난의 입 안이 비어 갈 때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마저 먹자.”
청난은 점원을 불러 만두를 추가로 주문하였다.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빗을 든 청난의 표정은 마치 결전을 앞둔 장수처럼 심오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푸석할 뿐 아니라 곱슬곱슬한 데다가 엉켜 있기까지 한 탓에 보기 좋게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고, 검을 다루던 손놀림을 발휘하고도 빗살이 세 개쯤 떨어져 나간 뒤에야 청난은 그의 머리카락을 묶어 줄 수 있었다.
점원을 통해 사 온 새 옷은 다행히도 아이에게 잘 어울렸다. 청난이 입은 것과 닮은 하얀 의복이었다. 그렇게 꾸미고 입히니, 몰라볼 정도로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른 인상을 주었다. 이 아이가 선천적으로 귀태를 타고났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더구나 귀엽게 생기기까지 하였으니, 이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를 데려가고 싶어 할 것이다.
‘음, 내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다.’
청난은 자신의 운을 뿌듯해하다가도, 그의 안타까운 사연이 생각이 났다. 생사를 넘나들었을 그에게 실례되는 생각임이 분명했다.
청난은 괜히 찔려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보드라운 감촉에 아이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눈을 마주친 청난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분이 어떠하느냐?”
아이는 청난의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들어 오던 저속한 말들과 달리 여전히 교양이 넘쳤고, 그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온화하였기에, 자신을 낮추어 본다는 느낌보다는 친근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덕에 아이의 경계심은 한층 낮아졌지만, 그럼에도 남아 있는 경계심이 목을 빳빳이 들고 있어 긴장감이 온몸에 감돌았다. 그는 자신이 표정을 관리하지 못할까 봐 다시 고개를 돌려 청난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어떻게 되나요?”
“검을 배우고, 술법을 배울 거란다. 그러면서 수선이 무엇이며, 수선자가 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거다. 네가 원한다면 셈을 가르치고 기술을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 우리 사문엔 인재가 많으니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배울 수 있을 거란다.”
별거 아닌 듯 말하였지만, 사실 청난은 이 아이가 어느 정도는 감동하거나 기대할 줄 알았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는 덤덤하였고, 심지어 불만스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사실 아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길거리 생활을 하며 감정 표현이 둔해진 탓에 청난이 오해하고 말았다.
청난은 이 아이를 달래 주고 싶었기에, 다른 종류의 혜택을 꺼내 보았다.
“그리고 어버이이자 스승이 생기지.”
아이의 고개가 획 돌아가 청난과 눈을 마주하였다. 그는 꽤나 놀란 모양이었고, 또한 생기가 돋아나 보였다. 청난은 그 모습에 괜스레 만족감이 들었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아이의 둥근 선이 청난의 눈에 들어왔다.
‘귀엽네.’
청난은 벌써부터 솟아오르는 유별난 관심을 숨기고 스승 될 자로서 위엄 있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앞으로 네 어머니고, 아버지며, 또한 스승이 되어 주마. 어때? 마음에 드느냐?”
아이가 입술을 오물오물거리는 것이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감사 인사를 하려는 걸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아니면 겁이라도 나는 것일까. 청난은 그가 감정을 정리하고 스스로가 만족할 답을 하길 기다렸다.
이 아이는 유별난 스승만큼이나 유별난 건지 또다시 청난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그럼 제 주군도 되시는 건가요?”
“으응……?”
“사람들이 그랬어요. 군사부일체라고. 부모이고, 스승이시면 주군이기도 하신 게 아닌가요?”
청난은 이 아이가 군사부일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군사부일체’는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였고, 이 아이가 서당을 다닐 수 있었을 리도 없지 않은가.
청난의 생각은 정답이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자신의 별 볼 일 없는 재주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으며, 이 아이와 같은 거지들은 그것에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들의 처지를 우습게 여기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티끌의 재주를 과장하여 늘어놓곤 하였다. 이 아이는 배움의 의지가 있었다. 또 들은 것을 잘 잊지 않는 재주까지 가졌다. 덕분에, 혹은 그 탓에 이런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된 것이었다.
청난은 아이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집안과 재능이 훌륭한 인재들만 모여 있던 탓에 이런 아이를 겪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떻게 대처법을 알 수 있겠는가. 그는 결국 아직 스무 해밖에 살지 않은 젊은 청년이었다. 청난은 대답을 하면서도 걱정이 들었다.
“난 누군가의 주군이 될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네 신은 되어 줄 수 있겠구나.”
“시… 신이요…….”
“응, 신.”
으레 평범한 자들과 비교 안 될 도량에 아이는 그가 비유를 거창하게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동네 서당 도련님들이 임이 어떻니, 달이 어떻니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곧 그가 말했던 수선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내고는 그의 말이 온전한 진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청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널 축복해 줄 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