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산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올 때보다 편했다. 청난이 주저앉기 전에 백매가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청난은 제 체력을 알았기 때문에 순순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가.”
“네, 사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강은 과했던 것 같구나.”
백매의 발의 순간 멈칫하다가 이내 다시 이어졌다.
“역시… 티 났죠……?”
“내가 이곳에만 이십 년을 살았는데 모를 턱이 있느냐.”
“그래도 산은 안 오르셨잖아요.”
“아주 십 년간 지켜봤다고 자백을 하지 그러느냐.”
“…….”
백매는 말을 아꼈다. 제 스승에게 거짓을 고한 적이 없었으니, 그의 침묵은 곧 긍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청난이 앓을 때면 청운이 귀한 비싼 고깃국을 끓여 주더라니.
‘무슨 은혜 갚는 호랑이도 아니고…….’
“일은 다 끝냈느냐?”
“네, 우선은요.”
“우선은?”
“아직 잡다한 게 남았잖아요. 그걸 어찌할지 아직 아웅다웅하고 있죠. 한연화도 거기에 시달리고 있어요.”
“아예 인계를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구나.”
청난의 말에 다소 가시가 박혀 있었다.
백매는 청난의 등을 감싼 손목을 흔들며 가볍게 토닥였다. 제가 속한 세계를 욕하는 것임에도 백매는 그저 제 스승의 기분을 풀어 드릴 생각뿐인 모양이었다.
“어찌 그러겠어요. 저를 부르는 이들이 이토록 많은데. 하지만 다른 주장도 무시할 순 없어요. 신선에게 기대기만 해선 앞으로 새로운 신선은 나오지 못할 테니까요.”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난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러나 혼란이 계속된 지도 오래였다. 타고난 수명을 다 채워도 백 년을 살기 어려운데, 오늘 제 옆에 있는 사람이 내일은 죽을지도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왔다. 미래를 위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해도, 처지가, 상황 때문에 가슴 깊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청난 또한 인간일 뿐이었다.
수선계에서 멀리 떨어져 평범하게 살려고 했었건만, 세상이 그리 두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음… 일단, 쉴까.’
백매의 품은 포근하고 안락해,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더구나 햇빛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이토록 따사로우니, 잠깐 눈을 감으려다 잠에 빠져들어 버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청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민가 사이를 걷고 있었다. 물론 걷는 건 백매뿐이었다. 얼마나 푹 잔 것인지, 청난은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가 축지법이라도 쓴 줄 알았다.
“깨셨나요?”
“내가 얼마나 잤어?”
“일 주향 정도 주무셨습니다.”
“그렇게나 오래 잤어? 네게 수고를 끼쳤구나. 이젠 내려 줘.”
백매가 유리그릇을 다루는 듯 조심스레 청난을 내려 주었다. 그의 몸은 그렇게까지 약하진 않건만. 하지만 청난은 그의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마침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후문과 그리 멀지 않았다. 골목 너머에서부터 기병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몰래 나왔으니, 몰래 들어가야 했다. 청난은 백매의 손을 잡고는 반대쪽 검지를 입술 위에 붙였다. 쉿. 소리 없는 행동을 취하자 백매는 귀엽게도 빈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방으로 들어온 청난은 내실에 있는 침상부터 확인했다. 나가기 전에 이불을 둘둘 말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꾸몄었는데,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인 것을 보니 누구도 들어온 적이 없는 듯하였다.
외실로 나가니 그새 백매가 찻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의 복식은 평범하였지만, 법보로 보이는 장신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의 이목구비 탓에 그는 몹시 화려해 보였다. 그런 인물이 다소곳하게 앉아 차를 우리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였다. 정말 잘났지, 내 제자는.
그가 내실에서 나오는 청난을 보고는 해사하게 웃으니, 온 방 안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청난의 입꼬리가 솟아올랐다. 청난이 앞에 앉으니 백매가 빈 찻잔을 쪼르르 채워 주었다.
차에서 매화 향이 났다. 이 마을에는 해류진군을 신봉하는 자가 많았으니, 이 집의 하인도 그중 한 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모금 마시니 따뜻함에 온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전생에는 차의 향과 맛을 즐기어 자주 마셨는데, 현생에서는 따뜻함 때문에 자주 찾게 되었다.
“이젠 어떡하실 건가요?”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 오늘 본 것과 같은 게 다른 곳에도 있지 않겠느냐. 그곳에는 다른 단서가 있으면 좋으련만.”
청난이 차를 홀짝이고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이곳을 정리하고. 다들 혼비백산일 게다. 요마에 대한 방범은 차치하고서도 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치안이 엉망이 될 테지. 진 대인은 지도력이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간 교류가 없던 탓에 제 능력만큼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겠지. 나라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청난이 후,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나는 다녀올 테니, 너는 예서 기다리고 있어라.”
청난이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백매가 휘둥그레지며 따라 일어섰다. 그가 급하게 일어난 탓에 찻잔이 엎어질 뻔하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흔들리는 찻잔을 잡은 덕에 쏟지는 않았다.
“저, 저는 같이 안 가나요?”
“그렇지? 갑자기 네가 나오면 다들 경계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위험합니다. 전처럼 몰래 지켜보겠습니다.”
“내가 알면 몰래가 아니지 않느냐?”
“다른 사람들 몰래라는 말이죠.”
“그건 참… 어감이 별로구나. 그냥 예 있어라. 잠깐 상황만 보고 올 뿐인데 네가 걱정하는 일이 생기겠느냐.”
뭣보다 누군가 지켜보는 것을 아는데 자신은 볼 수 없다는 건 꽤 불편한 것이었다.
청난은 그를 두고 가려 하고, 그는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아옹다옹 서로를 설득하는 데에 집중한 까닭에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결국 경비병의 묵직한 발소리가 접근해 왔다. 백매는 무인이었고, 청난은 감이 좋았으니 누군가 다가온다는 것을 감지하자 대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장지문 너머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사,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청난이 서둘러 답하였지만, 상대는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인지 다가오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대인께서 책사의 안전에 전심을 다하라 명하셨습니다. 제가 육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예. 제가 나가겠습니다.”
청난은 경비병에게 얼굴만 잠시 내비치기 위해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지만 백매는 그대로 나갈 것이라 생각해 옷자락을 잡은 채 놓아 주지 않았다. 경비병이 바로 문 앞에 있으니 말을 하다간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금세 들키고 말 상황이었다. 청난은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해 보려 하였지만, 백매는 알아듣지 못하였다.
“책사?”
경비병의 재촉에 결국 청난은 백매가 잡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발에 힘이 풀릴 게 뭐람. 청난의 몸이 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청난이 넘어지는 것을 백매가 두고만 볼 리 없었다. 다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청난의 움직임이 과하게 본능적이란 것이었다. 청난은 저의 허리를 잡은 백매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더해진 무게 탓에 더욱 기울었다.
세상사는 어째서인지 재앙엔 재앙이 따랐다. 그런 법칙은 이런 작은 일에도 적용되었다. 그들이 함께 넘어지는 순간에 맞춰 드르륵 문이 열렸다.
문밖에 있던 두 명의 경비병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청 책사가 괴인의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삼 초간 멍하니 있더니 곧 거칠게 검을 빼 들었다.
“누구냐!”
경계심이 인 것은 백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이들이 사존을 앞에 두고 검을 뽑았다. 그것만으로도 백매의 눈매에 차가운 냉기가 서리기엔 충분했다.
청난은 두 자루의 검과 맹수 같은 제자의 표정을 사이에 두고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검을 치우세요! 제 사람입니다. 너도 진정하여라. 응? 옳지, 옳지.”
청난이 다급하게 백매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백매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그 모습을 본 경비병도 겨누었던 검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완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아마 백매의 휘황찬란한 분위기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이 작은 마을에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었으니.
“저분께선 언제 들어오신 겁니까? 아무리 책사라 하여도, 외부인을 안쪽까지 들이시면 곤란합니다.”
“하하, 죄송합니다.”
청난이 바닥에 등을 댄 채 웃었다. 전투를 지휘하던 책사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백매는 뭐가 맘에 안 드는 것인지 표정에 불만이 서렸다.
“제가 멋대로 온 것이니, 사… 이분을 탓하지 마십시오.”
백매가 그제야 일어나서 청난을 일으켜 주었다. 그는 익숙하게 청난의 망가진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청난이 이 마을에 사는 평범한 주민이라고 알고 있는 경비병들은 이들의 관계를 추측하느라 애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눈치를 보더니 앞서 말했던 이가 또다시 말을 건넸다.
“두 분께서 각별한 사이라고 하셔도 대인께 보고는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마침 저도 나가려던 참이니 함께 갑시다.”
청난이 불쑥 앞으로 가는 바람에 백매는 그의 옷자락을 잡을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백매의 빈손이 허공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청난이 문득 뒤돌아보니 백매가 그 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청난은 고개를 갸웃대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뭣 하느냐. 가자꾸나.”
백매는 기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전에 자신의 표정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부디 그가 보지 못했길 바랄 뿐이었다.