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옛 제자가 신선이 되어 찾아왔다 (40)화 (40/111)

#40

백매는 간단한 일인 양 말했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청난은 제자의 일취월장에 스승으로서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백매가 그 시선을 모를 리 없었고, 그는 제 스승의 이런 표정을 바로 직면할 만큼 자신감 있는 사람도 못 되었다. 그는 시선을 어찌 돌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좌우를 번갈아 살피었다.

청난은 그 모습이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린 제자를 놀리기에는 시기상조였으니 청난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진 대인과의 대화에 집중하였다.

“그럼 남은 건 치안이겠군요.”

“그렇지. 이런 때를 틈타 제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이 있을 걸세.”

“그렇다면 한두 명 잡아다 본보기로 혼내 주죠.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혼내 주는 건 진 대인의 몫이었다.

모든 걸 백매에게 맡길 수도 없거니와, 언제까지고 마을 안을 지킬 수 없었다. 만약 그리한다면,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오만가지 문제들이 단번에 터져 나오고 말 것이 분명했다.

‘또, 내가 나서면… 인상이 안 좋아지겠지.’

저를 보며 소곤대던 이들이 다시 떠올랐다.

청난은 이제껏 마을 주민들에게 술법을 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첫 번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위험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의 새로운 모습. 그것은 불안은 야기했을 테고, 이 불행의 원인으로 의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아…….’

생각해 뭣 하겠는가. 청난은 생각을 떨치기 위해 다시 화제를 이어 갔다.

“그럼 오늘 밤에 다시 찾아뵐 테니, 조직의 개편 방안을 물색해 봅시다.”

“밤에? 자네 어디 갈 텐가?”

“집에요. 아버지 혼자 정리하시도록 할 수 없으니까요.”

“효자군그래.”

청난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진 대인은 능청스러움을 버리고 껄껄 웃어 보였다. 청난은 그제야 복잡한 곳을 나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귀가를 한 청난을 반긴 것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부서진 문이었다. 지난밤의 혼란을 표상하는 것인지, 그 너머로는 무너진 책장이 보이고, 갖은 서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곧 청운이 돌아올 텐데, 그가 이 모습을 본다면 기절하지 않는 게 다행일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은 힘이 센 백매가 함께 왔다는 것이었다.

“아가, 날 좀 돕지 않으련?”

청난의 청에 백매가 활짝 웃으며 반겼다.

“물론이에요, 사존. 이곳을 정리하면 되는 건가요?”

“정리하는 건 내가 할 터니 너는 책장만 세워 주면 된다.”

“저도 할 수 있어요. 자주 온 덕에 위치는 다 외웠으니까요.”

“…….”

정말로 십 년 동안 지켜본 건 아니겠지?

백매가 쓰러진 책장을 잡더니 단번에 일으켜 세웠다. 어찌나 가뿐한지 저 책장이 무거운 나무가 아니라 종이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슬아슬 걸려 있던 책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무슨 수를 부린 것인지 솜털처럼 사뿐히 내려온 덕분에 망가지지 않았다. 백매가 한 권 한 권 주워 책장에 꽂았다. 정말로 모든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질문도 할 필요가 없으니 백매는 그저 묵묵히 책장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의문 많은 표정으로 입만 닫으면 무슨 소용이겠느냐…….’

백매는 영원토록 말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 어쩔 수 없이 청난이 스승 된 도리로서 먼저 입을 열었다.

“스승이 너무 아무 말 없이 부려 먹은 것 같구나. 이제 보는 이도 없으니 뭐든 말해 보거라.”

“아, 아닙니다……. 제자는 사존을 돕는 일이면 뭐든 다 좋습니다. 그냥, 그냥 좋습니다.”

다른 이들의 앞에서 단호하게 말하던 제자는 다시 또 수줍은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청난이 다른 말 없이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자, 우물쭈물하던 입은 겨우 소리를 내었다.

“어째서 정체를 밝히지 않으시는 거죠?”

“그야, 갑자기 신선이 나타났다 하면 믿겠느냐? 사기꾼이라 생각하고 멀리하거나, 아니면 네 앞에 조아리고 있느라 아무것도 못 하겠지. 신선과 검을 휘두를 배짱이 있다면 진즉에 상경하였을 거다.”

“아니, 저 말고 사존의 정체요.”

“내 정체?”

“네. 누군지 안다면 감히 숙덕이는 건 생각지 못할 테고, 당신을 우러러볼 거예요. 그럼 더 좋은 대우를 받으셨을 거고요.”

그의 목소리에는 막연한 음울함이 묻어 있었다.

정말로 십 년간 지켜보았다면, 아니 지켜‘만’ 보아야 했다면, 무력감에 짓눌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만 해야 하는 괴로움을 어찌 이해 못 할까. 그에게 동질감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하지만 스승이란 마냥 달래는 존재가 아니다. 청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거다. 앞서 한 말과 같은 대답밖에 할 수 없구나. 믿었겠느냐. 나를 사기꾼이라 손가락질했겠지. 영광엔 그에 따른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능력 없는 영광은 감동을 이끌지 못해.”

“하지만 그게 진실이잖아요.”

“세상 무엇보다 허무한 것이 진실이다.”

“…….”

백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아랫입술은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영광 속의 사존 진청난은 이젠 없다는 것을.

마침 마지막 책을 꽂아 넣던 찰나라 청난은 주변과 함께 말을 정리하였다.

“내가 너무 떠들었구나. 이젠 네가 나보다 세상을 더 잘 알 텐데 우쭐대었어. 이 스승을 용서해 주겠니?”

“그런 말 마세요. 제자가 어찌 그런 감정을 품겠습니까.”

“품을 줄 알아야지. 스승의 잘못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하산할 수 있는 거다.”

“제게는 사존의 말이 전부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옳아요. 당신이 까마귀가 희다 하신다면, 저는 모든 까마귀를 물들일 겁니다.”

청난은 대화를 정리하고 주제를 돌리려고 하였는데, 이 제자는 모든 것을 스승에게 양보하면서 정작 제 스승에 대한 일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의 굳센 두 눈을 보니 이 아이는 거대한 파도가 제 앞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더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고집은 어디서 배워 온 건지.’

결국 이번에도 청난이 한발 물러나 우스갯소리로 어영부영 마무리하였다.

“저런……. 까마귀는 까매서 까마귀야.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자, 이제 일어나자. 아버지께서 오실 때까지 좀 쉬어야겠다.”

서책방 구석에는 집과 연결된 쪽문이 있었다. 청난이 삐걱거리는 문을 잡아 열고 건너가자 백매가 그 뒤를 따라왔다.

가뜩이나 낡은 문은 지난밤에 충격까지 받은 탓에 사방으로 가시가 돋쳐 있었다. 청난이 그의 소매가 걸리진 않을까 걱정을 하던 차에, 백매의 널따란 소매가 걸려 버리고 말았다.

“아.”

백매는 소매를 가볍게 당기더니 이내 그만두었다. 그는 깨달은 것이다. 이것을 당기면 망가지는 것은 제 소매가 아닌 이 문이란 것을. 그 정도로 백매의 옷은 값비싼 것이었고, 청난의 집 문은 값싼 것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돈이 많이 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청난은 그에게 문을 부수라고 말하려고 하였다. 어차피 앞문을 고쳐야 하니 겸사겸사 쪽문도 고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백매가 자신의 소매를 쭈욱 찢을 줄이야. 그렇게 백매의 고급스러운 소매는 어느새 민소매가 되어 버렸다.

“그… 걸 왜 찢어!”

“아, 안 되나요?”

청난이 이렇게 놀랄 줄 몰랐던 백매는 단번에 소매를 찢던 기세는 또 어디 가고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까지 하였다.

청난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인 것을 후회하며 그를 달랠 방안을 생각했다.

“그… 나는, 긴 소매가 좋단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이유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아, 그럼 제자가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됐어. 뭘 또 그렇게 하느냐. 네가 불편하다면 내 옷을 빌려주마.”

물론 소매가 짧겠지만, 짝짝이보단 나을 테지. 청난은 굳이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하지만 백매도 그것을 아는 건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자가 어찌 감히 사존의 의복을 탐합니까.”

…….

아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대답은 짧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청난은 불편한 감정이 발끝에서부터 슬금슬금 올라왔다.

‘감히’라니.

‘그렇게 말하는 게 맞아? 애정하는 이 앞에서는 더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이 보편적이지 않아?’

연모하는 이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그의 화법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줄곧 가져 왔던 한 가지 의문에 확신이 생겼다.

그가 저를 연모한다고 하지만, 연모보다는 숭배에 가깝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착각하고 있다.

그는 감정 표현에 서툴렀으니 배움도 서툴렀을 것이다. 그러니 헷갈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가르쳤어야 했는데, 유일한 보호자였던 내가.’

청난은 제 속이 엉킨 듯한 불쾌함을 느꼈다. 만약 그에게 영단이 있었다면, 그가 수선자였다면 주화입마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청난은 문득 이 불쾌함이 다른 감정임을 깨달았다.

죄책감이구나.

청난은 복잡한 심정을 한쪽에 묻어 놓았다.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덤덤하게 말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감히’라는 말은 하지 말거라.”

“하지만 사존께서 제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제자가 그럴 수는…….”

“후… ‘제자’도 하지 말자.”

“그럼, 백매가…….”

“……너를 낮추지 말라는 얘기였는데. 그래, 차라리 그게 낫구나. 네 이름 한 번이라도 더 들으면 좋지.”

“화… 나셨나요?”

“내 아가에게 왜 화를 내겠느냐.”

청난이 방 앞에 도착하여 문을 밀어 열 때까지도 그의 시선과 목소리는 오직 백매에게 향했다. 그 탓에 청난은 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미처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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